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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고운 Oct 07. 2022

차라리 바람을 피우던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니까요

"전생에 나라를 구하셨나 봐요!"

"이렇게 아이디어 넘치고 재능이 많은 남편이 있다니, 얼마나 좋아요?"

"어머 어쩜 남편분 패션 감각이 대단하시다! 아내분이 매일 옷이랑 신발 코디 해 주나 봐요?"


가끔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 속은 뒤집어진다.

"아...네...뭐...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표정관리가 영 안되지만 애써 침착하게 적당히 대답을 얼버무리고 황급히 자리를 떠난다. 속으로 이렇게 대꾸하면서 말이다. '네 그렇게 훌륭한 제 남편 빌려드릴 테니 딱 하루만 같이 살아보세요! 아마 생각이 확 달라질껄요?'


억울하게도(?) 남들이 보기에는 꽤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는가 보다. 일단 외모로 보면 나이에 비해 조금은 젊어 보이는 정도? 엄청난 훈남은 아니지만 그냥 저냥 보통이다. (이렇게 얼평을 해버려서 남편에게 미안하지만 글에 객관성을 갖춰야 하니 어쩔 수 없음)


그렇다면 성격은? 좋게 말하면 친절하고, 나쁘게 말하면 오지랖이 넓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다. 누가 교회 오빠 출신 아니라고 할까 봐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서글서글하게 잘 다가가고, 잘 챙겨주는 편이다. 하다 못해 이민 간 사람의 생일까지도 챙긴다. 시차를 고려해서 적절한 시간에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낼 정도이니까.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마주한 각종 사건 사고도 허투루 넘어가는 법이 없다. 내가 볼 때는 굳이 나서도 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상황이라 모른 척 지나가자고 아무리 말려봐도 물불 안 가리고 적극적으로 나선다. 때로는 근처 경찰서에 제보를 하거나 119 신고 전화도 서슴지 않는다.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그렇게 생판 모르는 이웃들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준다. 이렇게 남 챙기기 좋아하는 사람이 정작 배우자에게는 적용이 안 된다는 게 문제.


점심식사의 대부분을 혼밥 하는 나에게 "밥은 먹었어?"라고 따뜻하게 말을 건네는 일은 애석하게도 전혀 없다. 하다못해 언젠가 한번 아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밥은 잘 챙겨 먹는지 안 궁금하냐고 대놓고 물어보니 기껏 한다는 말, "당신이야 뭐 워낙 먹는 거 좋아하니까 알아서 잘 챙겨 먹을 거 아니야. 굳이 물어볼 필요가 있나?"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영 서운했다. 나도 가끔은 입맛이 없거나 너무 바쁠 때 못 먹을 때도 있는데. 단지 식사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배우자에게 관심을 갖고 안부를 살피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남편의 행동이 영 못마땅하게 느껴질 때면 습관처럼 내뱉게 되는 말이 있다. "마누라한테나 좀 잘하시지?" 남편에게 심드렁하게 딴지를 거는 건 꼭 내 쪽이다. 아니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할 필요가 있냐 말이다. 최측근에게 그 에너지를 쏟았으면 얼마나 더 효율적일까 싶은 생각은 내 욕심인건가? 


또한 집콕 보다 어디든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걸 좋아한다. 주말이나 휴일에 집에만 있는 경우는 미세먼지가 최악이거나, 심각하게 몸 컨디션이 나쁘거나 등의 사유가 있을때다. 남들은 주말이면 남편이 소파와 TV와 한 몸이 되고, 여간해서는 밖에 나가려 하질 않아 영 답답하다는데 우리 집은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다. 게다가 동네 공원이나 집 근처 나들이로는 성에 안 차는지 가능한 멀리, 핫플 정도는 찍고 와야 직성이 풀리는가 보다. 아이들과 동해 번쩍, 서해 번쩍하는 모습을 보고 부러워하는 주변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마냥 좋지만은 않다.


물론 나 또한 외향적인 성격이라 새로운 장소에 가보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종종 체력도 달리고 이런저런 비용 지출도 부담스러워서 집에 머물며 쉬고 싶을 때도 있다. 외식도 좋지만 알뜰하게 냉파 요리도 해 먹고 싶고, 쉬엄쉬엄 밀린 집안일도 처리하고, 낮잠도 자면서 유유자적 집에서 뒹굴거리고 싶단 말이다. 하지만 어쩌다 집콕을 하는 날이면 아주 대 놓고 삐져있다. 입이 댓 발 나온 남편의 눈치 보느라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이제 곧 월요일 출근이고, 주말이 이렇게 가버려서 허무하고, 시간이 아깝다는 등 각종 부정적인 말을 내뱉는다. 뭐, 덕분에 아이들이 견문을 넓힐 수 있던 것은 고맙게 생각한다. 아이들은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박물관이고 관광지고 대부분 섭렵했으니까.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온 장소를 봐도 거의 다 가봤던 곳이니,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돌아다녔는지를 체감한다. 하지만 때로는 휴식도 필요하다는 걸 좀 알아줬으면 한다. 그리고 집 나서는 순간 돈 쓸 일이 한 둘이 아니지 않던가?


