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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석이 Mar 23. 2021

출근해서 술 깨는중입니다.

복학생 짧은 일기.

21.03.23


어제 혼자 아닌 혼술을 한잔 했더니 아침 근로 출근부터 고역이다. 간밤에 먹은 만두속을 변기통에서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이 고통의 끝일 줄 알았는데. 간밤 사이 세 번이나 물 부족으로 손을 벌벌 떨면서 자다 깼고, 아침에 독 덩어리가 가득한 응가를 하고서는 좀 괜찮아졌나 싶었는데. 상황이 좋지 않다.

출근하면 물통과 가습기에 물을 채우고 선생님들이 하루 사이 쓰신 집기들을 설거지하는 게 나의 첫 임무인데 설거지하다 두 번 정도 컵을 쥔 손에 힘이 갑자기 빠져서 그대로 컵을 박살 낼 뻔했다. 그리고 쓰레기통을 비우고서 정수기 물 뜬다고 옆에 잠깐 놔뒀는데, 정수기 물 떠먹은 종이컵을 거기다가 버리고 그냥 들어왔다.

나는 원래 땀이 많아서 4계절 내내 땀을 뻘뻘 흘리는데, 약을 제때 챙겨 먹지 않으면 땀이 더 많이 나서 주변에서 걱정할 정도가 되고, 술을 먹으면 다음날 술 깨는 내내 땀을 줄줄 흘리는데 지금, 이 모든 경우의 땀이 흐르고 있다. 내가 퇴근하고 선생님들이 내 체질이나 지병 여부에 대해 이야기 꽃을 피우셔도 무죄다. 선생님들 무죄.


이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다니. 그러면서도 아직 술이 덜 깼는지 전공 과제를 뒤로하고 이 발랄한 상황을 브런치에 글로 싸지르고 있다. 나는 이제 위로도 아래로도 손으로도 똥을 쌀 수 있다.


이렇게 숙취에 시달리는 동안은 우울증이고 나발이고 생각나지 않는다. 빨리 속이 편해졌으면 좋겠다는 살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면 그 어느 때보다 내 호흡과 몸상태, 기분 같은 명상적 요소에 강하게 집중할 수 있다. 지금 정신과나 상담센터에 가면 대답 잘할 수 있을 듯. 현석 씨 지금 상태나 기분은 어떠세요? 네 선생님, 지금 저는 식도와 위가 연결되어있는 그 언저리쯤이 범람할 듯 말 듯 한 위험한 상태이며 저의 있으나마나 한 사회적 위치와 지위를 지키기 위해 식도에 힘줘서 이 역류를 막고 있습니다. 지금 기분은 굉장히 언짢고 불편합니다.  이 불편한 기분을 멈추기 위해 뇌에도 한번 힘줘 볼까요?


예전에 알코올 중독이었던 때가 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잘 때까지 맨 정신으로 깨있기가 너무 힘들어서 꾸준히 알코올을 섭취했었다. 주종도 가리지 않았다 맥주, 소주, 막걸리, 보드카, 위스키... 그냥 알코올이 함유되어 있는 음료는 뭐든 상관없이 잘도 마셨었고, 돈이 생기면 무조건 술부터 사서 냉장고에 채워두고는 그날 바로 냉장고를 비우는 과정을 꾸준히 반복했다. 술 마시고 나서의 그 얼큰하고 뜨끈한 안도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늘 불안한 내 정신은 술을 마셨을 때 온전한 것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맨 정신으로 있을 때는 늘 술 마실 생각만 했던 것 같다. 혼자 지낼 때도, 커밍아웃을 위해 집에 내려가 시골에서 지낼 때도 술이 늘 필요했고 그만큼 늘 술을 달고 살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제는 술이 들어가면 안도감 같은 게 느껴지기 전에 속이 먼저 울렁거리고 불편하다. 술을 조금 마시던 많이 마시던 깨는 과정 또한 굉장히 고통스럽다. 이건 경영학도의 입장에서 분석해 봤을 때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에 따라 음주로 발생하는 효용이 0에 수렴한 듯하다. 쉽게 말하면 먹을 만큼 처먹어서 더 이상 효과가 없어져 버렸다는 이야기다.


술. 징그러워라. 참 많이도 먹었다. 학교 처음 입학했을 때 선배들이 트럭 지나가는 걸 보면서 저 트럭 세네 대만큼 술을 먹었을 것이라며 우수와 회한이 섞인 눈빛을 하곤 했었는데, 나는 그게 구라인 줄로만 알았으나 결국 그건 내 이야기가 되었고 나는 이제 술을 당분간 못 먹을 것 같다. 나를 지금 너무 괴롭게 하는 어제의 술이 오늘 내 삶에 대한 의지를 확인시켜주고 있긴하나,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충분히 알고 예상할 수 있으면서도 또 반복할 필요가 있을까? 그건 인간이라는 고등생물로서의 존엄에 대한 어떤 도전이 아닐까? 그러니 이 짓거리를 또 반복한다면 나는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누릴 자격이 없으며, 지나가는 개미나 개, 고양이에게 사람들이 느끼는 연민과 관심 정도가 나에게는 적당, 아니 차고 넘칠 것이다.


어떤 깊은 사유와 고찰 없이 몸으로 직접 해선 안될 짓이 무엇인지 배우는 건, 가장 무식하지만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방법인 것 같다. 오늘도 또 하나 배웠다. 내가 또 이렇게 술 마시면 개다. 개. 우리 집 진수야 미안해. 아빠가 또 술 마시면 니가 아빠 해. 술 얘기를 자꾸 하니까 견디기가 힘드네. 나 화장실 간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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