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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깡아지 Feb 20. 2016

그리운 나의 첫 사람

공지영,『봉순이 언니』



한 여자의 추락한 삶


『봉순이 언니』는 공지영 작가가 자신의 유년과 자신을 키워준 식모 봉순이 언니의 이야기를 담은 자전소설이다. 봉순이 언니는 의붓아버지에게 매 맞고, 외숙모에게 버림받고, 교회 집사의 매를 못 견디고 도망쳐 ‘나’의 집에서 식모가 된다. 그리고 그녀는 병식이라는 세탁소 사내와 눈이 맞아 도망친다. 그러나 얼마 후 임신한 채 버림받아 돌아오고, ‘나’의 어머니의 도움으로 낙태 수술을 한다. 어머니는 황급히 그녀를 애 딸린 홀아비에게 시집보내지만, 남편이 병에 걸린 것을 속이고 결혼한 터라 얼마 못 가 과부가 된다. 그런 봉순이 언니의 삶은 ‘비참하다’라는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 실제로 작가는 그녀의 삶을 ‘추락’한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나는 이제 더 이상 젊지 않은, 예쁘지도 않고 돈도 없고, 가진 것이라고는 배고픈 아이들과 아직도 튼튼한 몸뚱이뿐인, 저물어가는 나이의 여자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녀의 삶이 어떻게 미끄럼을 타고 하염없이 추락하는가를. 그래, 나는 추락이라고 썼다.     
                                                                         - 공지영, 『봉순이 언니』, 1998, 푸른숲, 175쪽.


(이미지 출처 : Pixabay)



『봉순이 언니』의 페미니즘 비평


‘페미니즘’이란 성 차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 의해 여성이 억압받는 현실에 저항하는 여성해방 이데올로기이다. ‘페미니즘 비평’은 여성이 차별받고 열등하게 취급당했으며, 문학에서 여성 작가와 독자는 항상 불리한 입장이었다는 현실에 대한 자각에서부터 출발하여 여성문제를 포착해내고 올바른 전망을 제시하고자 한다.


공지영 작가는『봉순이 언니』에서 여성, 그것도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있던 여성을 문학작품의 주인공으로 끌어올리는 행위를 통해 그간 소외되어 왔던 여성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 모두가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봉순이 언니는 작가를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고, 독자들은 이로 하여금 그녀의 존재를 알고 그녀처럼 소외된 여성들이 존재함을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들을 어떻게 보듬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봉순이 언니』와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는『자기만의 방』에서 여성들도 돈과 자기만의 방, 즉 경제적 능력과 독립된 공간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비단 여성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향유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그러나 여성들은 일하지 않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돈을 모을 수가 없다. 그들의 노동은 노동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사노동 역시 가정을 돌보고 가족을 사회화함으로써 자본주의 노동력을 재창조하는 것으로, 생산적 노동이며 자본 축적의 원천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큰 재산을 모으는 한편 열세 명의 아이를 낳는 것, 그것은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여덟 명의 아이를 길러낸 유모는 10만 파운드를 버는 변호사보다 세상에 더 가치 없는 인물일까요?” 라며 여성의 노동력이 착취당하는 현실을 비판한다.


그 모든 여성들이 일 년 내내 일하면서도 2,000파운드를 모으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고 3만 파운드를 마련하기 위해 온갖 일들을 다 해야만 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우리는 비난받아 마땅할 여성의 가난에 경멸을 터뜨렸습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우리에게 물려줄 재산이 없었을까요? 콧잔등에 분을 바르고 있었을까요? 상점 유리를 들여다보고 있었을까요? 몬테카를로에서 일광욕을 하며 으스대고 있었을까요?
                                                             - 버지니아 울프, 이미애 역,『자기만의 방』, 민음사, 35쪽.



