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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깡아지 Jan 15. 2017

이성적 세계의 이방인

알베르 카뮈,『이방인』


허무하고 실존적인    


뫼르소는 허무주의자이자 실존주의자였던 카뮈의 삶을 대변하듯, 크고 작은 사건들에 대해 아무런 감흥 없이 살아간다. 커서는 별다른 교류가 없던 어머니의 죽음을 겪으면서도 슬퍼하지 않고, 마리와 하룻밤을 보내면서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레이몽에게 증인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서 확신이 없는데도 증언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바닷가에서 레이몽을 해하려고 한 아랍 인을 총으로 쏘아 죽인다. 단지 햇빛이 아랍 인의 단도에 반사되어 너무나도 눈이 부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앞서 발생한 모든 일들이 뫼르소의 죄를 부풀리는 데에 일조한다. 검사는 재판에서 뫼르소를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슬퍼하지 않고 여자와 동침하는 감정이 부재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고, 살인 역시 레이몽의 증인이었다는 것을 근거로 복수심에 의한 것이었다고 발언한다. 검사는 뫼르소를 비약적으로 ‘인간답지 않은 인간’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뫼르소는 그 모든 말들에 저항할 의지가 없고, 적극적으로 풀려나고자 하는 의지조차 없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뫼르소 없는 뫼르소 재판    


뫼르소의 재판은 뫼르소 한 사람 때문에 벌여졌지만 뫼르소 한 사람만 제외하고 흘러간다. 결국 뫼르소는 사형 선고를 받는다. 뫼르소는 감옥에서도 사람은 무엇에나 결국에는 익숙해지는 것임을 느낀다. 그리고 추억할 과거의 기억만 있다면 얼마든지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여긴다. 사형수가 된 뫼르소는 죽음을 기다린다. 그 전에, 새벽녘과 상고를 기다린다. 그러나 상고는 기각되고, 뫼르소는 이를 받아들인다. 뫼르소는 집행관들이 새벽녘에 온다는 사실을 알고, 낮잠을 자두었다가 밤에는 잠들지 않고 새벽이 오기를 기다린 후에 오늘 집행이 되지 않는다고 안심하고서야 잠이 든다. 뫼르소는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죽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러나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뫼르소는 자신을 교화시키러 온 신부에게 말한다.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것은 너보다 더 강하다.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명확한 의식이 나에게는 있어. 그렇다, 나에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으리라. (중략)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그 까닭을 알고 있다. 너도 그 까닭을 알고 있다. 내가 살아온 이 허망한 생애에선, 미래의 구렁 속으로부터 항시 한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해들을 거쳐서 거슬러 올라왔다. 그 바람이 도중에 내가 살고 있던 때, 미래나 다름없이 현실적이라 할 수 없는 그때에 나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모두 아무 차이도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성적 세계의 이방인    


뫼르소는 이 세계의 이방인이다. 자신이 이 세계에 소속되어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여행을 갔을 때에나 이러한 느낌을 가진다. 일상으로부터 탈출한,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곳에서 모조리 쓸 작정으로 환전해 온 화폐를 소비하며 그곳에서만큼은 경제적 관념에서 해방된다. 어쩌면 우리는 이 맛에 여행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뫼르소는 자신의 삶 전체를, 매순간을 이런 마음으로 살고 있었다. 누군가는 끊임없이 더 잘 살고자 집착하는 이 세계에서, 단지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처럼. 그래서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일에 무관심했고, 세계는 그것이 죄라고 여겼다.    


우리는 너무도 많은 관계에 얽매여 있다. 혼자 사는 세계가 아니라 함께 사는 세계이기에 이것은 불가피하지만, 때로는 그 관계들이 우리를 너무도 힘들게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고, 잘 해야 하고,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한다. 이미지를 실추시킬 법한 행동은 하지 않아야 하고, 너무 솔직해서도 안 된다. 다소 격한 표현을 빌리자면, 내 한 몸 간수하기도 벅찬 세계에서 타인까지 신경 쓰는 것은 무리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내면으로 들여다보기가 어려워진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외면한 채 살아간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정상에 닿고자 노력한다. 반항, 자유, 의지, 열정 같은 단어들과 자꾸만 거리가 멀어진다. 이것들과 가까운 사람은 여전히 이 세계의 이방인이다. 카뮈는 실존주의자였다. 우리는 단지 무의미한 세계 속에 내던져져 있을 뿐인데, 자꾸만 이성의 기준을 세우고 그것을 좇으려 한다. 그 모든 것들이 부질없다. 감옥은 아니지만 판옵티콘처럼 보는 눈들이 많은 이 세계는, 카뮈의 시대에서 더 나아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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