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깡아지 Sep 14. 2016

너는 우리들의 괴로움의 증인이면 된다

한강,「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


죽은 선배가 나를 찾아왔다


어느 자정 무렵, 죽은 ‘임 선배’는 ‘나’를 찾아온다. 그는 십칠 년 전 ‘나’의 첫 직장의 선배였다. 그 잡지사에서는 ‘나’가 입사하기 직전, ‘윤 선배’라는 여자가 여자 직원은 결혼과 동시에 퇴사해야 한다는 관례에 저항하는 사건이 있었다. 결국 그녀는 회사에 승복했고, ‘나’는 그녀의 빈자리를 채우고 들어온 것이었다. ‘경주 언니’는 그것이 ‘임 선배’의 책임이 아닌 것을 알지만, 그가 침묵하는 것이 왜인지 모르게 못마땅해 회사 수련회에서 ‘임 선배’에게 맥주를 뿌린다. 



제발,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만


‘나’가 희곡으로 쓰고 있던 삼국유사의 이야기는 그 때 ‘나’가 겪은 사건을 은유하고 있다. 깊은 산속 각자의 암자에서 두 스님이 홀로 살고 있었는데 어느 눈보라 치는 밤, 길 잃은 소녀가 하룻밤 재워줄 것을 청한다. 노힐부득은 유혹이 두려워서 거절하지만 달달박박은 소녀를 재워준다. 이튿날 노힐부득은 친구가 유혹에 넘어갔을 거라고 짐작하면서 달달박박의 암자에 찾아가는데, 달달박박은 황금 부처가 되어 있었다. 


소녀는 관음보살이었다. 노힐부득은 소녀를 성적 대상으로만 보아 여자의 청을 거절했으나, 달달박박은 그녀를 성별을 떠나 하나의 품어야 할 인간으로 보았기에 부처가 될 수 있었다. 달달박박의 암자에서 목욕을 하던 소녀는 그에게 함께 있어 달라고 말한다. 달달박박이 거절하자 그녀는 “제발.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만.”이라며 간곡히 청한다.


‘나’가 희곡을 완성할 수 없었던 이유는 삼국유사의 이야기가 그녀가 겪은 현실과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임 선배’에게 “하지만 쓰면 쓸수록 제 마음이 그 결말과 멀어졌어요. 그 승려들이 황금 부처가 될 것 같지 않고, 길 잃은 여자가 관음보살일 것 같지 않았어요.”라고 말한다. 삼국유사 이야기의 휴머니즘적 결말과 달리, 현실은 ‘윤 선배’나 ‘경주 언니’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직장에서 부당한 처우를 받았고, 문제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은 채로 종결되었던 것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다른 방법, 같은 저항


‘경주 언니’는 결혼 후에 ‘윤 선배’와 똑같이 출근 투쟁을 해서 어렵사리 자리를 지킨 후에 이직을 한다. 그러나 지방으로 이직한 후 서울에서 연휴를 쇠고 내려가는 고속도로에서 사고차량을 도와주려다 목숨을 잃는다. ‘임 선배’ 역시 한 시사잡지 편집부로 이직을 했으나, 한 대기업에 대해 비판적인 특집기사가 인쇄 지전 삭제되는 일을 겪고 나서 동료 기자들과 함께 파업을 한다. 결국 그들은 사비를 추렴해 새로운 잡지를 꾸리는데, 형편이 어려워 암을 치료하지 못하고 죽는다. 


‘경주 언니’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반면 ‘임 선배’는 “호들갑스럽게 근심을 함께 나누고선 막상 현실적인 도움을 못 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처음부터 감정을 절제하는 편을 택하는 성격”이었다. 그들 각자의 저항의 방법은 누가 옳고 그른 것이 아니다. 


셋은 회사 창사기념일날, 평일 오후에 퇴근을 하고 딱히 할 일이 없어 셋은 월미도에 간다. 그곳에서 ‘경주 언니’와 ‘임 선배’는 탁구 시합을 하고 ‘나’는 심판을 보았다. 어렵게 결판이 났으나 누가 이겼는지는 ‘나’도 ‘임 선배’도 기억하지 못했다.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방법이었지만 모두 불의에 대해 인식했고 저항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우리들의 괴로움의 증인이면 된다


‘나’는 혼자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대한, 그리고 현재의 평화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두 주 전에 최종마감이 지난 희곡을 쓰는 일을 부여잡고서 연말까지 완성해야 한다고 하는 그녀에게 ‘임 선배’는 “거기서 멈췄다면 그게 끝이 거지.”라고 말한다. 함께 회사에 다니던 시절 그는 야근을 마치고 집까지 걸어가겠다는 ‘나’와 함께 걸어주다가 도중에 버스를 타고 돌아간 적이 있었다. 


‘임 선배’는 죽은 몸으로 ‘나’를 찾아온 밤, “평화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야.”라고 말한다. 그는 과거 회사 수련회에서 ‘경주 언니’와 셋이 걷던 해변에서 ‘나’를 바라보던 눈빛처럼, “이 시간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곤란과 괴로움의 증인”이 되어주는 일이면 족하다고 말해주려고 온 것이다. 이는 과거 꿈속에서 어린 ‘나’가 무릎에 품었던 것처럼, ‘나’는 ‘경주 언니’와 ‘임 선배’가 그토록 투쟁하여 지켜내야 했던 훗날의 세상이기 때문이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 그리운 나의 첫 사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