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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깨는 현석이 Apr 01. 2021

혐오스런 김현석이의 하루.

복학생 짧은 일기.

21.04.01


키보드. 주름마다 허옇게 튼 지저분한 손가락. 부디 오늘 저녁 내 마음을 좀 구원해보소서.







"..... 해서 끝났어요 저희."


"네?"

김현석이요-라고 말하는데 나랑 거의 동시에 말씀하셔서 뭐라고 하시는지 잘 못 들었다.


"저희 50분까지는 원래 받는데 환자가 너무 많아서 접수가 끝났어요... 죄송해요.. 이제 접수를 못 받아요. 좀 일찍 오시지 그러셨어요, 여보세요?"

"끝났어요 저희."

프론트에 앉아 계시던 선생님이 전화를 받으시자 다른 선생님이 약제실에서 나오셔서 좀 더 단호하게 다시 한번 말해주셨다. '늦어서 진료를 못 받으면 어쩌나' 같은 걱정을 조금도 하지 않고 온터라 많이 당황스러웠다. 아직 진료 끝날 때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는디..? 머리가 하얘졌고 잠깐의 불편한 눈 맞춤과 함께 정적. 다급 해지는 마음에 물어보지도 않은 엉뚱한 말이 나왔다.


"저 학교 수업 끝나자마자 바로 왔는데..."


"네, 근데 오늘 저희가 환자가 너무 많아서 30분까지 못 끝날 것 같아서, 접수 못 받고 있어요. 앞에 분들도 다 돌아가셨어요."


"... 저 근데 오늘 밤에 먹는 약이 없어서요.."


"아.. 네.. 그런데 저희가 지금 환자를 못 받아요, 죄송해요. 내일 다시 오셔야 되세요."


"..."


"..."


다시 정적.


약이 떨어져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가 일을 치를 뻔했던 지난밤들이 스치며 그려졌다. 아. 역시 절대. 절대 안 된다. 나는 오늘 밤에 먹을 약이 꼭 필요하다. 특히나 오늘 같이 구질구질하고 꼬인 날에는 특히 더 그럴 예정이므로 조금 더 필사적이게 된 마음으로 다시 구걸. 거의 빌기 시작했다.


"저 오늘 약을 못 먹으면 잠을 못 자서요..."


"네 그런데 지금 저희가 접수가 끝났어요. 죄송해요."


"저 근데 내일은 이 00 선생님 계세요? 안 계신다고 오늘 오라고 해서 왔는데..."


"네, 내일은 이 00 선생님 안 계시고, 원장님만 계세요."


"그럼 다른 선생님인데 진료받을 수 있어요?"


"네, 뭐. 받으실 수 있어요. 내일 오세요."


"그럼 혹시 그냥 약만 받아가면 안 될까요..?"


"죄송한데 그러니까 그게 안돼요. 저희도 참.. 어쩔 수가 없어요."

"저희 지금은 환자분 접수를 못 받고 있어요. 환자분 너무 많아서 지금 받을 수가 없어요. 오늘은 진료 못 보세요."

전화를 받으시던 선생님이 전화를 끊고 아까보다 조금 더 단호한 분위기로 말하셨다.


"그럼 저 끝날 때까지 혹시 모르니까 기다려만 보면 안 될까요..?"


"죄송해요, 지금은 진료를 보실 수가 없으세요."


그 뒤로도 비굴하고 구질구질한 구걸이 조금 더 이어졌고, 선생님들도 지치시는 것 같았다. 당황스럽고 억울한 마음보다도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기분이 발끝부터 천천히 뭉게뭉게 올라왔다. 동네에 있는 병원 치고 꽤 넓은, 차고 하얀 대리석이 깔려있는데 벽도 하얘서 더 차가워 보이는 정신과 병원 대기실에는 군데군데 인위적인 따뜻한 조명과 화분이 놓여있었고, 거리두기 때문에 소파에 빼곡히 앉지 못하는 걸 감안해도 꽤 많은 사람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루한 기다림을 견디던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씩 프론트로 모이는 게 느껴졌고, 나는 여기서 더 구걸하다가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이 사람들에게 마저도 중증에 구제불능 진상 환자로 여겨질까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그럼에도 창피함을 무릅쓰고 이미 했던 대화를 몇 번 더 반복하고서는, 결국 억지로 발길을 돌려 병원을 나왔다. 죄송하다 말하고 다시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약제실로 들어가는 두 선생님도 내가 들어왔을 때 보다 훨씬 더 지쳐 보였다.



