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푸스 이전의 삶 / 루푸스 증상
가장 꿈꿔왔던 나이 25살, 루푸스(전신홍반성 루푸스, 자가면역 질환) 확진을 받았다. 어렸을 적부터 상상만으로도 심장의 두근거림이 귀에 맴돌 만큼 기대하고 고대하던 20대 중반이 되었지만 이런 나의 기대는 비웃음거리가 된듯했다. 25살부터 글을 쓰는 지금 29살까지, 천국과 지옥 사이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좇는 하루와 지옥 사이를 순환하고 있다.
루푸스 너 때문에.
20대 중반을 기대했던 이유는 대학교를 졸업 후,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 안정적인 생활 속에서 좋아하는 여가생활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기대를 현실화하기 위해 20살이 된 후로 나의 일상은 오롯이 미래를 위해 투자되었다.
정신없었던 전문대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같은 학교의 부서 조교로 취업을 했었다. 면접 때부터 "야근이 많은데 괜찮냐?"라는 질문을 받을 만큼 바쁘기로 유명한 부서였다. 퇴근 후에는 야간으로 4년제 학사학위 취득을 위해 다시 등교를 했고, 2년간 나의 일상은 출근-퇴근-등교-하교-집이었다. 빽빽한 하루 일정에 저녁은 언제나 김밥 아니면 토스트로 대신하곤 했었다. 업무상 비수기와 방학이 겹쳐도 예외는 없었다. 그런 시기가 오면 학원을 다녔고, 틈틈이 자격증도 취득했다.
힘들고 버거운 적도 많았지만, 뿌듯했다. 열심히 사는 모습이 대견스럽기도 했고, 스스로 자부심도 느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은 기회로 찾아왔는데, 신규 사업부서의 교직원으로 채용된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신규 사업이다 보니 내가 하는 모든 업무들이 부서의 매뉴얼이 되었다. 앞선 사례가 없으니 어느 일 하나 쉽게 해결되지 않아 협조문을 작성하는 게 주된 업무였다. 행정직원인 혼자 모든 걸 책임져야 했고, 그 상황이 눈물 나게 외로웠다. 지난 2년간의 생활이 여유롭게 느껴질 만큼 날 위한 시간은 없었다. 10분 거리에 사는 친구 얼굴을 두 달에 한 번 볼까 할 정도였다.
전년도 사업 종료 보고서와 차년도 사업 계획서 작성으로 바빴던 25살의 4월. 매년 손꼽아 기다리던 벚꽃은 언제 폈는지도 모르게 땅 위에 흩뿌려져 있었지만, 이제 곧 여유가 생길 것 같아 신이 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몇 개월간 공들인 보고서를 제출하고, 일상은 평온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모든 긴장이 풀린 채 갑자기 주어진 한가로움에 취해 있을 때쯤.
몸이 이상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하루 일과 중 제일 힘들었다. 기운이 없으면 계속 잠만 잔다던데, 그 당시 잘 기운도 없었다. 몸은 너무 고단한데 잠이 오지 않았다. 밤마다 계속되는 허리 통증도 불면을 한몫 거들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봤지만, 이내 온몸에 피가 다 빠져 흘러내리듯 다시 침대에 쓰러지곤 했다. 아침 식사는 숟가락을 들 힘조차 없어 음료로 대신하고 출근길을 나섰다. 심각한 무기력증이었다.
무기력증으로 1주 정도 지났을 무렵, 거품뇨가 나오기 시작했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우연히 변기 안을 들여다봤는데, 자잘한 거품들이 변기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처음에는 변기 청소를 위해 세제를 부어놓고, 실수로 물을 내리지 않은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내가 사용한 변기는 언제나 거품들로 넘쳐났다. 물을 2번씩이나 내려야 다 없어질 만큼.
얼굴의 양볼과 코에 걸쳐 발진이 생겼다. 원래 얼굴에 홍조끼가 있긴 했지만 이때는 유독 심했다. 술 마시고 출근했냐는 소리도 여러 번 들었다. 세수를 하고 나면 열감과 동시에 따가움이 심해져 기초 화장품도 바를 수 없을 정도였다. 어렸을 적부터 피부가 예민했던 터라 단순하게 건조한 날씨 탓이라고만 생각했다.
발바닥에 홍반이 올라왔다. 20살에 친구들과 워터파크를 다녀온 후 처음 나타났던 증상으로 보통 2~3일간 연고만 바르면 진정이 되었는데, 이때는 새로운 증상까지 더해졌었다. 바로 관절통이다. 양쪽 팔목과 발목, 어깨 , 무릎 할 거 없이 하루 종일 짓눌리는 느낌을 받았다. 자주 가던 피부과 의사 선생님이 '루푸스'로 의심된다는 말을 하셨다. 류마티스 내과 진료를 받아보라고 하셨지만 처음 듣는 병명이라 나에겐 와 닿지 않았었다. 아니,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손도 예외는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작은 손가락 마디마디가 닭발처럼 통통하게 부어있었다. 심한 날에는 손에도 홍반이 올라왔고, 그런 날은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도 버거웠다. 손과 발에 동시에 홍반이 올라올 때면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가장 심각했던 어지러움과 구토.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먹기만 하면 이유 없이 구토를 했고, 그로 인해 어지러움증도 심해졌다. 사무실에 아무도 없을 땐 긴 회의테이블에 누워있곤 했다. 아프면 서럽다는 걸 이때 제일 느꼈다. 일주일 만에 무려 5kg이 빠졌다. 고등학생 때의 몸무게로 되돌아갔다. 몸은 앙상해지고, 얼굴 윤곽 뼈가 다 보일만큼 볼살이 하나도 없었다. 그 당시 치아교정을 하고 있어서 얼굴은 더 야위어 보였고, 거울 보는 게 짜증이 날 정도였다. 그리고 날 보는 동료마다 심각하게 한 마디씩 하곤 했다.
"김 선생, 괜찮은 거야?"
정말이지 총체적 난국이었다. 몸 전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증상들에 무방비상태로 폭격을 맞는 중이었다. 어느 병원을 가봐야 하는지 감도 잡히질 않았고, 어디가 아프다고 표현을 할 수도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성인이 된 이후 나는 병원에 간 걸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 피로회복제는 물론이 와 영양제도 필요하지 않았기에 먹지 않았고, 유행성 전염병도 걸려본 적이 없었다. 건강에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위와 같은 증상들이 몸에 이상신호를 보내는 거라곤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