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칠번출구 Feb 04. 2020

냉장고

에세이 & 수필 & 산문

-


냉장고의 문을 열면 차가운 한기가 엄습한다. 차가움에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그 안은 마치 백색의 눈발이 휘날리는 장엄한 설원을 연상케도 한다. 그러나 그 공간은 한때는 화려했을 그들의 죽음을 위한 공간이다. 냉장고는 삶이 아니라 죽음의 신선도를 유지하려 애쓴다. 영혼이 소거된 시체들의 무덤.  
 
바다에서 잡아 올린 생선들은 처음의 아등바등 퍼덕거림을 잃었고, 야채는 토양이 비옥한 대지 위에서 헐벗은 몸을 내보이며 숭숭 뽑혔다. 가축들은 도살장 후미진 곳으로 끌려가 살의에 가득 찬 인간의 손끝에서 비명을 지르며 죽음을 맞이한다. 이들은 끝끝내 죽어도 죽지 못하는 냉장고의 무덤에 안치된다.
 
육체에서 탈피한 영혼들은 어디로 갔을까. 영혼들의 무덤은 어디에 있을까. 냉장고에서 들리는 소음. 그것은 냉장고에 갇혀 차가운 주검이 돼버린, 자신의 육체 곁에서 떠도는 영혼들의 울부짖음이다.  
 
몸은 정신보다 순수하다고 했던가...
정신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혼돈으로 가득하다면, 육체는 순수함으로 가득 찬 대자연에 닿아있다. 


그러나 살아있는 정신의 육체들은 배고프고 허기진다. 냉장고의 문을 열어 음식 재료를 꺼낸다. 오늘 밤, 대자연에 닿아있는 순수함은 정신의 배고픈 욕구 앞에 무의미하고 무기력해질 것이다. 냉장고의 소음이 더 거세졌다. 영혼들의 울부짖음이 더욱더 우렁차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만 혼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