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은 행복을 약속해주지 않는다
불행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에 가깝다
페미니즘이 대중화된 이후에, 담론의 층위가 다양하고 두터워졌다기보다는 쏠림 현상이 더 커지고 있다는 위기감이 들곤 했다. 하지만 이건 인상비평일 뿐이거나, 편향된 버블안에서 수집된 인지편향이기도 하다. 두가지를 잘 분별해내야 비판적, 성찰적 위치도 잘 잡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러가지 위기신호들이 오고 있다. 우리는 이걸 잘 넘어갈 수 있을까. 그리고 다른 국면으로 이동할 수 있을까. 사안들마다 해야할 이야기들을 충분히 하고 함께 그 다음으로 가는 것 같은 일은 실제로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더구나 무엇이든 무서운 속도로 해치워나가는 K-무엇무엇에서는 더욱 더. 그래서 더욱 이런저런 고민들이 많아지는 때이다. 그럼에도, 기대하지 않았던 좋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만은 행복할 정도로 좋은 일이다. 좋은 페미니즘 책은 지도 같기도 하고 솟대 같기도 하다.
입덕부정기예요. 라고 너는 말했었지.
강의실에서 만났던 누군가 이런 말을 했었다. 누군가라는 익명이 아니니까 이 글에서 지칭할 이름을 '겨우살이'라고 하겠다.
겨우살이는 자신이 페미니스트 입덕 부정기에 있다고 했다. 페미니스트가 아닌건 아닌데, 너무 불행의 백과사전 같은 이야기들에 치인다고도 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겨우살이가 처음은 아니었다. 소위 빨간 약을 먹기가 두렵다고 하는 이들도, 먹은 다음에도 무기력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모두 '불행'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에 대해 막막하다고 했다.
난 행복하고 좋은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알고 있는 편은 아니어서, 저런 말들을 들을 때 조금 슬프기도 했고 한편은 무척 이해가 가기도 했다. 사실은 너는 불행한 상태잖아. 정신차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그냥 못돼먹은 것일 뿐, 운동의 언어는 아니라고,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주로 이렇게 답하곤 했던 것 같다. 행복하고 좋은 이야기는 별로 없긴 한데, 이상하고 웃긴 이야기들은 꽤 알고 있다고. 그 이상하고 웃긴 이야기는 대체로 남들 다 누리고 사는 것 같은 행복을 좀 이상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들에 사라 아메드는 이렇게 답하고 있다.
"우리는 불행이 집단적인 것, 공유되는 것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할 뿐만 아니라 행복에 도전하는 일이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기획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다수의 불행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위해 투쟁할 때도, 열망의 순간에도, 계승과 재생산 사이의 간극에서 춤을 출 때도 페미니스트 아카이브, 퀴어 아카이브, 반인종주의 아카이브가 집단적인 불행의 직조물들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만약 행복할 권리에 도전하는 것이 곧장 뻗어 있는 똑바른 경로에서 이탈한 것이라면, 정치운동이란 그런 이탈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을 말한다. 이탈을 함께 나눌 때 즐거움과 경이, 그리고 희망과 사랑이 있다. 만약 이탈을 공유하는 것이 불행의 원인을 공유하는 것이라면, 즐거움과 경이, 희망과 사랑조차 불행 없이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불행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이 된다" (사라 아메드, <행복의 약속> 354쪽)
이 책이, 계속해서 현재의 쓸모를 고민하고 성급하더라고 빠르게 응답하고자 하는 어떤 K-적 정서들을 진정시켜준다. 불행과 더불어, 이탈을 공유하며 살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