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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우 Mar 28. 2024

3. 기괴하고 낯설고 흡입력 있는 이야기의 향연

20240328 천명관 작가의 고래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야 10p     


춘희와 같은 감방 안에 있던 한 여죄수 청산가리의 말이었다.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일. 이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라니. 결혼을 한 지 12년이 넘은 지금, 내가 가장 싫어하는 청소가 바로 먼지를 닦는 일이었다. 대신 남편이 주말마다 그 먼지를 닦아주어 마치 내가 청소를 한 듯 바라보는 잘못된 나의 시선까지. 글을 읽는 순간 남편에게 미안했다. 주부로서의 할 일을 하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글의 내용과는 상관없는 잡생각이었지만 ‘먼지’가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죽음이란 건 별 게 아니라 그저 먼지가 쌓이는 것과 같은 일일 뿐 11p     


그렇다면 먼지를 닦지 않아 쌓이는 먼지는 내가 죽어있다는 것인가. 뒤돌아보았다. 남편의 입장에서는 우리 집 살림의 죽음(먼지가 쌓이는 일)을 예견했나 보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에 먼지로 내 주제에 천명관 작가처럼 비유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지난 세월의 먼지를 닦았어야 했고 앞으로의 먼지도 닦아야 했다. 남편의 일로 미루기 전에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증표로, 청소를 해 살아 있다는 증거로 말이다.     


그렇게 먼지와 사투를 벌이고 주인공 춘희로 빠져들었을 때 출소한 춘희의 모습이 보였다.           



다른 이야기들이 함께 떠올랐다     


“너나 잘하세요.”

춘희가 교도소에서 나왔을 때 영화 ‘친절한 금자씨’가 떠올랐다. 춘희도 두부를 먹으며 금자씨와 같은 인생을 살지 않을까 걱정했다. 춘희의 엄마 금복이가 처음 바다를 보는 순간부터 자리를 잡기까지의 내용은 소설 ‘파친코’가 생각났다. 칼잡이와의 사랑 이야기는 드라마 파친코의 이민호가 아른거려 설레었다. 코끼리 ‘점보’와 춘희의 교감 장면에서는 만화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빙봉이 대입됐다. 울면 사탕이 나오던 빙봉은 자신을 희생하며 기쁨이를 위기에서 탈출시켜 주듯이, 이 소설에서도 코끼리가 춘희의 해방을 도왔다. 이후 춘희는 교도소에 가지만 금복이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않았나 싶다.

금복이의 방탕한 성생활은 하루키 소설의 ‘1Q84’가, 춘희가 마지막까지 굽던 벽돌 작업에서는 소설 ‘독짓는 늙은이’가 스쳐갔다. 벽돌을 굽는 내내 그 가마 안으로 들어가 춘희가 혼자 죽을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한국의 마르케스, 천명관     


나오는 인물들의 설명과 ‘구라’의 향연은 기괴했다. 마치 SF영화를 보는 착각과 함께 머릿속에는 인물들이 영상화되어 돌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애꾸’ 여자였다. 벌을 그녀의 마음대로 조정해 사람도 죽이는 인물로 국밥집 노파의 딸이었다. 애꾸는 춘희의 사충 감염을 치료해주기도 했다.

글의 내용은 자뻑이 더해진 신기한 변사(무성 영화를 상영할 때 영화 장면에 맞춰 그 줄거리를 설명하던 사람)의 입담으로 이야기를 흡입력 있게 끌고 가 소설을 눈에서 뗄 수 없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고래’ 소설을 다 읽고 난 다음의 후유증이 남았다. 가슴이 먹먹하면서도 짜증이 났고, 작가는 왜 이런 글을 썼는지 궁금했다.

천명관 작가는 한국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이하 마르케스)’라고 칭송을 받았다. 마르케스를 몰랐다. 이 콜롬비아 작가의 ‘백 년의 고독’ 책을 함께 읽어보았다. 그러나 절반밖에 읽지 못했다. 하지만 공통점을 찾는다면 가문의 일대기, 한 도시의 발전과 폐허, 귀신과 같은 환영을 보는 것, 점쟁이의 예언, 모든 등장인물들의 석연치 못한 죽음, 쌍둥이, 성생활의 방탕함은 맥락을 같이 했다.        


  

춘희의 개망초     


“언제부턴가 선로를 따라 이름 모를 하얀 꽃이 무성하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기차를 타고 낯선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찻길 옆에 무슨 꽃이 피든 아무 관심이 없었지만 눈썰미가 있는 사람들 몇몇은, 도대체 저게 무슨 꽃일까, 궁금하게 여겼다. 그것은 바다 건너 멀리 외국에서 들여온 굄목이 자리를 잡자마자 바람을 따라, 철로를 따라, 자연의 법칙을 따라 들로 산으로 퍼져나간 식물이었다.
개망초.
그것은 춘희가 금복의 손을 잡고 평대에 처음 도착했을 때 역 주변에 무성하게 피어있던, 슬픈 듯 날렵하고 처연한 듯 소박한 꽃의 이름이었다. 이후, 그 꽃은 가는 곳마다 그녀의 뒤를 따라다녀 훗날 그녀가 머물 벽돌공장의 마당 한쪽에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혹독한 시간을 보낼 교도소 담장 밑에도, 그녀가 공장으로 돌아오는 기찻길 옆에도 어김없이 피어있을 참이었다. ”150p     


‘고래’ 소설 속 등장인물 거의 죽었다. 하지만 춘희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개망초처럼. 타국에서 날아온 씨앗이 끈질기게 살아남았듯이. 춘희는 금복의 파란만장한 삶 속에 핀 개망초였다. 금복은 춘희 돌보지 않았지만 춘희의 개망초는 언제나 가까이에 있었다. 결국 ‘붉은 벽돌의 여왕’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춘희는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춘희는 죽어서 대극장의 벽돌을 남겼다. 그녀가 남긴 벽돌은 그녀의 삶이자 전부였다. 그리고 그렇게 쓰인 벽돌은 대극장에 멋지게 남아 전설이 되었다.          


 

춘희의 벽돌처럼 나만의 벽돌은 무엇인가     


독서회의 토론 주제 끝부분에 회원 한 분이 말했다.      


“춘희가 남긴 벽돌처럼 각자에게 자신만의 벽돌이 무엇인가요?”     


나만의 벽돌을 생각했다.

“.... 그녀는 뭐든지 복잡하게 생각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69p


금복이를 설명하는 글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생각하지 않고 실행한 나는 돈과 시간과 노력을 얼마나 썼던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나만의 벽돌은 그런 실행력과 약간의 지구력이라고 결론지었다. 왜냐. 나도 금복이처럼 복잡하게 생각하는 타입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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