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깡아지 Jan 14. 2017

나, 세계, 나와 세계, 나의 세계

헤르만 헤세, 『데미안』


내 아이가 열여섯 살이 되면 가장 먼저 읽힐 책    


싱클레어는 유복한 가정의 보살핌 안에서만 살다가 골목대장 크로머와의 갈등으로 인해 선과 악의 두 세계가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 후 데미안과의 만남을 통해 성경이라는 기존 가치를 다르게 바라보는 시선을 배운다. 요람에서 벗어난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헤어진 후 타락을 경험하기도 하며 그러한 개인적 자유에 뒤따르는 책임의식을 함양한다. 


그 후 베아트리체라는 소녀를 사랑하게 되면서 삶의 방향성을 어렴풋이 잡아간다. 그리고 데미안과 닮은 구석이 있는 피스토리우스라는 오르가니스트와의 교제를 통해 껍질을 깨고 나올 준비를 한다. 그러나 한순간의 실수로 피스토리우스와는 결별하게 되고, 데미안과 재회한다. 


에바 부인을 사랑하게 되면서 데미안, 에바 부인, 그리고 자신처럼, 주체성에 의해 같은 운명을 가진 공동체를 인식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중 2차대전이 발발하고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징집된다. 전쟁이라는 국가공동체적 운명 속에서 홀로 놓인 자신을 발견한다. 


내가 가장 앞으로의 삶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던 시기는 열어섯 살이었다. 중학교 3학년, 진로 문제에 대한 고민도 있었고 그동안의 나태하기만 했던 삶에 대한 반성도 있었다. 싱클레어의 성장기 식으로 하면 데미안과 헤어진 후에 해당한다. 타락 대신 사춘기를 앓고 나서 최초로 선택이라는 것을 경험하고, 이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여전히 어렸는지 그 후에도 집안의 막내 노릇을 하며 추후에 발생한 책임들을 부모님과 나누어 지기는 하였으나, 그 시절이 없었다면 이후의 모든 시절들이 없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2차대전 속 개인, 현실문제 속 개인    


‘2차대전’이라는 화두는 <데미안>의 서사에서 실로 화룡점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쟁은 헤세가 경계하고 있는 ‘패거리짓기’의 결정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패거리들의 집단주의와 군중심리가 도취와 광기로까지 번져나간 결과이다. 결국 결론 부분에서 등장하는 2차대전은 헤세가 앞에서 지금까지 서술했던 내용들이 하나의 화두로 좁혀지면서 쉽게 적용하여 이해하도록 돕고 있다.


전쟁이 한 개인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서 발발하는 것은 아니다. 전쟁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속한 국가공동체적 이익을 위해 전쟁이 불가피했다고 하기도 한다. 나 하나 살자고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었어, 라는 말이다. 그러나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기도 하다. 전쟁에 징집된 군인들은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닌 일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그들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헤세는 소설의 맨 마지막에서, 마침내 데미안과 하나가 된 싱클레어의 목소리로 대답한다. 운명의 검은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보라고. 


(이미지 출처 : Pixabay)



개인과 세계    


개인은 세계 안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세계가 아무리 클지라도 개인은 자기 자신만큼의 세계밖에 가질 수 없다. 그러면 개인은 세계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나, 결코 세계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시(詩)’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나, 사실 시인은 ‘시’라는 틀에 맞추어 속마음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멀리 보면 시는 결국 언어이고 언어는 세계의 약속이다. 결국 ‘시쓰기’는 오롯한 개인적 행위가 될 수 없으며,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아울러 모든 글은 개인의 서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온 후에야, 독자에게 읽힌 후에야 비로소 글이 되기 때문이다.


학부 시절 한 교수님께서 “우리가 세계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자기 자신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개인이 세계라면, 세계가 개인에게 간섭할 까닭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많은 세계의 간섭을 받고 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부터, 세계와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까지. 개인이 곧 세계라는 말은 어쩌면 지극히 이상적인 것일까. 이 문제는 다음 꼭지에서 더 말하고자 한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주체적 개인으로 살아갈 용기    


헤세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라고 서문에서 밝힌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어떤 길을 걸어야 자기 자신에게로 이를 수 있는가? 정답은 없다. 다만 우리는 주체적 개인으로 살아야 한다. 그 주체적 개인들이 내놓을 정답은 사람 수만큼 다를 것이고, 저마다에게는 그것이 모두 정답일 것이다. 또 정답은 없으나 정답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며, 굉장한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사는 동안 수없이 ‘패거리짓기’를 하며 타인들의 뒤에 숨는 일에 유혹당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 믿음과 확신이 없을 때에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서로가 서로에게로 도피하는 일이다. 주체적 삶과는 거리가 멀다. 주체적 개인으로 살아갈 용기를 가지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 믿음에 대한 책임을 질 각오가 뒤따라야 한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한편, 선의 세계와 악의 세계는 분리된 것이 아니다. 헤세도 그 두 세계에 대해 인식을 하기는 하나, “세계 전체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압락사스가 신이기도 하고 악마이기도 한 신인 것처럼. 박완서 작가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한사람 악한사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사는 동안에 수많은 선악의 갈림길에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는 주체적 개인으로 살아갈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 ‘주체적 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막연하다면, 그냥 ‘선택할 용기’라고 생각하자. 매 순간 선과 악의 기로에 놓일 때마다 주체적 개인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할 용기. 한치의 거짓도 떨쳐버리고, 자신에게 진실되게 선택할 용기. 그리고 그것을 책임질 용기. 나의 세계가 비록 좁은 육첩방일지라도 나의 양심과 신념으로 가꿀 용기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매거진의 이전글 너는 우리들의 괴로움의 증인이면 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