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이해와 사랑 <여름의 빌라>

우리가 잠깐 머물렀다 떠날 그곳을 우리는 '여름의 빌라'라고 불렀습니다.

by 꿈결

여름의 빌라.

백수린작가의 단편집을 엮은 책이다. 표지가 달라졌는지, 수채화 느낌의 책 표지부터 마음에 들었다.

망원동의 한 책방에서 책방지기가 추천한 책으로, 구매한 지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어쩌면 들어맞는 계절에 펼쳐 적당한 속도로 읽어냈다.

단편을 읽으며 느낀 것은 일상을 살며 느끼는 죄책감 비슷한 것들, 그럼에도 외면하는 나 자신의 모습. 들춰보기 부끄럽고 굳이 꺼내고 싶지 않은 내면의 갈등을 과장되지 않게 풀어낸다는 것이다. 나 자신도 설명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소설을 통해 내 안에 정돈되어 자리 잡는 경험을 하게 된다.


여름, 극단적인 여름 날씨를 온몸으로 겪어내다 보니 여름은 무심히 계층의 굴곡을 뚜렷하게 하는 계절임을 여실히 느낀다. 더운 날씨는 밖에서 일하는 사람과 안에서 일하는 사람을 구분하고, 위에 사는 사람과 아래에 사는 사람을 구분해 낸다.


여러 단편 중 책 제목의 단편 "여름의 빌라"는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하는 부부(지호(남)와 주아(여))가 주아가 예전에 여행에서 만나 간간히 카드나 이메일로 연락을 이어가던 독일에 사는 부부의 여행 초대에 응해 가게 된 캄보디아에의 숙소다. 동남아 특유의 뜨거움과 유명한 관광지에서 "깁미 어 원 달라"를 외치며 길마다 발에 치일 듯 다가오는 아이들. 유명한 수상가옥에 가 그들의 삶을 구경하는 그들. 같은 풍경을 보고 다르게 느끼는 관광객인 두 쌍의 부부.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숙소에서 그들은 수상가옥에 사는 이들의 삶에 대해 토론하게 되는데, 지혁은 그들이 주어진 상황에서 낙천적으로 산다며 말하는 독일인 남편에게 욕설을 내뱉기까지 감정이 고조된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수습하려는 주아. 끝내 눈물을 훔치는 독일인 아내. 이러한 정치적 맥락의 이야기는 사실 어떤 연유에서든 특권을 누리고 있는 우리가 어떤 말을 하던 적절한 당위성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간 주아는 독일인 부부 중 아내인 당신에게서 몇 달 후 편지가를 보고 눈물을 흘린다.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는 이야기로 시작되는 그 편지. 화자는 편지를 2번 연거푸 읽고는 이들 독일 부부의 딸 이야기를 알게 된다. 크리스마스를 좋아했던 딸이 크리스마켓에서 일어난 테러 사건에서 죽게 되었다는 것을.


"지난 2016년 12월 이후 당신은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쉽게 폭력 앞에서 소멸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고요. 하지만, 주아. 당신은 그렇게 덧붙였습니다. 긴 세월의 폭력 탓에 무너져 내린 사원의 잔해 위로 거대한 뿌리를 내린 채 수백 년 동안 자라고 있다는 나무. 그 나무를 보면서 나는 결국 세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폭력과 증오가 아니라 삶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68pg


여행에 함께한 또 다른 인물, 독일인 부부의 손녀 레오니의 행동으로 단편소설은 마무리된다. 쭈그리고 앉아 돌멩이로 망고를 좋아하는 원숭이님의 집을 만들어 놀고 있는 레오니와 곁에 앉아 함께 노는 주아. 그 둘이 노는 게 재밌어 보였는지 캄보디아의 한 아이가 다가온다. 주아는 레오니가 낯선 아이를 불편해하지는 않을까 걱정을 했는데, 레오니는 발로 자신이 놀면서 그었던 선을 지우고 아이의 뒤쪽에 새로운 선을 그으며 말한다. "집에 새 친구가 있으니 원숭이님이 더 좋아하겠지?"하고.


또 하나의 단편 "고요한 사건"에서는 마음속 깊이 박혀 어떤 선택을 할 때마다 떠오를 문장을 발견했다.

눈이 오길 기다리는 지루하게 기다리는 화자로 시작되는 소설. 재개발이 된다는 동네인 소금고개로 이사 간 화자의 가족은 소금고개 마을 사람들에겐 소위"있어 보이는 가족"으로 통했다. 너저분한 길목과는 달리 화자의 아빠는 앞마당을 쓸었으며, 엄마는 양산을 여러 개 가지고 돌려 사용하며 동네를 걸어 다녔다. 화자에겐 친한 친구들과 동시에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던, 그곳. 전에 살던 아파트보다 훨씬 안 좋은 집이었지만 재개발만을 기다리며 부모는 딸인 너의 교육을 위한 거라면서 소금고개에서의 생활을 버텨낸다. 그러다 재개발이 추진되고, 재개발 찬성파와 반대파의 갈등이 생기는데 평소에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던 아저씨는 재개발에 반대했고 고양이에 약을 먹여 죽이는 찬성파들에 저항하다 찬성파 여러 명에게 얻어맞고 있었다. 그 장면을 목격한 화자는 자신의 아빠에게 가서 말려줄 것을 요청하는데 기대와 달리 그저 주인공에게 물을 주라고 아내에게 말할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죽은 고양이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한 화자는 자고 있는 부모 몰래 점퍼를 입고 밖을 나가려 운동화를 신기 전 맨 발로 현관 바닥을 내디디는데, 생각보다 너무 차가워 몸서리친다. 순간 고양이가 그대로 있긴 한 건지, 옷을 너무 얇게 입은 건 아닌지 하고 망설여지는 생각이 스치는데 고양이가 그대로 있는지만 확인하려고 서리가 낀 문의 유리창을 쓱쓱 문질러 밖을 확인한다. 화자는 "세상에"하고 탄성을 내뱉는데, 눈으로 뒤덮인 하얗고 고요한 세상이 창문 너머로 펼쳐져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내 인생의 결정적인 한 장면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나는 평생 이렇게, 나가지 못하고 문고리를 붙잡은 채 창밖을 기웃거리는 보잘것없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그 장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이고, 그때 나는 창밖으로 떨어져 내리는 아름다운 눈송이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모든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집집마다 매달려 펄럭이는 붉은 깃발들 사이로 새하얀 눈송이가 떨어져 내리는 풍경을, 그저 황홀하게."

104-105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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