봉순이 언니』에서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한 여자가 ‘추락’해가는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버지니아 울프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봉순이 언니는 ‘나’의 집에서도, 병식을 따라가서도, 홀아비와 결혼을 해서도 끊임없이 가사노동을 한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노동에 대한 임금을 받지 못한다. ‘나’의 집에서는 식구처럼 지냈으니까 그렇다 쳐도, 두 남자는 그녀를 이용했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여성의 가사노동을 당연한 의무로 만든다. 봉순이 언니는 이러한 성 역할 관념의 전형적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다음 인용은 ‘나’가 홀아비에게 시집 간 봉순이 언니의 집에 놀러 가서 하루 종일 일만 하는 그녀를 보고 있는 장면이다.     


언니는 나를 부뚜막 한족에 세워놓고 이내 고만이었다. 할 일이 아주 많은 것 같았다. 소쿠리에 들은 것을 내가고 뒤 우물가로 가서 물을 길어오고 하지만 할 일이 아주 많은 것은 봉순이 언니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여자들은 두 손과 두 발을 잠시도 쉬지 않으면서, 하지만 또 조금도 쉬지 않고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 공지영, 『봉순이 언니』, 1998, 푸른숲, 170쪽.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주변성과 타자성의 여성


또한 봉순이 언니를 이용한 남성들에게서는 여성을 ‘주변성’과 ‘타자성’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드러난다. ‘주변성’이란 여성이 남성이 있는 중심에서 배제된 존재로 여겨지는 것을, ‘타자성’이란 여성이 열등한 남자 혹은 남성의 반사된 타자로 여겨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모든 여성 착취와 차별의 근본적 원인이다. 다음 인용은 ‘나’가 늦은 밤 봉순이 언니와 병식의 밀회에 따라간 장면으로, 봉순이 언니를 인격적으로 무시하는 병식의 태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입에 담배를 물고 봉순이 언니에게 턱짓을 해보였다. 그러자 봉순이 언니는 치마 호주머니에서 얼른 낙타표 성냥을 꺼내서 그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잘 붙여야지, 머리카락이 탈 뻔했잖아.”
병식이라는 총각은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불을 붙여주는 봉순이 언니의 머리를 쥐어박았고, 언니는 쥐어박히고도 뭐가 좋은지 머리를 감싸쥐고 빨간 잇몸을 드러내며 히히 웃었다.
“웃기는, 망할 기집애가.”     
                                                                           - 공지영, 『봉순이 언니』, 1998, 푸른숲, 77쪽.



한편, 유학에서 돌아온 직후 취직이 맘처럼 쉽사리 되지 않는 ‘나’의 아버지의 어깨에는 가장으로서의 부담감과 책임감이 올려놓아진다.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 역시도 고통 받게 했다. 같은 부모로서 자식들에 대한 부양 부담을 아내와 나누어 지면 좋으련만, 특히 그 시대에는 이것을 남성 혼자 짊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은 내가 무심히 떨어뜨려놓고 갔던 자식이 벌써 이렇게 똘망똘망해졌구나 하는 대견함, 또 한편 이렇게 콩나물처럼 쑥쑥 크는 아이들을 내가 정말 다 책임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어려 있었다.    
                                                                           - 공지영, 『봉순이 언니』, 1998, 푸른숲, 37쪽.


(이미지 출처 : Pixabay)



습득된 여성성과 사회적 성으로서의 여성


봉순이 언니에게 홀아비와 선을 보라고 설득하는 ‘나’의 어머니의 말에서는 ‘습득된 여성성’과 ‘사회적 성(gender)으로서의 여성’이 드러난다. 어머니는 “봉순아, 여자는 그저 시집가서 남편 사랑받구 애들 낳구 그러구 사는 게 제일인 거야.”라고 말한다. 어머니 역시 가부장적 사회에서 자라왔고 여전히 그것을 통과하고 있는 세대였다. 이러한 가부장적 억압은 여성들에게 습득된 여성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한다. 또한 그 기준에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여성들을 비정상으로 분류하곤 한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이 미국 유학 시절 보았던, 남성과 대등한 여성이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 짱이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아비로만 생각한다면 네가 이 다음에 그저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가면 그뿐이다 하는 마음도 있지만, 세상은 변할 거다. 남자들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훌륭한 여자들이 많이 나올 거야. 넌 꼭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서양여자들처럼 남자들하고 대등하게 토론도 하고 대학 강단에도 서고 누구도 여자라고 깔보지 못하는, 남자들은 생각도 못하는 일을 터억 하는 그런 여자 말이다. 이 아빠가 말이야, 아직은 힘이 없지만, 꼭 짱이를 그렇게 키울 거야. 알겠니, 우리 짱이?”     
                                                                           - 공지영, 『봉순이 언니』, 1998, 푸른숲, 41쪽.
(이미지 출처 : Unsplash)