게다가 남편은 매사 빠릿빠릿한 탓에(별명: 엉가-엉덩이 가벼운 사람) 주일 설교 말씀이고 회의 내용이고 바로바로 요약해서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편이다. 외식을 할 때도 밑반찬 리필은 물론이고, 포크가 필요하다, 앞접시가 필요하다는 등 아이들의 요구사항도 재빨리 척척 해결해준다. 하지만 이 또한 단점도 있다. SNS에 아이들과 주말을 보낸 내용을 동영상을 뚝딱 편집해서 거의 실시간으로 혹은 최소 하루가 지나기 전인 당일안에 기어코 업로드를 하고야 만다. 덕분에 언제든지 추억을 되새길 수 있어서 좋은 점도 있지만 편집은 조금 미뤄두고 아이들과 눈이라도 한번 더 마주쳐주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 아이들이 보는 남편의 모습은 핸드폰 만지는 모습뿐이니까.


중고 거래도 아주 달인 중의 달인이다. 대부분의 아이템은 본인의 옷이나 신발이다. 브랜드 의류나 신발을 제 값의 반도 안 되게 득템 하는 재주가 있다. 그건 인정한다. 수많은 택배 거래로 편의점을 얼마나 자주 드나드는지, 거의 매일 출근 도장을 찍다시피 한다. 아니 그렇게 남아도는 에너지와 시간을 집안일 돕는데 사용하는 건 어떨지? 이런 남편의 쓸데없는 부지런함을 영 못마땅하게 여기는 내가 이상한 건가?


이렇게 하이텐션만 쭉 지속되면 차라리 낫겠다 싶다. 문제는 유리멘탈이라는 점. 그래서 늘 기분이 극과 극이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 마냥 오락가락하다 보니 나도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뭐가 진짜 남편의 모습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어떻게 보면 모드 전환이 잘 안 되는 타입인 것이다. 특히 회사 업무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초 예민해진다. 나도 사회생활을 10년은 해봤기에, 그래서 더 이해가 안 된다. 기껏 정성 들여 차려준 저녁밥을 먹고 내게 보이는 놀라운 대답은 "잘 먹었어!"가 아닌, "체할 것 같아.”, “괜히 먹었네.”라는 황당한 사실. 참으로 기운 빠진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먹질 말던가...)


입과 귀를 닫아버리고 인상을 팍 쓰면서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가 있을 때면 차라리 안 마주치는 게 나을 때도 있다. 또 땅이 꺼질듯한 한숨은 왜 이렇게 자주 내뱉는지… 아무 말도 안 한 채 입은 굳게 닫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상태가 계속되다 보면 식사시간마저 살벌하다. 짧게는 하루로 끝나지만 어쩔 때는 이런 상태가 2일, 3일 가기도 한다. 진심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저기... 미안한데, 회사에서의 그 부정적인 감정 말이야, 집에 와서는 좀 끊어주면 안 될까?" 


물론 본인이 제일 힘들고, 오죽하면 그럴까 싶긴 하다. 이해해보려고 나도 애써 노력한다. 그러다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도 아이들도 피해자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니 이 세상에서 오직 당신만 직장생활 하는 거냐고! 무슨 벼슬도 아니고! 어느 순간 스멀스멀 분노의 감정이 차오른다.


"우리 아빠는 안 그랬다고!" 결국 폭발하고 마는 건 항상 또 나다. 친정아버지는 항공사 기장이라는 직업 특성상 본인이 통제할 수 없는 자연 현상(폭우, 바람, 천둥번개 등)은 물론이고 수많은 돌발 상황(항공기 고장, 기내 난동, 응급환자 발생, 폭발물 설치 제보 등)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셨다. 이럴 때 마다 수백만명인 승객들의 안전(생명)을 본인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셨다. 이런 극한 정신적 노동에 시달리며 밤새 장거리 비행을 마치고 집에 오셔도 웬만해서는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수십년 동안 반복되는 평가와 시험을 통과하셔야 했고, 까다롭고 엄격하기로 소문난 신체 검사도 재검사 한 번 없이 정년퇴임까지 무사 통과하셨다. 늘 이를 염두하고 평소에 건강 관리를 철저하게 하신 덕이다. 정신력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분야에서 그야말로 ‘자기관리 끝판 왕’ 이셨다. 밤낮이 바뀌는 시차 적응이 일상이고, 장거리를 오고 가며 때로 피곤함에 찌든 아빠의 모습을 보기도 했기도 했지만 최소한 본인이 일 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나 짜증나는 감정을 가족들을 대하는 부정적인 태도로 연결되지 않았다. 일은 일이고, 가족은 가족이고, 공(公) 사(私)의 확실한 구분이 당연한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 아빠가 몸도 마음도 얼마나 건강하셨던 건지, 또 그러기 위해 얼마다 부단히 노력하셨는지 깨닫게 된다.


