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앞두고 '해외여행'이라는 무리수를 둔 사연
'마지막'이라고 하면 뭔가 애틋해진다. 일상에서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도 하나둘씩 안녕을 고할 때가 점점 다가오니 어찌나 아쉽던지. 어떻게 하면 후회 없이 더 잘 놀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주저하지 말고 하나둘씩 실천해 보기로 했다.
첫 번째, 축구경기 직관
공만 봐도 몸이 반응하는 우리 집 호비 남매의 관심사는 단연 축구. "엄마 이제 축구 선수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을 거 같아요! 우리 축구 경기 보러 가면 안 돼요?"라며 간절한 눈빛으로 호소하는 녀석.
수많은 인파 속에서 불편함을 감수하며 보느니 집에서 치킨이라도 뜯으며 편하게 보자는 주의였으나 이번에는 생각이 달랐다. 우리가 또 언제 서울월드컵경기장에 갈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바로 검색에 돌입.
마침 태국과 월드컵 예선 경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건 운명이로구나! 국가대표 축구 선수들이 대거 소집된다는 소식에 우리 가족은 환호성을 질렀다. 안 가면 손해라는 확신을 가지고 티켓팅 완료. 손흥민 선수부터 김민재 선수까지, 절호의 찬스를 앞두고 아이들보다 내가 더 설렜다.
드디어 D-day! 퇴근한 남편을 지하철역에서 만났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시간에 밖에서 아빠를 만났다는 사실 만으로도 아이들은 이미 신이 났다. 일단 배를 채워야 했기에 밥부터 먹기로 했다. 경기장 근처의 식당마다 길게 늘어선 줄에 정신이 혼미해져 결국 가장 사람이 적은 카페에서 샌드위치로 대충 때웠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밥이 아니니까.
입구에 걸린 대형 현수막의 선수들을 보며 아이들은 벌써부터 초 흥분 상태다. 응원 도구인 빨간색 불빛이 반짝거리는 붉은 악마 머리띠를 사고 싶다며 딸내미가 조른다. 한 3초 고민하다가 까짓 껏 쿨하게 허용했더니 '이 엄마가 왜 이러지?'라는 반응이다. 평소 같았으면 택도 없었을 테니. 이왕 즐기는 거 오늘만큼은 하고 싶은 거 다 해보자!
아직 롱패딩을 입어야 하는 3월 말의 날씨였지만, 경기장은 뜨거운 응원 열기로 가득했다. 확실히 현장만의 매력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분위기를 타고 함께 목청을 높여 대~한민국을 외쳤다. 초대형 태극기가 펼쳐졌을 때는 그야말로 국뽕이 차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래, 이 맛에 직관을 하는 거구나.
고대했던 손흥민 선수의 골이 터지자 관객들은 환호했다. 우리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뭔가 뾰루퉁한 표정의 딸, "엄마, 선수들이 너무 조그맣게 보여요. 왜 이렇게 우리는 잘 안 보이는 자리에 앉은 거예요? 다음에는 맨 앞자리에 앉아서 봐요."라며 투덜거렸다. 미안하다, 4인 식구 티켓 비용은 생각보다 압박감이 들어서 우리 형편에는 어쩔 수가 없었단다. 비록 그리 좋은 좌석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비록 1:1 무승부로 끝났지만, 그래도 좋은 추억으로 두고두고 기억할 순간임은 확실했다. 이로써 첫 번째 미션은 대성공.
두 번째, 해외여행 다녀오기
"아니, 이사를 앞두고 여행을 간다고? 그것도 해외로?" 주변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서울에서 인천국제공항은 고작 1시간 컷. 부지런 떨어 특가로 미리 예약하거나 연차 찬스를 잘만 활용하면 비교적 쉽게 여행을 떠날 수 있다. 하지만 강릉에서 출발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집에서부터 인천국제공항까지 교통체증 없이 논스톱으로 쭉 달린다 해도 족히 3시간은 걸린다. 웬만한 근거리 국가의 비행시간과 맞먹는다. 여행 시간은 두 배가 늘어나게 되니 생각만 해도 피로가 몰려오는 기분이다.
그리고 평소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는 특히나 더 돈도 시간도 여유가 없을 예정이라 아무래도 당분간 해외여행은 힘들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서울을 뜨기 전에 확 질러버리기로 결심했다. 물론 부모님은 팔짝 뛰셨다. 제정신이냐며 말이다. 이미 강릉이주를 실행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격과 서운함을 느끼셨는데, 이에 그치지 않고 일을 더 벌리고 있으니 말이다. 불효녀라 심히 죄송하오나, 기어코 저희는 비행기를 타야겠습니다!