희생성과 모성의 여성


봉순이 언니가 병식을 따라갔던 혹은 홀아비가 병이 깊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던 이유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더불어 어떠한 순종과 모성애적인 끌림 같은 것이었다. 한 번 마음을 준 남자에게 모든 것을 갖다 바치는 순종적인 여성, 자기 처지도 기구하면서 타인을 품고자 하는 희생과 모성애적 여성의 모습이 봉순이 언니에게는 있었다. 다음 인용들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성품이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는,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이었다.     


“참 이상두 하지? 그 남자한테 돈가스를 썰어서 밀어주는 순간, 그 남자가 목이 콱 메여하는 게 느껴지는 거야. 그 순간, 이 사람 그 동안 부인 죽고 얼마나 혼자 외롭고 쓸쓸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우리가 아주 오래 전부터 서로 알고 있던 사람 같은 생각이 드는 거야……. 뭐랄까, 운명적으로 만난다, 뭐 이런 거. 이 사람 외롭고 쓸쓸한 거 내가 위로해줘야지 하는 느낌 같은 거. 그리구 밥을 먹는데 이 사람이 돈가스에 케첩을 발라서 슬그머니 내 접시에 하나를 더 놓아주지 않겠니? 그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래, 이렇게 살면 좋겠다. 맛있는 게 있으면 내가 그의 밥그릇에 하나를 놓아주고, 또 맛있는 게 있으면 그 사람이 내 밥그릇에 하나를 놓아주고, 그렇게 말이야. 평생 누가 내 밥그릇에 먹으라고 그렇게 슬며시 맛있는 걸 놓아준 적이 있었을까. 아마 그 사람뿐일 거야.”
                                                                 - 공지영, 『봉순이 언니』, 1998, 푸른숲, 151-152쪽. 

“곧 바쁜 철인데 그러면 서울 오기두 힘들구, 일손도 부족하니께 지가 가서 좀 도우믄 좋겠구. 거기 있는 애기두 말이 아닌 것 같구.”
“니가 뭐 소냐? 일하려구 시집가게?”  
                                                                        - 공지영, 『봉순이 언니』, 1998, 푸른숲, 156쪽. 

원래 그런 아이였잖니. 거 뭐야, 세탁소 그 말대가리 같은 녀석하고 도망칠 때부터……. 게다가 걜 이용해먹은 그놈들은 다 기반잡고 잘 되었다니까 말이야. 결국 새경 없는 머슴을 산 거지……. 그렇게 제 실속도 못 차리고, 그러고도 좋단다, 좋대…….
두 사람은 옛이야기 하듯 가끔 웃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녀가 한 번 남자와 도망갈 때마다, 그녀가 얼마나 목숨을 걸고 낙관적이어야 했을지를. 그녀는 친구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 사람은 달라. 뭔가 운명을 느꼈다니까. 가엾어서, 그러고 있는 게 가엾어서 내가 도와주고 싶었어. 밥도 따끈하게 퍼주고 셔츠 깃도 깨끗하게 빨아주고 저녁에 돌아오면 대야에 물 데워서 따끈한 물에 발도 닦아주고 싶어. 게다가 엄마 손 한 번 못 느껴본 그 가엾은 아이들이라니…….
나는 안다. 그랬을 것이다. 낮잠에서 깨어나 누구나 고아처럼 느껴지는 그 푸르스름한 순간에 그녀는 우는 아이를 안아주었으리라.    
                                                                        - 공지영, 『봉순이 언니』, 1998, 푸른숲, 191쪽. 


