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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것이 가지 않은 세계에서

낸시 프레이저의 시국진단을 읽으며, 안철수 현상을 다시 생각한다.

by 권김현영 Mar 18. 2021

"낡은 것은 가고 새 것은 아직 오지 않은" 

브런치 글 이미지 1


낸시 프레이저의 <낡은 것은 가고 새 것은 아직 오지 않은> (2021, 책세상),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 문구는 안토니오 그람시가 옥중수고에서 '위기'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면서 한 말이다. 낡은 것은 가고 새 것은 아직 오지 않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위기'라고 한다. 낸시 프레이저는 지금의 상황을  신자유주의가 약화되었으나 이를 대체할 정치체제는 아직 당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위기'이며,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위기'라고 본다.


 낸시 프레이저가 신자유주의 헤게모니가 위기에 처해있다고 분석한 주요한 근거는 지난 수십년간 북미와 유럽 등에서 지배적이었던  기존 정당을 비롯한 정치세력들이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에 있다. 유럽 연합이 약화되며 브렉시트 같은 일이 벌어졌고 극우 파시즘을 신봉하는 신흥정치세력들이 포퓰리즘의 얼굴로 등장해서 세를 넓혔으며 트럼프는 그 정점에 있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낡은 것은 가지 않고 새 것도 오지 않은"


이같은 경향성이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겠지만, 한국의 경우를 대입해보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한국의 경우 기성의 정치 계급과 정당들이 가진 권위는 어느 정도 약화되었으나, 기득권 자체는 여전히 견고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치의 측면에서는 낡았고 기득권을 유지하는 능력은 더 레벨업된 상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서로를 마주보며 네가 더 더럽다며 싸우는 풍경을 본지가 강산이 두번 바뀌고도 남을 시간이었고, 이 시간동안 사람들은 정치는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뽑는 것이라는 여의도발 현실정치론에 길들여졌다. 이들이 낡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너희들이 낡았다고 놀려봤자 새로운 것이 오는 건 아니다. 그렇게 놀리는 내가 힙스터처럼 보일 뿐, 조롱과 혐오 그리고 냉소는 정치적 역량을 전혀 강화하지 못한다. 


낡은 정치를  끝내자는  주장은 꽤 매력적인 슬로건("너희들의 시대는 끝났다")이다. 하지만 낡은 정치를 보낸 자리에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가치를 장착한 정치세력이 뚜렷하게 부상한 상태는 아니다. 한국의 경우, 그 열망을 차지하고 들어온 게 버니 샌더스도 엘리자베스 워런도 아니고 안철수였다. (...이게 머선129.....) 이게 한국 정치의 비극이자 희극이다. 진보적 가치는 비극(그래, 나는 노회찬의 죽음이 진보정치의 진정한 비극적인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으로 보수의 가치는 희극(안철수가 등장해 결국 국민의 힘에 입당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희극이라고 봐야 마땅하다)으로, 각각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파국을 지연시키고 있달까. 


그나저나 안철수가 말하는 새정치 대체 뭘까


안철수는 새정치를 얘기했었다. 안철수의 가장 잘 팔린 상품은 '새정치'였다. 지금까지도 아무도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새정치. 그래. 양당정치를 끝내자는 구호는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그걸 끝낸 자리에 무슨 가치가 중심이 된다는 걸까. 안철수는 지난 이십년간 서울 도심에서 열렸던 퀴어문화축제를 도심 외곽으로 보내자고 했다. 동성애 반대, 페미니즘 반대, 공산주의 반대, 이슬람 반대, 난민 반대, '조선족' 반대, 낙태 반대 등을 외치는 극우화된 세력들이 주구장창 하는 소리와 완전히 똑같은 얘기다. 이중에서 나는 두개만 반대하니까 혐오세력이 아니라고 할건가.

출처: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40116500022출처: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40116500022

안철수는 자신이야말로 여성안심도시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범죄예방으로만 가능해지던가. 본인이 대통령도 아니고 검찰총장도 경찰도 아닌데, 지방자치단체장이라면 범죄예방으로만 안전 문제,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폭력 문제에 접근하면 안된다. 평등해야 안전하다. 평등은 여성과 소수자의 인권과 노동권 보장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기본. 그런데 안철수의 정책에는 여성안전정책밖에 없다. 철학도 없고 방법론도 없다는 얘기. 


작년, 그러니까 2020년 3월에 발표했던 안철수의 여성정책은 대부분 더불어민주당 여성의원들이 만들었던 법안과 정책을 고스란히 베껴낸 것이다. 안철수는 베껴쓴다는 비판을 받자 다수 법안이 계류되어 있는 상황이라는 점을 들며 자신은 말뿐이 아니라 실행을 하는 정치를 하겠다고 했는데, 당시 냈던 법안과 정책 대다수는 작년과 올해에 통과되었다....(응?) 안철수 홈페이지에 올라온 안철수의 공약은 온통 '규제완화'(정부규제에 대응하는 규제혁신지원단을 운영한다거나, 용적율 상향 보유세 기준 완화 등 부동산 규제정책을 완화하겠다거나 등등)를 내놓고 있어서, 이명박과 매우 비슷했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테크 시티를 표방하고 블록체인이나 핀테크 같은 이야기를 경제성장 주요동력을 삼겠다는 배치 정도다. 


노동자들의 일할 권리 쉴 권리 차별없는 임금을 받을 권리 등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고, 여성안심정책이라고 나온 것 중에 특이점은 여성 귀가길 AI형 CCTV 가족열람 정책인데...이 경우에는 가정폭력 가해자가 일상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식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높고, 일단 성범죄는 대부분 아는 사람에 의해 일어나는 범죄라는 점이 가려지는 정책이기도 한데다가 AI형 CCTV를 어느 정도 수위로 어떻게 설치해서 관리하겠다는 건지 모르겠고 디지털 성범죄의 또다른 통로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해서, 이 정책에 대해선 특히 안철수 후보에게 매우 자세하게 물어보고 싶기도 했다. 


말뿐이 아니라 진짜 변화를 원한다


안철수는 기성 정당 어디에서도 결국 안착하지 못하고 흘러나왔다. 그가 가진 정치적 지향은 퀴어문화축제를 도시 외곽에서 하도록 해야한다거나 성범죄 대책으로 SOS 안심콜과 CC-TV연결 공약들이 잘 보여주듯이 팩트체크도 안되어있는 앙상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다. 그의 정치는 거대양당구조의 안티테제로만 존재의 의의를 가지는 듯 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안철수를 정치혐오의 다른 이름이라고 했다. 정당 정치를 우습게 만드는 인물이라고도 했다. 


내 생각은 다르다. 정치혐오가 아니라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정당 정치를 우습게 만든게 아니라 기존의 양당 구도 정치가 낡았다는 의식이 있었다. 문제는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과 낡은 것을 보내고 싶다는 마음을 안철수가 차지했다는데 있다.  그는 기존의 정치나 정당 정치의 형식과 내용을 우습게 만든게 아니라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우스운 것으로 만들었다. 낡은 것이 가지 않은 세계에서 낡은 것을 보내기 위해서 등장해야했던 새정치의 공간은 안철수라는 이름으로 점령당했다. 그런 점에서 안철수는 정치혐오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나쁘다. 희망없는 미래라는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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