다행인 건 아이들이 해외여행에 적극 공감해 줬다는 사실. 가족회의를 통해 여행지를 정하느라 열띤 토론을 벌였다. 동남아 쪽의 휴양지로 갈 것이냐, 가까운 일본으로 먹방투어를 할 것이냐 등등. 결론은 홍콩으로 낙찰. 우리 부부는 무려 일곱 번째 방문이었고, 네 식구 완전체로도 이미 두 번을 다녀온 곳이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가족은 한번 꽂히면 끝장을 보는 성격인가 보다.)
그리고 조금 치사하지만, 아이들도 일정 부분 여행비를 분담시켰다. 그래야 좀 더 간절함과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여행을 잘 즐길 수 있을 거 같아서다. (라고 거창하게 말해보지만, 잔고 사정이 뻔해서)
한 때 잘 나가던 여행블로거 짬바를 발휘하여 거의 제주도 항공권 비용으로 티켓팅에 성공했다. 한국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가성비 끝판왕 하버뷰 호텔을 예약하고, 여행 코스도 착착 계획했다. 홍콩은 거의 눈 감고도 다닐 수 있을 정도니까. 이제 아이들도 제법 컸으니 로컬 맛집도, 줄 서서 먹는 맛집도 몇 군데 스케줄에 넣었다. 트레블로카드를 발급받고, 학교에 체험학습 계획서를 제출하고, 모든 게 순조롭게 잘 흘러갔다. 정작 가장 중요한 여권 빼고.
유효기간이 만료되어 재발급을 받아야 했는데, 생각보다 일정이 빠듯했다. 그만큼 해외여행을 즉흥적으로 추진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튼 생쇼를 해가며 여권 사진을 찍고, 구청에 들려 접수를 하고 제발 제 때 여권이 도착하기를 간절히 바랬다. 이렇게 심장 쫄깃하게 무모하게 홍콩행을 준비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무리수긴 했다. 최소 해외여행을 앞두고 있다면, 여권은 미리미리 발급받는 걸로.
비장한 각오로 뚝심 있게 추진한 것 치고는 다소 허술했던 최후의 해외여행은, 남들이 볼 때 미쳤구나 싶었겠지만 우리 가족으로써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최선의 의사 결정이었다. 비록 이사 준비와 여행 준비가 겹쳐 에너지가 고갈되긴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자청해 무덤을 파는 꼴이라 몇 차례 현타가 왔지만 지금도 후회는 없다. "그래도 그때 홍콩 다녀오길 백번 잘했어."라며 그때를 추억하곤 한다.
예상외로 여행 내내 심각한 미세먼지로 쾌적한 날씨 컨디션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홍콩 야경은 언제 봐도 설렘을 느끼기에 충분히 로맨틱했다. 트램을 타고 바라보는 풍경도, 솔솔바람이 부는 창가 자리에서 누리는 갬성은 낭만 그 자체였다.
아이들은 스탠리마켓에서 처음 만난 외국인 친구들과 신나게 축구를 했다. 홍콩의 유명한 맛집에서 딤섬과 우육면 토마토라면을 제대로 즐기고 에그타르트, 에그와플 등의 간식거리까지 섭렵한 걸 보면 이번 홍콩 여행도 충분히 성공적으로 미션 완료! 하지만 내 인생에서 다시는 '이사'처럼 큰 일을 앞두고 '여행'이라는 패기 넘치는 무모한 도전은 절대로 하지 않겠노라 다짐해 본다.
세 번째, 콘서트 즐기기
일명 아줌마의 최후의 반란이라 할 수 있겠다. 쓰리이(남편과 두 아이를 지칭하는 말)의 방해 없이 오로지 나 홀로 우아하게 즐기는 문화생활이야말로 얼마나 고귀한가! 영화나 연극공연, 미술관람은 강릉에서도 충분히 누릴 수 있다지만 콘서트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전국 투어 콘서트를 한다고 해도 강릉에서 열리는 일은 거의 없을 테니. 그렇다고 KTX 타고, 지하철 타고 콘서트를 갈 만큼의 열정은 또 없다는 게 문제.