창피하기도 억울하기도 한 마음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병원에서 일하는 누나 생각이 났다. 나 같은 사람 때문에 진저리가 나겠지. 내가 저 사람들의 하루를 망쳤을까. 하지만 나는 약이 없으면 안 되니까. 절대로 진상 환자 행세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더 절대로 절대로, 나는 오늘 밤 약이 꼭 필요하다. 나 같은 사람은 그럼 어떡하라고. 그냥 진료 못해요- 하면 단가? 화가 나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선생님들의 탓이 아니다. 그저 하루 일과를 다 마치고 온 사람들이 진료를 요청하기에는 작은 정신과 병원에 너무 많은 환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맞아. 내가 좀 일찍 올걸. 5분만 더 일찍 올걸. 내가 늦게 왔으니까. 내가 조금만 일찍 왔으면 됐는데. 그런데 화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아니 근데 내가 늦게 와서 그렇다고? 6시 30분까지 진료한다고 문에 왜 쳐 붙여 놨어 그럼. 디지고 싶은 건가? 나는 수업 끝나자마자 바로 왔는데. 오는데 5분도 안 걸렸구먼 X발 XX 들아. 아픈 사람만 존나 손해라니까 이거. 억울해도 어째 아쉬운 사람이 을 인디. 자본주의 사회에서 늦은 시간에 서비스받으려면 돈 더 내야지 뭐. 진짜 개 빡친다 XX..  그리고는 어쨌거나 당장 내가 갇혀있는 이 막막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며 걱정을 하기 시작한다. 오늘 밤은 진짜 어떡하지. 무슨 약 처방받는지만 이라도 알아내서 다른 병원이라도 가야 되나. 어쩌지. 어떻게 해야 돼. 근데 지금 다른 병원 가려면 택시를 타야 되는데 택시를 타면 병원비가 없다. 그럼 또 집에 전화해서 구걸을 해야 한다. X발 하루 종일 구걸, 사과, 해명만 하네. 오늘 진짜 왜 이러냐. 아... 꽃 같아... X발 진짜.... 아니다. 그래도 화내면 안 돼. 화난다고 막 화내기 시작하면 얼마 안 가서 제풀에 또 이상한 림보 같은 곳으로 빠져서는 결국 또 질질 짜면서 누워서 아무것도 못하게 될 거다. 그것도 이젠 죽을 만큼 싫다. 그래. 괜찮다. 실은 집에 약이 있다. 예전에 받아놓은 한포에 7알짜리 항우울제가 집에 있다. 먹으면 다음날이 망가지지만. 반 정도만 먹으면 그래도 버틸 수 있지 않을까. 내일 하루를 통째로 망치진 않겠지. 억울했다가 마음 넓은 척 이해하려 했다가, 못해서 화가 났다가, 그리고는 겁이 났다. 내 마음이 제일 무섭다.


무서운 마음에 집에 전화했지만, 별 수 없었다. 그냥 엄마 마음만 상했겠지. 엄마도 지친 것 같았다. 요즘엔 웃다가도 내가 지금 웃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며 울먹이던 목소리가 생각났다. 세상에. 나는 왜 걱정하고 상처 받을 남의 마음은 꽃도 신경 안 쓰고 지금 꽃 같은 내 마음밖에 모르는 소갈딱지 일까. 쓰레기. 그런데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다. 3년 전쯤 내 상상 속에서 28살 김현석은 진짜 괜찮은 사람이었다. 잘 나가고 말고를 떠나서 진짜 괜찮은 사람. 지금은 엇비슷한 흉내도 못 내고 있지만.


지금까지 이야기한 일은 그래도 내가 막 잘못한 건 아닌 편이니까 당장 억울하고 분하긴 하지만, 괜찮다. 천하의 죽일 놈들 인양 병원을 욕하면서 억울해하고 분해할 예정이라서 괜찮다. 그런데, 이 일이 있기 바로 직전까지는 순도 100% 나의 잘못으로 일어난 사건들이 좀 있었다. 그냥. 능력과 역량의 부족이 원인인 그런 일. 바람직하고 괜찮은 마음가짐 같은 것도 사람 역량으로 친다면 뭐 그런 일. 그래서 도대체 이 무능하고 무력한 시간들이 끝나긴 할까, 아무리 나라도 이제는 좀 발전했어야 되는 거 아닐까 이런 생각들을 계속했다. 이게 뭐 또 자랑이라고 조리 있게 말하지도 못할 거면서 구구절절 또 글로 써서 쳐 올려 쌀까.


나도 지금 내가 평소보다 자기 파괴적이고 염세적이고 우울하고 쫌 그런 거 알고 있다. 안 그런 날에는 꽤 괜찮게 굴 때도 있으니까 너무 미워하진 말자. 뻔뻔하지만 가진 게 나밖에 없어서 어쩔 수가 없다.

아니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러고 병원을 나와서 집으로 오는데 진짜 나밖에 없더라.


이렇게 파괴적인 날엔 기가 막힌 노래라도 들어야 좀 살 거 같길래 노래를 들으려는데, 생각나는 노래가 옥상달빛 '수고했어 오늘도' 밖에 없는 거라. 이런 직관적이고 긍정적인 응원 지금은 영 아닌데.. 싶었지만 별달리 다른 생각도 안 하고 싶어서 노래를 귀에다 주사하듯 급하게 꾸역꾸역 듣는데 웃음이 났다.


'너의 슬픔에 아무도 관심 없대도- 나는 늘 응원해-'


노랫말 속, 아무도 관심 없는 내 슬픔을 응원하는 당신은 누구시고 지금 어디 계시는 걸까. 그리고 왜 다짜고짜 반말하는 걸까. 응원할 거면 지금 소주나 한병 사들고 집으로 와줬으면 좋겠다고 배배 꼬인 생각을 하며 구석에 가서 담배를 피우는데, 퇴근시간이 되니까 길거리에 차랑 사람들이 엄청 많이 막 바쁘게 지나갔다. 이 사람들 전부 다, 아무리 못해도 지금 내 마음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누구한테도 위로받을 일말의 여지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랫말 속 화자가 정말 지금 전부구나.


별 수 없지 뭐. 그래서 그냥 계속 노래를 들었다. 내 슬픔에 관심 가져주는 사람이 옥상달빛뿐이라니. 별 다른 수가 없이 계속 노래를 들었다. '너의 슬픔에 아무도 관심 없대도- 나는 늘 응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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