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미안해
결혼 전 아버님(장인어른)이 술에 취하신 모습을 몇 번 뵈었다. 남들처럼 사위와 술잔을 기울이고 싶으셨던 아버님은 술 못 마시는 사위를 앉혀 놓고 연거푸 술잔을 들이켜시기도 했고, 결혼을 앞두고 집에 오시는 친지들과 찐 하게 술잔을 기울이시기도 했다. 술 못 마시는 사위의 자리는 그럼에도 아버님 옆자리 고정이었고, 이 즈음 아버님은 술기운을 빌려 속에 있는 얘기들을 하나씩 꺼내 놓으셨다. 결혼 전에 듣는 아버님의 속 이야기는 아내를 이해하는 폭을 넓혀주는 좋은 계기였고,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내리사랑에 대해서도 느껴지는 게 많았다.
어느 날 저녁 큰 이모님 내외와 술잔을 기울이시던 아버님은 이미 거나하게 취해 계셨다. 아내와 합류해 자리를 채우고 안주를 열심히 비워내고 있던 중에 아버님이 어김없이 속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셨는데, 그날은 말보다 눈물이 먼저 흘렀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아버님은 아내를 주목하셨다.
딸, 아빠가 미안해. 내가 그때 피아노를 사주지 않았어야 되는데. 아빠가 미안해. 그때 피아노를 사줘서 네가 이렇게 학원에서 고생하는 거잖아.
순간 아내는 얼음이 된 채로 멍해졌고, 사연을 잘 모르는 내가 나서서 그렇지 않다고, 아버님 덕분에 아내가 너무 잘 컸다며 과장된 몸짓으로 아버님을 위로해 드렸다. 그날 아버님의 얘기는 진도가 더 나가기 어려웠고, 모두를 차분하게 만드는 그 무언가 였다.
아내와 통화를 하며 집에 오는 길 얼음이었던 아내가 입을 뗐다.
아빠가 저렇게 생각하는지 전혀 몰랐어. 나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빠가 사업하시려고 회사를 그만두셨거든. 그 퇴직금으로 내 손 잡고 가서 사 주신 게 피아노야. 그날 아빠랑 엄마 손 잡고 피아노 사러 가던 그 풍경, 그 느낌이 여전히 생생할 만큼 기뻤어. 그런데 아빠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 아빠 탓이 아닌데..
아버님 앞에서 얼음이 됐던 아내는. 예전 기억을 소환하며 해빙기를 맞이했는지 아내가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의 후회가 맞지 않다는 것을 아내는 눈물을 참아냄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아버님은 열악한 피아노 학원 선생님의 처우에 속상하셨던 것 같다. 자신이 애써 받은 퇴직금을 새로 시작할 사업에 보태지 않고 피아노가 갖고 싶던 딸을 위해 사용했는데, 그 딸을 향한 마음 씀에 대한 결과가 아버님 보시기에는 가혹했던 것 같다. 한 번도 드러나지 않았던 자신과 얽힌 아버지의 속내와 조우한 아내는 그 시절 아버지의 마음에 대해 오래도록 깊이 생각했고, 다음날 아버지에게 꼭 드리고 싶은 말을 꺼냈다.
아빠, 피아노 사러 가던 그 날이 난 너무 행복했어. 지금도 그때 아빠랑 엄마 손잡고 걷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해. 아빠 딸 아빠 덕분에 기쁘게 잘 살고 있어요
아내는 아버님의 눈물을 결혼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