또한 봉순이 언니는 어려서부터 키워 온 ‘나’에 대해서도 모성애를 느낀다. 바쁜 부모님과 무관심한 언니오빠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막내로 자란 ‘나’에게 봉순이 언니는 각별한 사람이다. 그녀가 보통 식모 이상으로, 엄마보다도 더 모성애적 사랑을 주었기 때문이다.      


나를 놀리기만 하는 언니와 오빠를 대신해서 이제 아버지가 나의 편이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무너져버렸고, 내게 남은 것은 봉순이 언니뿐이었다. 그녀만이 우는 나를 달래주었고, 그녀만이 내 잠자리의 베개를 고쳐놓아 주었다. 그녀는 나와 마주친 최초의 세계였다.
                                                                           - 공지영, 『봉순이 언니』, 1998, 푸른숲, 32쪽.

봉순이 언니는 내가 울기 시작하자 미자 언니네 방안으로 얼른 달려왔고, 잠이 깨서 우는 나를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꼬옥 안아주었다. 그러면 푸르스름한 세상이 조금씩 노란빛을 띠기 시작했고 얼마간은 서러움이 가셨다. 아직도 봉순이 언니는 내가 서러울 때, 내가 따돌림당할 때, 내가 혼자 외로울 때 나를 안아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엄마였고 언니였고 그러면서 친구인 그녀는, 내 첫사람이었다.     
                                                                           - 공지영, 『봉순이 언니』, 1998, 푸른숲, 62쪽.


(이미지 출처 : Pixabay)



혼자서 가는 사람들이 많으면, 사실은 함께 가는 것이다


작가는 결국 이 작품에서 여성들 사이의 연대의식을 제안한다. 그녀는 자신의 대표적 페미니즘 소설『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서도 “혼자서 가는 사람들이 많으면, 사실은 함께 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사회적 신분이 높은 여성이든 다소 낮은 여성이든, 여성의 고통은 여성이 공감해주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 작가의 입장이다. 소설에서 ‘나’는 봉순이 언니와 미자 언니가 우는 것을 보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다섯 살 어린아이일뿐더러, 그들과는 처지가 다른 상류층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곁에서 운다. 상대를 이해하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아닌,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어도 함께 흘리는 눈물이 우리 여성들끼리는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작가는 넌지시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눈물을 낄끔거리는 봉순이 언니에게 면박을 주며 그러나 미자 언니도 따라 울었다. 두 처녀는 겨울이 가고 새 봄이 오는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내가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게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 (중략) …
이상한 일은 두 처녀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주간지를 보고 있던 나도 공연히 따라 울었다는 것이다.
“얼라, 짱아, 넌 또 왜 우니?”
미자 언니가 울다가 물었다. 나는 대답을 하지 못한 채로 더욱 흐느껴 울었고 그러면 두 처녀는 쟤가 왜 저런다니, 응? 하며 웃다가 둘이 눈이 마주치면 또 흑흑 느껴 울었다.
다른 이야기지만 지난 가을인가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독후감 모집에 당선된 독자들 이십 명과 사이판엘 간 일이 있었다. 간담회 시간에 한 여자가 일어나 내 소설의 여주인공 이야기를 하면서, 사실은 그 여자주인공의 어린 시절이 어쩌면 그렇게 자신과 비슷한지, … (중략) … 이라고 말하며 목이 콱 막혀 했다.
내 왼편에 앉아 사회를 보던 여성학자가 … (중략) … 말하다가 갑자기 마이크를 내려놓더니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자의 말처럼 진정을 하고 다시 의견을 발표하려던 그 여자가 입술만 달싹이다가 끝내 참지 못하겠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했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표정으로 내가 오른편에 앉아 있던 진보적 잡지의 편집장을 바라보자, 그녀는 벌써 손수건까지 꺼내 흘러내린 눈물을 닦고 있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정면을 발보니, 앞자리에 앉은 여성독자들 스무남은 명이 모두 눈물을 글썽이고 더러는 손수건을 꺼내들고 있었다. 아니 참 이상도 하네, 별로 슬픈 일도 아니고 흔한 이야기인데 왜들 이래요, 대단하게 울 일이 뭐 있어요, 어서 진행하시죠, 하고 말하려던 내 눈에서도 눈물이 금세 흘러내렸다. 우리들은 한 삼 분여 동안 그렇게 각자 울었다. 이유는 없었다. 물론 이유는 많았겠지만.
그건 남자들은 잘 이해할 수 없는, 하지만 우리들 여자들에게는 흔한 풍경이리라. 아마 함께 운다는 것은, 여자들이 함께 운다는 것은 그렇듯, 합리로는 설명해내기 힘든 그런 신비스러운 일이며, 그날 봉순이 언니와 미자 언니와 나의 울음도 그런 풍경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 공지영, 『봉순이 언니』, 1998, 푸른숲, 136-138쪽.


