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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우 Apr 02. 2024

12. 가까이서도 멀리서도 희극이 될 수 없나요?

20240402 두 독립이 만나 효도가 되었다

여기 독립하는 두 명이 있다. 둘 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각자의 독립을 마주했다. 한 명은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아이. 다른 한 명은 올해 65세인 남자다. 이 여자아이는 혼자 자는 게 무서워 남동생 두 명과 좁은 방에서 잠을 잤다. 남매들 간의 긴 싸움 끝에 억지로 독립선언을 했다. 아이의 엄마는 환호했다. 하지만 환호와 함께 밀려오는 방 꾸미기는 여간해서 끝나지 않았다.



남자의 이야기_65세지만 건강하고 뭐든 잘한다!


남자는 회사를 그만뒀다. 폐에 문제가 발견됐고 지하에서 일해서 그렇다고 그의 아내는 결론지었다. 남자는 65세. 직업으로부터 독립된 남자의 여유가 이 여자아이 방 꾸미기를 수락해주었다. 남자가 여자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도배였다. 남자는 첫 번째 회사에서 31년을 다니고 그만둘 무렵 혹시나 하는 걱정으로 인테리어 학원에서 도배와 장판 일을 배워뒀다. 그리고 인테리어 일을 뒤로하고 두 번째 직장을 8년 다니고 그만두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만큼 도배가 그에겐 쉽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항상 눈은 잘 보인다고 말했지만 잘 보이지 않아 눈을 많이 찡그려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딸은 그가 왜 안경을 쓰지 않는지 의아해했다.


그는 그의 딸에게 도배지를 재단해 풀칠을 해오라고 부탁했다. 8년 전 가지고 있던 인테리어 도구 허리띠를 차고 벽에 도배를 하기 시작했다. 자글자글한 그의 눈은 섬세할 수 없었다. 몰딩에는 삐뚤빼뚤한 칼자국에 얇게 썰려 있는 도배지가 드문드문 있었다. 도배지끼리의 겹침 부분은 일정하지 못했다. 그는 5mm를 유지해 붙인다고 했지만 처음과 끝의 겹침 부분의 간격은 시냇물이 점점 강을 만나 퍼지듯이 좁다가도 넓게 펼쳐졌다.

 

실수로 빼지 못한 스위치 위로 도배지가 덮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바로 칼을 꾹꾹 눌러 스위치 위에 엑스자를 그렸다. 그리고 도배 뒤 남겨진 건 스위치 위의 칼자국이었다. 의자를 세 개씩 가져다 놓고 풀칠한 도배지를 천장에 붙이는데 그 의자를 징검다리처럼 밟았고 그럴 때 그의 허리는 다리와 70도를 이루었다. 뒤로 구부러지는 허리의 각도가 그의 건강을 말해주었다.


멀리서 보면 도배도, 유리도 완벽해 보인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일까.


남자와 여자아이는 함께 사진을 찍었다


어찌어찌 도배가 끝이 나고 그는 여자아이와 함께 그 방에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그가 해줄 수 있다는 뿌듯함이 미소로 번졌다. 그 미소는 찐 웃음이었다. 남자의 가짜 웃음과 진짜 웃음을 나는 구분할 수 있었다. 나는 그의 딸이기 때문이다. 그 웃음이 내가 드릴 수 있는 효도였다. 다음 날 남자의 카카오 스토리에는 자신이 완성한 도배의 사진 멀리서 찍어 완벽했다. 남자는 앞으로 세 번째의 새 직업을 가져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슴에 새겼다. 자는 건강하고 뭐든 잘해낸다는 모습을 딸에게 보여줬다. 그리고 딸은 조용히 남자를 응원했다. 딸은 그의 직업이 있던 없던 간에도 그가 잘해낼거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여자아이는 남자가 어떻게 해주던 상관이 없었다. 그저 독립된 공간만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동생들과의 분리된 공간으로 아이 셋의 잠자리 다툼으로부터 멀어졌으니 엄마인 나에게 효도가 된 셈이다.      



+ 나의 이야기_유리창을 닦다가 인생을 닦았다   


딸 방 베란다 창문을 닦는다. 처음 닦는 유리. 막내가 태어나고 이곳에 이사 왔다. 막내는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물걸레질은 어디든 딱 싫었다. 유리는 7년 된 먼지를 머금었다. 한 번에 지워지지 않았다. 여러 번 문질러도 반대편 유리에서 보면 다시 때가 보였다. 베란다에서 아이의 방을 바라보는 바깥쪽 유리와 아이의 방에서 베란다를 바라보는 안쪽 유리가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분명 눈앞의 유리를 깨끗이 닦았지만 반대편에서 보면 그렇지 않았다. 내 눈을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찰리채플린이 말했다. 인생은 멀리서는 희극이고 가까이에서는 비극이라고. 유리창을 닦다가 인생을 닦았다. 멀리서는 깨끗한데 가까이서는 더럽다. 아빠가 멀리서 본 그 방의 도배는 가까이 서면 비극이 보였다. 그럼에도 멀리서도 가까이서도 깨끗하고 싶은 인생을 살고 싶다는 나의 바람은 그저 ‘효도했으면 됐지’로 끝이 났다.



+ 그나저나 딸아 엄마 짐도 너의 베란다에 놓아줄 수는 없겠니? 너의 방에 모여있던 물건들이 갈길을 잃었단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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