정장을 샀다
아빠는 말수가 적다. 낮은 음색으로 말 한마디 입 밖으로 꺼내 놓기까지 아빠는 숨 고르기를 길게 하는 것일까. 높은 톤에 쉬지 않고 말하는 엄마와 아빠의 조합은 엄마의 숨 고르기를 아빠가 대신하고, 아빠의 말을 엄마가 대신하는 절묘한 합이다.
아빠의 숨 고르기가 오늘따라 짧아진 것인지, 엄마가 잠깐 부재한 틈을 기다리고 있던 것인지, 작은 누나의 결혼을 나흘 앞둔 이른 저녁에 아빠가 내게 말하기 시작했다. 오른쪽 눈가의 검버섯이 움츠러들 정도의 찡그림을 약간의 걱정스러운 말투에 보태고 '정장을 잘 입지 않아서 살 필요 없다'는 아들의 볼멘소리를 저지하며 아빠가 말했다.
너는 여름에는 실내에서 에어컨 바람 쐐면서 일하고, 겨울에도 실내에서 히타 나오는 데서 일해라.
정장은 사둬, 아빠처럼 평생 작업복이나 입으면서 살지 마라
이번 누나 결혼식에 입을 정장을 굳이 새로 사지 않겠다는 아들에게 아빠는 고생스러웠던 자신의 인생 전체를 후회하는 듯한 이야기를 꺼냈다. 무언가 문 답의 상관관계가 명확하게 일치하는 느낌이 아니었지만 아빠의 의도는 흐릿한 중에서도 가슴에 잡혔다. 한마디 덧붙이는 아빠의 말이 아팠다.
아빠가 뒷 바라지를 제대로 못해줘서 네가 변변치 못한 직장에 다니는 거잖아.
'로얄 금속'이라는 작은 기업에서 작업복을 입고 출퇴근했던 아빠, 아빠의 직장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을 바탕으로 아빠는 '신광 공업'이라는 샷시 설치 공업사를 차렸다. 살고 있던 연립주택 일층 마당에 가건물을 세우고,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단속반과 옥신각신하는 풍경은 익숙했다. 샷시, 방범망, 방충망, 유리등을 설치했던 아빠의 일은 유독 한 여름과 한 겨울에 몰렸다. 에어컨이 많지 않았던 시절, 창문을 열고 자야 했던 여름엔 방범망과 방충망 설치 요청이 쇄도했고, 매서운 바람을 막을 샷시 이중창 시공이 겨울에 몰렸다. 몸에 열이 많아 벌컥 들이킨 물이 금세 땀샘으로 배출됐던 아빠의 여름은 유독 더 고됐을 것이다.
아빠의 트럭에서 내릴 때 친구들을 만나지 않기를 바랐던 적은 있다. 트럭이 왠지 모르게 창피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아빠의 작업복이, 아빠의 여름과 겨울의 풍경이 부끄러웠던 적은 없다. 아빠와 같은 직업을 선택할 마음은 없었지만 아빠의 노동을, 아빠의 시간을 존경해왔다.
칠순을 갓 넘긴 아빠를 여전히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아버지의 시간을 조금 더 붙잡아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고, 평생 드라이버를 잡고 나사못을 박아 오른팔이 일자로 쭈욱 펴지지 않는 아빠의 팔이 조금 더 천천히 노화됐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집과 붙어 있는 공업사에서 일하는 아빠가 좋았다. 웬만해선 내 곁에 머물렀으니까. 매 끼니 밥상을 차려야 했던 엄마는 고역이었을지 모르나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아빠가 존재하는 것은 꽤나 든든하고 근사한 일이었다. 그 시절 아빠의 작업복은 내게 아이언맨의 슈트 못지않은 든든한 보호막이었다.
네 살게요. 대신 아빠도 이제는 여름엔 시원하게, 겨울에는 따뜻하게만 보내세요.
정장을 샀다. 자신의 삶 전체를 헌신했던 아버지의 바람대로. 나는 정장을 입어도 되고, 입지 않아도 되는 회사에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