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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쥬스 Sep 21. 2020

당신은 지금 일종의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중입니다.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떤 이상 신호가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저는 신혼 가구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습니다. 가구를 보러가던 날 저와 예비신랑이 같이 있는 것을 아시면서 시부모님이 전화하셔서는 가구를 어떤걸 샀냐 무엇을 골랐냐 굉장히 자세히 물으셨습니다. 남편이 분명 저를 집에 데려다 주는 중이라고 얘기를 했는데도 통화를 끊을 생각을 안하시더니 남편이 신경질을 내자 그제서야 통화를 종료하셨습니다. 제가 살던집에 신혼집을 차린 터라 침대와 소파만 새로 산 것이었는데 몇 개 사지도 않은 신혼집 가구를 왜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시부모님께 보고 해야하는지, 이 남자는 뭘 이리 자세히 말을 하고 있는지 황당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이후 결혼준비 과정에서 시부모님이 우리 결혼을 당신들 뜻대로 하고싶어 한다는 인상을 받았고 저는 우리 결혼식이니 우리가 알아서 하고 싶다는 생각이었으니 늘 시끄러웠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조리 아들에게 간섭하고 싶은 시부모님, 필터없이 모두 보고하는 예비신랑, 독립적인 예비신부. 이 조합은 말그대로 환장의 콜라보였던 것입니다.


처음엔 아들에 대한 사랑이 좀 넘치시나 보다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상하다고 느꼈습니다. 신혼여행 사진을 한장도 빼지말고 다 가져오라 하시더니(대체 왜죠?내 수영복사진도 있는데...) 매주 주말마다 시댁을 방문하라고 강요하시고 연락을 자주 안한다고 혼을 내셨으며 주말이고 밤 늦게고 시부모님과 시동생의 전화가 울려대는... 이런 상황들이 불편하다고 남편에게 말하면 남편은 가운데 껴서 곤란해하기만 했습니다. 결국 이럴거면 당신 부모님이 다시 결혼하시면 되는거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왔습니다.


며느리병이 제대로 걸린 저는 대체 시댁 식구들이 왜 이렇게 나를 못미더워 하시는지에 대해 불안해 했고 시댁에 잘보이기 위해 매 주말 시부모님 호출에 시댁에 방문해서 식사를 하고 소중한 주말 이틀 중 하루를 할애했으며 시부모님의 멘트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울며불며 남편과 싸웠고 결국 남편에게 이혼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너랑 행복하게 살려고 결혼한거지 이렇게 내 생활이 하나도 없이 살려고 결혼한 것이 아니야. 난 더이상 당신 부모님의 지시를 받고 싶지않아.


사태가 이지경이 되자 남편은 부모님의 주말 호출을 거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걔가 그러라고 하든?' 이라는 멘트가 나왔습니다. 내가 화낸것 지만 남편도 주말에 쉬고 싶었고, 신혼이니 우리끼리 놀고 싶어서 거절한건데 오롯이 그 거절은 제 탓이었습니다. 착한 아들이 이상한 저를 만나서 삐딱선을 탔다는 거죠.


이후 모든 프레임이 제 사상 개조에 맞춰지는 것 같았습니다.


시이모님은 이 정도 사는 시댁 만나기 어렵다, 며느리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시부모님 흔치 않다, 너는 시댁 정말 잘 만난거다 등의 이야기를 하셨고 시간이 지나니 남편도 우리 부모님은 니가 좋아서 그러는건데 왜 그걸 이해를 못하고 덮어놓고 싫어하기만 하냐더군요.


그 정도 사는  많고 매번 불편하게 하시던데... 결혼전에 뜬금없이 (주담대를..?) 갚아달라고 찾아온 여자 취급을 하신 분들이라 우린 첫단추부터 잘못 꿰지않았던가...?



그런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결혼이라는 관계를 통해 새롭게 저를 둘러싼 시댁이라는 환경이 내뿜는 멘트를 지속적으로 들으니 혼란이 옵니다.


저는 학창시절은 조용히 학교를 다니던 사람이었고 친구들과 잘 지내던 사람이었으며 사회 생활도 별 탈 없이 한지 10년이 어가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시댁과 엮이면 제가 이상한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제가 무슨 시짜 들어간 글자에 두드러기도 나는 사람 마냥 시댁 관련된 일이라면 쌍심지를 켜고 싫어하고 덮어놓고 난리부터 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쌓이자 저는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성격이 이상하고 드세서 이 집에 분란을 일으키고 있구나. 다들 나에게 잘해주려고만 하는데 내가 애초에 꼬인 인간이라서 그걸 곱게 받아들이지를 못하는구나. 나만 잘 하면 될텐데 내가 이상한 인간이라 이 집에 와서 괜히 문제를 만들기만 하는구나. 다른 집 여자들은 시댁에 잘만 하면서 잘 사는데 나만 유난이라 이렇게 문제구나.

 

그런데 이렇게 나를 처참하게 후려치고 나면 나는 이상한 사람이 아닌데 왜 꼭 저 속에서만 이런 사람이 되는걸까. 너무나 혼란스럽고 슬펐습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다 좋은데 꼭 시댁과의 관계에서만 나는 천하의 또라이고 성격이 개차반이며 못돼먹은 여자인걸까. 내가 진짜로 덜  인간이라 그런걸까?

 

그땐 몰랐습니다.

이게 일종의 가스라이팅인지.


