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별명 부자인 나지만 (남미 여행 다니다 생긴 수많은 별명 - 박민폐, 박마끼, 박짜오, 박배낭 등등등 맘에 안드는 별명 한보따리) 이번 별명도 역시나 별로 맘에 들지 않았다.
감히 나에게 흥선대원군이라니.
시작은 이어폰이었다.
2차 난임시술 때문에 운동을 좀 해야했고,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터, 헬스장이나 수영장을 갈 수가 없었기에 뒷산 둘레길을 자주 갔었다. 왕복하면 6천보가 가능한 계단이 별로 없는 편한 코스여서 좋았고.
멍하니 걷기만 할 순 없어서 갤럭시 폰 박스에 들어있던 까만 줄의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면서 다녔는데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남편이 요즘 누가 유선 이어폰을 쓰냐며 타박을 했다.
'이거 다들 쓰는데?' 라고 하기에는 이미 에어팟이 노이즈 캔슬링에 대한 엄청난 홍보를 때리면서 프로까지 나온 상황이었고(지금은 3세대...) 당연히 시장은 무선이어폰이 대세였다. 콩나물이라는 놀림을 극복하여 이제는 귀엽고 깜찍한 인이어 형태로 발전까지 하고 있는 상태인데 내가 거기다 대고 '난 줄있는게 편해!!!' 라고 외쳤으니 남편은 얼마나 복장이 터졌겠는가.
그래서 생겼다. 흥선대원군.
남들 다 쓰는데 혼자서쇄국 정책중이라나 뭐라나.......
나는 변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20대 때 나는 내가 B형 여자답게 변덕스럽고 대단히 진취적이고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루틴한걸 싫어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나는 변화에 큰 스트레스를 받고, 상황이 바뀌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며 새로운 것을 해야 할 때마다 엄청난 딜레마에 빠지는 B형이었던 것이었다.
겉으론 루틴한 것을 매우 싫어하는 것 같은데 반대로 그 지겨움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아이러니한 캐릭터가 바로 나였다니. 이직을 했을 때도 새 직장에 적응하느라 혼자서 발버둥을 치느라고 꼭 한달 정도 지나면 몸이 아팠다. 겉으로는 태연하게 '허니문 기간 그까이꺼 한 달 정도면 되는걸 뭘 적응을 못해서 난리야?' 라고 했지만 속으론 급격한 변화에 치명적 데미지를 입고 골골골 하는 것이었다.
나의 성격 때문에 옆에서 고구마를 무한리필로 먹는 건 남편이었다. 뭐 좀 새로운 것을 할라치면 늘 내가 한발짝 뒤로 물러서서 그거 꼭 해(사)야해? 라고 물어댔으니. 새 물건 중독자인 남편 입장에선 입 아파서 말하기도 귀찮았을 터.
일전에 폰이 예뻐서 아이폰이 너무 쓰고 싶은데 몇달째 안드로이드에서 벗어나기를 주저주저하는 나를 보다가 결국 남편은 대리점에 끌고가서 아이폰 6s를 손에 쥐어줬고, 그렇게 새 폰에 적응하느라 버벅버벅 24개월을 힘들게 보내고 다시 갤럭시로 돌아올 때 쯤 새로운 폰의 기능을 발견하고 '여보, 아이폰에 이런 기능이 있었더라?' 라고 하는 나를 남편이 흥선대원군이라고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심한 표정으로 '너 할부 다 끝났는데 그걸 이제 안거야?'라고 물었으니.
이런 나인지라 무선 이어폰 좀 쓰라 했을 때 내가 선뜻 '그래! 나 그거 전부터 써보고 싶었어' 라고 할 리가 없었다. 남편은 속답답하게 하지말고 제발 버즈 좀 사라고 빌었다.
그렇게 엄지손가락 한마디 만한 버즈가 배송이 되었고 지금은 개구리 올챙이 적 기억 못한다고 줄 이어폰 쓰는 사람에게 '촌스럽게 왠 유선 이어폰이야?? 요즘 누가 줄있는거 써~~' 이딴 소리를 뻔뻔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버즈 2가 나온지 한참이지만 나는 버즈 초기모델을 가지고도 '무려' 무선 이어폰을 쓰는 사람이니 터무니없이 당당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신제품을 따라가는 건 여전히 나에게는 가랑이 찢어지게 힘든 일이다.)
이 와중에 또! 얼마전에 갤럭시 워치4를 샀다. 남편이 워치사라고 노래한지 한 3년만인가... 비싼 전자시계를 나도 드디어 샀다며 입이 귀에 걸리는 날 보고 남편은 또 한숨을 쉬었다. 애플 월드를 구축한 남편에게 내가 얼마나 답답한 인간으로 보이겠는가.
버스 탈 때 손목으로 태그하니까 사람들이 다 나만 쳐다봤다고 신나하는 날 보면서 남편은 한마디 했다. "아무도 너 안봤을껄? 너 혼자 뿌듯하고 신기한거야"
날씨가 급격하게 추워져서 사무실을 뒤져 난로를 꺼냈는데 골드스타였다.
골드스타가 뭐였더라...
언제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마 LG로 브랜드명이 변경된게 95년이고 2천년대 초반까지는 이 로고가 있었다 하니 최소 15년은 넘은게 분명했다. 저 마크를 달고 작동되는게 더 신기한 난로였다. 설마 불 나는거 아니겠지? 싶은 불안함은 추위 때문에 저 멀리로 던져버리고 따뜻하게 잘 돌아가는 스토브 사진을 찍어서 남편에게 전송했다. "이거 봐라~~ 골드스타다?"
사진을 받은 남편 왈 "거긴 박물관인가?? 암튼 여보는 마음이 참 포근하겠어. 본인이랑 참 잘 맞는 근무환경이라 ㅋㅋㅋ"
사실 남편이 저러는데는 전자제품 신형을 무서워하는 나의 영향도 있지만 지난번에 발견한 이 오래된 책 뒤에 있는 도서카드 때문도 있었다. 2021년에 이런 책이 서가에서 굴러나온 것이 신기해서 사진을 보내줬는데 남편은 수기 도서대출카드는 말로만 들었지 처음 봤다고 했다. 그러니 여기더러 박물관이냐, 흥선대원군에게 딱 맞는 공간이다 라는 놀림이 절로 나오는 듯.
내가 '영화 러브레터에도 이거 나와~~' 그랬더니 남학교면서 러브레터 같은 소리 한다고 타박만 들었다.
얼리아답터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제품들을 다 써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처럼 '큰 문제 없으면 그냥 쓰던거 쭉 쓸래' 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긴, 전에 리콜사태가 터진 딤채 김치냉장고는 평균 사용년수가 15년 이상이었으니 후자의 인간형이 더 많은 것 같기도 하다.
누가 맞고 틀리고의 문제는 아니지만 너무 빠르게 변화해서 멀미가 날 정도의 변화 속도인 요즘, 다시 레트로 감성으로 돌아가려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을 보니 다들 속도에 어느 정도는 지쳐 있었던 것 같다. 과거 느낌의 관광지가 관광객으로 바글바글하고, 예전에 유행했던 스타일들이 다시 유행하는 것을 보면 반가울 때도 많으니까.
새로운 제품은 정말 편리하다. 하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나같은 흥선대원군이 아니더라도 그 새 것의 새로운 느낌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더 새로운게 나와버리니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서 새 것의 편리함보다 오히려 피곤함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골드스타는 너무했다. 난로장사 다 굶어죽을 듯. 한편으론 역시 가전은 LG 라며 엄지척 하고 싶었다. 저게 여전히 저리도 잘 돌아가다니...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