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역몽 23화

감춰진 문장들

줄감옥

by 슬기롭군

입구에 들어서면, 눈을 사로잡는 다채로운 색과 풍경이 펼쳐진다.
하지만 그 찰나의 아름다움을 지나면, 이내 나는 조용한 감옥과 마주하게 된다.

줄과 줄 사이.

수많은 글자들이 조용히 웅크린 채 갇혀 있다.
단어는 혼자이기도 하고, 문장으로 묶여 있기도 하다.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며,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남아 있다.
나는 그곳을 ‘줄감옥’이라 부른다.

빛을 보지 못한 글자들.
세상의 눈길 한 번 받지 못한 문장들.
그들은 긴 기다림 끝에도 선택되지 못하고, 조용히 공책속에 남는다.

하지만 간혹, 누군가의 눈에 띄어 선택되는 글자들이 있다.
그들은 한 편의 글이 되고, 누군가의 마음에 닿는다.
어떤 말은 노래가 되고, 어떤 말은 위로가 된다.
한 번의 선택은 글에게 새로운 이름과 역할을 부여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줄감옥을 다시 들여다본다.
묻혀 있던 글자들을 꺼내어 천천히 다듬고, 이어 붙이며 이 글을 쓰고 있다.
한때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말들.
그러나 지금은 나의 글이 되어 또 다른 문을 연다.

모든 글이 선택받는 것은 아니다.
끝내 누구의 입에도 오르지 못하고, 마음에도 닿지 못한 문장들이 있다.
그들은 잊힌다. 혹은, 스스로를 지운다.

나는 그런 글들을 지나치지 못한다.

왜 쉽게 지나칠 수 없었을까?

나와 어딘가 닮아서 일까?

그들이 외면했던 말들, 쓸모없다라며 버려졌던 기억들.

글을 보며 생각한다.
내가 외면했던 말들,
당시에는 미완성이라 느껴져 버려졌던 문장들.
그들이 나를 향해 말한다.
“우리가 틀린 건 아니야. 그저, 아직 쓰일 시간이 오지 않았을 뿐이야.”

그래서 나는 손을 내민다.
선택받지 못한 글들에게 기회를 건넨다.
조용히 꺼내어 다시 써본다.
형태가 낯설고 문맥이 어색해도,
그 안엔 여전히 쓸 수 있는 마음이 남아 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도,
그런 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줄감옥 속에 조용히 머물던 단어들이
이제는 나를 통해 다시 살아난다.

모든 말은 쓰일 이유를 지닌다.
단지, 그때가 아직 오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감춰진 문장들에게 말을 건다.
너희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고.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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