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이제 가자.”
“그건 안 돼.”
“왜?”
“고도를 기다려야지.”
“맞다, 그렇지!”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판단을 유보해야 희망이 있다. 스스로에게 희망으로 고문하는 일이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기다린다. 만약 고도가 정말로 왔다 해도 그 두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린 시절 소풍날을 손꼽아 기다려본 적이 있는가. 기다렸던 일들은 막상 실제로 일어나면 기대했던 것보다 시시하기 짝이 없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우리는 그토록 기다리던 무언가가 지나가면 또다른 무언가를 기다리기를 반복한다. 그런데 고도가 누구인지는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누구'를 기다리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하며 기다리느냐다. 고고와 디디는 오지 않는 고도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며 바로 어제 무엇을 했는지도, 방금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잊어버린다. 기다림이 덧없고 무의미해지는 순간이다.
그러한 기다림을 멈추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극이 가르쳐주는 것은 삶은 긴 시간 동안 무언가를 끊임없이 기다리는 행위이고, 그 기다림은 ‘시간을 때우기’ 위한 유희로 메워진다는 것이다.
기다리며 쓰는 삶이라는 시
황지우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에서 화자는 오지 않는 '너'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러다 마침내는 먼저 ‘너’에게 걸음을 내딛는다. 수동적 기다림에서 능동적 기다림으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반대쪽 평행선을 밟으며 걸어오고 있을 ‘너’의 발길을 재촉하며 ‘나’ 또한 ‘너’에게 가는 것은, 발자국 하나에 심장이 뛰다가 철렁 내려앉기를 반복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서정주의 시 <견우의 노래>에서 하늘의 벌을 받아 이별하게 된 견우와 직녀는 반대편 너머에서 서로를 그리워하며 칠월 칠석만을 기다린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각자의 본분, 즉 견우는 검은 암소를 먹이고 직녀는 비단을 짜며 행해진다. 이러한 기다림이 가능한 까닭은 반드시 만날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사랑을 위해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한다는 역설을 되뇌며, 단 하루의 만남을 위해 그 하루를 뺀 나머지를 산다.
김영랑의 시 <모란의 피기까지는>에서도 마찬가지다. 화자는 모란이 필 때까지 ‘나의 봄’을 기다린다. 모란은 닷새 정도 피어 있다가 이내 곧 뚝뚝 떨어져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화자는 또다시(시에서는 ‘아직’이라고 표현하였다) 삼백예순 날을 기다린다. 찬란한 슬픔의 봄이어도 좋다. 다시금 피어날 아름다움을 탐할 수만 있다면.
기다림에 대처하는 자세
기다린다는 행위는 1. 기다림의 대상이 오기로 약속했다 2. 나는 그 대상이 오기를 바란다 3. 대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4. 그러나 반드시 올 것임을 믿는다, 라는 네 가지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이 중 하나라도 어긋나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유보했던 판단을, 기다리는 대상이 오지 않을 거라고 내리게 된 순간 기다리는 행위는 끝이 난다. 그러나 기다림에는 미학이 있다. 이무기가 연못 속에 잠겨 고요히 승천을 기다리는 것과 같이, 기다릴수록 견고해지기에 기다림은 고귀하고 숭고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삶이라는 막연한 기다림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시간을 때우는’ 유희들로 혹은 각자의 본분으로 그 간극을 메우거나, 자리를 박차고 대상에게 발걸음을 옮기거나, 여전히 조용히 인내하며 기다리거나, 어차피 그만둘 거 일찌감치 단념하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