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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김현영 Jul 11. 2021

연극 추락 2

미투 이후의 사회에 대해



추락 2를 보고 왔다. 원작은 J.M.쿳시의 소설 <추락>. 한내 연출 및 각색.


원작 얘기를 먼저 하자면, 쿳시는 이 작품 <추락(disgrace)>으로 두번째 부커상을 받았다. 한 작가에게 두번은 주지 않는다는 암묵적 관습을 깰 정도의 작품으로 평가되었다는 얘기. 쿳시의 문장은 건조하지만 감정표현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군더더기 없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 건 쿳시가 창조해낸 인물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하기보다는 차라리 침묵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이해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선택하는 침묵. 루리는 자신을 고발한 멜라니의 진술서를 보지도 않고 유죄를 인정한다. 이 행위는 이 절차 전반을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은 조롱이다.(미투 고발된 이후 그만둔 소설가이자 H교수부터 참 많은 이들이 떠오르...) 한편 루시의 침묵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경찰에게 말하면 그 이후에 자신이 꾸려온 삶에서 내쳐질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선택한 침묵이다. 둘 다 제도와 절차를 믿지 않고 침묵을 선택한 이유는 자신에게 일어난 문제는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공적으로 발화할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쪽은 가해자 입장에서 한쪽은 피해자 입장에서.


원작에서도 극에서도 내내 이런 대비가 드러난다. 연출은 이 연극을 루리와 루시의 대화로만 이루어진 이인극으로도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렇게 연출했다면 완전히 또 다른 극이 되었을 것 같다. 보다 분명하게 데칼코마니가 펼쳐지고 던진 말의 모순에 스스로 사로잡히는 방식이 교차되는 방식이었다면 어땠을까. 극중에서도 루시가 루리처럼 시니컬하게 말하는 순간들이 있었기도 했고. 그래서 루시와 멜라니를 비슷하게 보이도록 피해자로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그려내는 것보다는, 루시와 루리가 비슷해보이는 모습을 더 드러내는 식이었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루시를 좀 더 부치같은 레즈비언으로, 동부케이프의 땅을 일구고 자신의 신념을 고집스럽게 이어가고자 하는 인물로 표현했다면, 루시에게 닥친 일과 루시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가지는 태도 같은 것을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고. (왜 헬렌에게 가지 않는 것이냐. 루시가 만들고자 하는 공동체는 누구와 함께 하는 공동체인가. 왜 이것이 루시에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되었는가. 루시는 결국 루리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등등의 의문이 그래서 이어졌고)


대학 시절에 문학교양수업의 숙제로 읽었던 <추락>는 그때와 지금 꽤나 다르게 읽혔다. 루시의 선택에 대해서는 그때는 이해 자체가 가지 않았고, 지금은 동의가 되지 않았다. 이십년 전에는 그 선택의 배경 전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채 그저 이해가 안가서 답답했다면 지금은 그것은 어떤 내적 동기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전보다는 더 잘 알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의할 수 없었달까.  


<추락>도 그렇고 쿳시의 다른 작품 <야만인을 기다리며>도 그렇고, 쿳시는 작중의 성폭력 문제에 대해 흔히 남자 작가들이 가지는 정동(비극, 복수, 분노 등등)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한다. 쿳시는 무엇보다 성폭력 문제의 핵심은 권력과 위선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루디가 조사를 받는 과정도 그렇고 사건의 전개에서도 그런 점은 아주 잘 드러난다. 연출은 추락 2는 루리가 아니라 루시의 성장기라고 말했다. 루리의 성장기가 아니라는 점에는 완전히 동의. 사과하지 않는 가해자는 성장할 수 없다. 하지만 자기의 직접적 잘못이 아닌 역사까지도 끌어안은 피해자의 선택이 과연 성장일까. 루시가 일구어낸 그 땅에서 3대째 쯤이 지나고 나서 어떤 사회가 만들어진다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여전히 성장담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루시는 이렇게 말했지 않은가.  "그들은 나를 더 높은 차원의 삶으로 이끌지 않아요. 그 이유는 더 높은 차원의 삶이 없기 때문이에요. 이것이 유일한 삶이에요"라고.


미투 이후의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평화와 공존은 어떻게 가능한가. 약자의 연대라는 말은 얼마나 때로는 위선적인가. 가해자는 왜 피해자에게 사과하지 않는가. 역사적 잘못을 현재에 살아가는 사람이 대신 속죄하는 것은 왜 불/가능한가. 등등 끝나고 해볼 수 있는 얘기가 많은 연극이었다. 그리고 두시간이 언제 흘러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재밌었다. 루리 역의 배우 연기가 아주 마음에 들었고.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7월 1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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