아무튼 다행인 건 남편이 요새 운동에 재미를 붙여 한강공원 조깅을 하며 나름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집에서 서로 부딪치고 싸우느니 운동하며 건강을 돌보는 편이 백배 낫다 싶다. 나도 세월이 지나다 보니 이제는 어느 정도 해탈 단계에 이른 듯하다. 남편의 감정에 따라가며 같이 까칠해지지 않고, 그냥 그려려니 하면서 마음을 다스린다.


또 하나, 종종 대화를 할 때 상식적이지 않은 반응을 보인다. 예를 들면, "여보, 커피 마실래?"라고 물어봤을 때 보통은 "응 나도 한잔 줘." 혹은 "아니, 지금은 커피 안 마시고 싶네." 뭐 이 정도가 아닐까? 하지만 남편은 "(한숨을 크게 쉬며)어 그럴게."라는 YES도 NO도 아닌 아주 기분 나쁜 이상한 답변을 한다. (무슨 벌칙 수행도 아니고…). 아주 묘하게 사람을 미쳐버리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같은 말도 해도 참 얄밉게 할 때가 너무 많다.


어쨌거나 위와 같은 행동은 어찌 보면 별 것 아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내 입장이기에 남편 역시 이런 행동과 말을 하는데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는, 즉 양면성이 있기에 무작정 다 별로 라는 말은 아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법에 위배되거나 사회 질서를 해치는 일은 결코 아니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도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사람이 나랑 함께 사는 내 남편이라는 것. 이 사람, 참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드는 궁금증, 법적으로 이혼 사유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



민법 제840조(재판상 이혼원인) 

부부의 일방은 다음 각호의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가정법원에 이혼을 청구할 수 있다.  

<개정 1990. 1. 13.>

1. 배우자에 부정한 행위가 있었을 때

2. 배우자가 악의로 다른 일방을 유기한 때

3. 배우자 또는 그 직계존속으로부터 심히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4. 자기의 직계존속이 배우자로부터 심히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5. 배우자의 생사가 3년 이상 분명하지 아니한 때

6. 기타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



"아 이거 뭐야! 젠장, 하나도 해당이 안된다니!" 


실망감이 컸다. 다행이라며 안도해야 하거늘, 나는 왜 또 이렇게 극대노를 하고 있는 걸까? 6번의 '중대한 사유'에 해당하는, 그러니까 지속적으로 경제력이 없다거나, 외도를 했다거나, 주식이나 비트코인에 손을 댔다가 홀라당 말아먹었거나, 도박이나 마약에 빠져있다거나. 알코올 중독이거나, 폭력이나 폭언을 행사한다거나, 거액의 비상금을 횡령한다는 등 그야말로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중대한 사유를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의 내가 가진 남편의 사소한 불만사항으로는 감히 비할 바가 아니라는 뜻이다.

 

답답한 심정에 남편과 말다툼 끝에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바람을 피우던가!"

 

분명 내 속은 터질 것 같은데,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거나 법적으로 구속할 만한 중대한 사유는 하나도 없다. 아, 이게 말이 되느냐고!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나쁜 사람은 아닌데, 근데 그렇다고 또 착한 건 아니란 말이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난다.

 

결론은 이 사람은 나랑 잘 안 맞나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점도 많은 사람인 건 또 맞다. 그래, 따지고 보면 나도 부족한 게 많은 사람인데 상대방을 비난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남편을 흉보는 일은 곧 ‘누워서 침 뱉기’이니까. 기껏 구구절절 글을 써 놨지만 결국은 또 이렇게 내가 완패 당하는 기분이 드는 건 대체 뭔지.


아무튼 중년의 부부에게는 적당한 거리두기가 필요한 것 같다. 너무 기대하지도 말고,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도 말고 너무 좋아하지도, 너무 미워하지도 말고 그냥 저냥 적당히. 여기에 적당한 무관심도 곁들여야겠다. "오늘도 무사히"라는 구호를 외치며, 앞으로도 잘 버티는 수밖에. 이러다 보면 세월이 지나 나도 남편도 각자의 자리를 찾아 서로 부딪치지 않는 중간 지점을 찾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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