가스라이팅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시행자가 원하는 대로 상대의 삶을 조종하기 위해서. 보통 연인이나 가족같은 굉장히 가까운 관계에서 많이 발생하는 심리적인 학대입니다. 그리고 가스라이팅은 내가 상대에게 가스라이팅을 해야지 라고 생각해서 시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빗나간 소유욕'에서 많이 발생하죠. 의도치 않게 무의식적으로 굉장히 많이 시행이 된다는 겁니다.

  

가스라이팅의 단계는 관계형성 -> 기억왜곡 -> 미니마이징(위축) -> 무시 입니다.

시댁과의 관계를 놓고 보면 결혼으로 인해 가족이라는 관계가 형성 -> 우리는 너를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사랑한다 하지만 -> 이제 너는 결혼을 했으니 우리 방식에 맞추라고 강요 -> 을 따르지 않을 시 며느리를 예민한 사람으로 몰아가면서 판단력을 흐리게 한 뒤 통제 속에 두게 됩니다.


가스라이팅을 당한 사람은 처음에는 이상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상대와 논쟁을 합니다. -> 상대가 나를 미워할까봐 두려워 집니다. 난 아직 이성이 있는 상태이지만 상대방의 지속적인 강요에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 쏟아지는 비난들이 결국은 맞다고 생각하면서 본인을 자책하기 시작하며 니가 틀렸다고 말하는 점들을 고치려고 노력하며 점점 자신을 파괴하게 됩니다.


뭘 집요하게 설계해서 사람을 세상에서 고립시키는 것만이 가스라이팅이 아닙니다.


시댁에서 며느리에게 강요하는 며느리 도리와 이제는 적용하기 어려운 전통이라는 것들. 철저하게 을의 입장인 며느리에게 행하는 갑질. 본인들이 원하는 대로 따르지 않으면 서운하니, 남의집 며느리는 잘한다던데 는 왜 그러니를 지속적으로 주입시키며 며느리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상황들.


이건 괴롭히는 것이지 좋아해서 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런데 며느리를 사랑해서 예뻐서 그런것이라고 네가 유난이라고 하니 환장할 노릇입니다.


이런 시간이 쌓이다 보니 저는 사회생활까지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는 것만 같고, 내가 어떤 행동을 하면 상대방이 나를 싫어할까봐 겁부터 났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나보고 드세다고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은 망상에 사로잡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점차 무서워져서 사람들이 다가오면 뒷걸음질쳤고 친구들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가스라이팅을 당하게 되면 '내가 조금 더 잘하면, 내가 조금 더 참으면, 내가 이해하면' 이 관계가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가스라이팅을 해결하는 법은 절대로 '대화'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대화를 시도하면 할수록 상대방은 더욱 더 당신을 조종하려 들 것이니까요.


이미 가스라이팅이 진행되었다는 것은 상대방이 당신에게 월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인데 해결을 위한 대화가 통할 리 없습니다. 이 경우 어서 관계를 종료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결혼으로 묶인 관계를 어떻게 종료할 수가 있나요. 이혼하라는 얘기도 아니고. 이 땐 관계를 멀리 해야 합니다.


많은 며느리들이 시댁과의 관계에서 내가 이 상황에서 기분나쁜 것이 맞는지 본인의 감정을 판단하지 못해서 익명의 공간에 물어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이 바보라 자기 감정도 제대로 몰라서 '제가 이상한건가요?'라고 묻는게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미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시댁과의 관계에서  '넌 이상해, 우리에게 맞춰. 우리는 여태 이렇게 살아왔는데 아무 문제 없었어' 라는 강요를 받았고 그것이 기분이 나쁜데 그걸 기분 나빠하면 '이상한 사람이다'라고 통제당하는 중이니까요. 아직 완전히 가스라이팅 되진 않아서 뭔가 이상하니깐 내가 진짜 이상한지 상대가 이상한지 타인에게 물어보는 겁니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그래도 잘못된 상황을 인지하고는 있으니 다행이지만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저 역시 저를 갉아먹으면서 오랜 시간을 지나왔으니까요.


그리고 시댁이 늘 말하는 '너 오기 전엔 우리끼리 괜찮았는데.' 살아오는 동안 가족끼리는 문제가 별로 없었을 수 있죠.(진짜 없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데 전혀 다른 세상에서 온 며느리를 강제로 본인들의 영역에 끼워 맞추면 당연히 문제가 생깁니다. 몇십년간 다르게 살아 온 사람을 강제로 본인들이 원하는 틀에 꾸겨넣는다고 그게 잘 넣어질까요?


내가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고 느끼면 가장 먼저 자존감을 회복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저 역시 시댁과의 관계에서 자존감에 상처를 많이 받았거든요. 이건 아직도 회복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심각한 상태라면 전문가나 조력자를 찾아서 빠져나올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혼자서 빠져나올 수 없을 땐 도움을 받아야 해요. 또한 가스라이팅을 시도하는 상대가 권력자라면(시댁은 며느리보다 훨씬 위쪽에 위치해 있죠) 일단 거리를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상황이 다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맞고 틀린지에 대한 판단을 포기하면 안됩니다. 지속적으로 나에게 질문하세요. 내가 기분이 나쁜 것은 다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에 기분이 나쁜겁니다. 여자의 촉은 생각보다 날카롭습니다. 내가 기분이 나쁜 것은 내가 이상한 사람이거나 잘못해서가 아니에요.


나는 소중한 사람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가스라이팅을 시도하거나 상처 내도록 그냥 손 놓고 두고보지 마세요. 난 이겨낼 힘이 있는 똑똑하고 중요한 사람이니까요.




사진출처 https://blog.naver.com/p9573198/221787617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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