그렇다면 나의 고막 남친인 크러쉬 연말 콘서트는 어떻게든 가야겠구나 싶었다. 솔직하게 고백컨데, 2023년 12월에도 다녀온 적이 있다. 앞으로도 또 갈 거냐는 남편의 질문에 "에이, 한 번이면 족해. 내 다시는 혼자 콘서트 다녀오는 일은 없을 거야."라며 자신만만하게 큰소리쳤다. 그로부터 1년 후, 비굴한 웃음과 함께 한 입으로 두 말하는 꼴이 될 줄이야.
종교적 신념도 한몫했다. 그래도 크리스천인데 성탄절은 거룩하게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게 맞는데, 홀로 콘서트를 간다니... 내가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게다가 둘째 아이의 성탄발표회 시간과도 겹치는 터라 더욱 난감한 상황.
그래도 곰곰 생각해 보니 나의 정신 건강과 가정의 평화를 위해 반드시 가야만 했다. 당시 아이들의 초등학교 겨울방학은 무려 학원도, 방과 후 수업도 전혀 없이 장장 70일 넘게 이어지는 난이도 최상의 방학이었으니까. 갖은 핑계로 정당함을 부여했지만 그래도 내면에서는 고민이 계속되었다.
결국은 우물쭈물하다가 티켓팅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대로 끝나라는 법은 없지! 공연 당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중고 거래 사이트를 찾아보다가 동네 이웃이 급작스러운 컨디션 난조로 눈물을 머금고 내놓은 파격 할인가의 콘서트 티켓을 발견했다. 급 전투력이 최대치로 상승했다.
남들은 웃돈 주고도 산다는데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않은가. 이건 하늘이 허락한 기회로구나. 비록 이성적인 판단이 잠시 멈춰 선 덕분에 티켓을 손에 쥐고 그제야 스탠딩석임을 알고 매우 당황했지만, 이참에 더 나이 들기 전에 한 번쯤 도전해 보기로 했다.
쓰리이를 설득하고 오케이를 받기까지, 약간은 험난했지만 어쨌거나 성공. 딸의 성탄 발표회는 비록 본 무대는 참여하지 못하지만, 리허설은 맨 앞줄에서 보고 가기로 타결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리액션을 해주는 건 기본이고. 또래 엄마들은 나의 이기적이며 이중적인 모습에 빵 터졌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유 부인을 응원하며 힘을 보태줬다.
이제 곧 잠실로 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너무 신난 티를 내면 서운해할까 봐 최대한 포커페이스로 표정 관리를 하며 유유히 쓰리이와 작별을 고했다. 발걸음은 날아갈 것만 갔았던 건 비밀. 잠실에 모여든 수많은 동지들 사이에 40대 아줌마가 잠입하다니, 미안하다 얘들아. 아무튼 다행히도 대중교통은 물론, 공연 내내 3시간 이상을 서서 충분히 견딜 만큼 아직 내 체력이 죽지 않았음에 셀프 대견. 크러쉬, 덕분에 찐으로 행복했어. 그리고 오랜 시간 떨어져 있어 준 쓰리이에게도 고마움을 전하며.
이사를 앞두고 이런저런 일탈을 누려보니 "서울이 이렇게도 편리하고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기회의 땅이었던 말인가!"라는 생각에 새삼 놀랐다. 이토록 좋은 환경에 살았음에도 더 많이 누리지 못한 게 조금은 아쉬웠다.
아직 강원도민이 되기도 전에 수도권에만 집중되어 있는 문화예술공연 기회에 벌써부터 불만이 쌓였다. 국가통계포털 KOSIS의 자료에 따르면 2025년 6월 기준, 전국 인구의 45%가 서울 경기에 몰려있다고 한다. 이에 비해 강원도의 인구는 고작 3% 수준이라니, 지역 불균형이 확실하다. 당장 영화관 수만 비교해 봐도 서울은 97개, 강릉은 3개(그나마 1곳은 독립예술극장이고, 롯데시네마는 고작 1년 전에 오픈)라는 확연하게 차이 나는 수치를 보며 앞으로 다가올 강릉 라이프라는 미래가 마냥 순탄치만은 않겠구나 싶었다.
아무튼 자청해서 불편함을 선택한 꼴이라 이게 과연 맞는 건가 의구심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다양한 문명의 혜택을 포기하더라도, 얻을 수 있는 게 더 많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품어보며 마음을 다스렸다.
어쨌거나 이제 서울을 떠나도 여한이 없다. 해보고 싶은 거 다 했으니까. 나의 고향 서울이여, 곧 뜨거운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