(이미지 출처 : Pixabay)



페미니즘에서 휴머니즘으로


아울러 작가는 글을 맺으며 마지막 페이지에서 쐐기을 박듯, 봉순이 언니를 닮은 여자의 눈빛에서 ‘희망’을 보았다고 말한다. 봉순이 언니만큼 기구한 삶은 아니었으나, 살다 보니 이혼이라는 것을 하게 된 ‘나’는 ‘내 생이 암전되어버렸던 어떤 순간 그녀를 떠올’린다. 그러한 상황에서 한 여자를 보고 봉순이 언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그녀는 얼어 죽기 직전 주인이 나를 방에 들여 주지 않을까, 라는 희망을 품으며 ‘나’를 바라보던 메리의 눈빛처럼, 당신도 여자니까 내 고통을 알잖아, 라는 고요한 외침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작가는 작가 후기에서 그 ‘희망을 가진다’는 것에 대해, “비록 너무나 짧은 엎드림으로부터 나온 상투적인 결론이라 해도, 붓을 멈추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그리하여 봉순이 언니가 자신의 외로운 유년을 품어 준 것처럼 자신도 그들에게 손을 내밀겠다는, 더 이상 외면하지 않겠노라는, 페미니즘에서 휴머니즘으로의 도약을 실천하고자 한다. 


“며칠 전 전철에서 한 여자를 보았어. 내 맞은편에 앉아 더러운 보따리를 끼고 졸고 있는 여자였는데……. 가끔 잠에서 깨어나 여기가 어딘가 둘러보는 거야. 내 생각엔 아마 그 여자가 좀 정신이 나간 것 같았거든……. … (중략) …
그 동안 전철은 내가 내릴 곳에 도착했어. 그러니까 사실 기회도 없긴 했던 거야. 게다가 내 인생이 요즘 얼마나 피곤해 있는 줄 엄마도 안다면……. 그런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다가 문득 돌아봤을 때 놀랍게도 그녀가 날 바라보고 있었어. 설마 하는 눈빛으로…… 희미한 확신과 놀라움과 언뜻 스치는 그토록 반가움……. 나는 돌아보지 않았어. 어서 전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내려섰지. 엄마…… 너무 많은 세월이 지났고, 그녀의 얼굴이 가물거려서……. 그래, 그래서야, 그거지. 이제 와서 뭘 어쩌겠어. 30년이나 지났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그런데 그런데 날 더욱 뒤돌아볼 수 없게 만들었던 건, 그건 그 눈빛에서 아직도 버리지 않은 희망…… 같은 게……. 희망이라니, 끔찍하게……. 그 눈빛에서…… 비바람 치던 날, 이상한 생각에 내가 문을 열었을 때 두 발을 모으고 애타게 날 바라보던 메리.”
                                                                  - 공지영, 『봉순이 언니』, 1998, 푸른숲, 192-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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