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12 해외살이 팔자 승무원

by 구작

승무원을 준비하던 너를 영어스터디에서 만났다

너는 외항사 승무원이 목표였고 준비한 지 3년째였다

무슨 고시 준비하냐고 하겠는데 최종면접까지 3번이나 간 너였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

우리가 친해지고 술자리에서 좀 더 가까워졌을 때 너는 국내는 외모 기준이 높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TV에서나 승무원을 볼 수 있었던 나였기에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얼굴에 티내지는 않았다


너는 웃는 게 예뻤다. 웃을 때 초승달처럼 휘는 눈이 역시나 초승달처럼 가늘고 진하게 빠진 눈썹과 어울렸다

그런 웃음이라면 땅콩마니아도 네 얼굴에 접시를 던질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막 어느 나라 외항사 최종에서 또 떨어지자 너는 승무원 단골이라는 압구정 점집에 스터디모임 2명과 같이 다녀왔다

단명 팔자도 씹어먹을 청춘이었지만 거듭된 실패에 이단종교라도 찾아갈 마음이었겠다

너는 거기서 희망을 보고왔다

점쟁이는 셋 중 네게 가장 힘주어 말했다고 한다

"바다 건너 살 팔자야. 적어도 자주 바다 건널 팔자야. 더 해봐. 될 거 같아"


점괘를 보고온 후 두어달이 지난 가죽자켓을 입을 때였다.

스산한 바람이 홍대의 빈 거리를 쓸고 가는 저녁시간에 나는 작은 외항사 사무소 앞에서 면접을 보는 너를 기다렸다. 여느때처럼 너는 환하게 웃으며 나왔고 뒷풀이를 위해 술집으로 가는 길에 면접 후기를 읊었다. 표정과 달리 네 목소리에는 떨림이 남아있었다.


같은 모임 둘 중 하나가 그 면접에서 붙어 두바이로 떠나게 됐다

그녀는 준비 2년차였고 네게 늘 "넌 분명히 될 거야!"라고 응원했었다

너는 그 소식을 담담하게 전했지만 그날 밤 술기운 덕인지 너는 내내 울면서 그녀를 응원했다

그녀가 너의 합격을 덜 확신했더라면 너는 그렇게 서럽게 울지 않았을까?


12월이 되자 그 해의 시험이 모두 끝났다.

너는 부모님 볼 면목이 없다며 영어학원에 취직했다. 그래도 꿈을 포기 하지는 않았었다. 점쟁이는 내년까지 해보라고 했으니.

너는 거기서 원어민 강사와 친해졌다. 해외에 대한 갈망을 대리만족할 수 있는 대화상대였으니까

그 연말, 너는 평소보다 더 자주 술을 마셨고 더 자주 취했다

나는 잦아지는 너의 취한 목소리를 마냥 들어줄 수 없었다. 넌 취할 때 너의 트레이드마크인 눈썹을 잃었다

취해서 웃는 너의 눈가에는 더 주름이 졌고 눈썹은 흐트러졌다. 목소리는 흐렸고 네 입에서 나오는 미래에 대한 초점도 옅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너는 내게 실망했냐고 물었다. 나는 답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너는 영어학원에서 이벤트를 했고 뒷풀이를 길게 가졌다

우린 크리스마스 오후에 만났고 이브의 숙취는 우리 데이트에도 이어져 흐리멍텅한 시간을 보내게 됐다

우리와 달리 세상은 화려한 조명과 흥쾌한 캐럴로 반짝였다

크리스마스는 내 생일이기도 했다


연말을 앞두고 너는 학원에서 해피뉴이어 이벤트를 한다며 다시 바빴다. 또 술이 이어졌다. 또 원어민과 같이 했다

30일 즈음이었나 밤 12시가 넘어 내게 전화했다

술자리는 끝나고 다른 쌤이랑 둘이 먹는다고 했다

"누구?"

-그 원어민 쌤

"어디서?"

-그 쌤 집에서.

"......"

-아! 걱정 마 오빠. 나 취하지도 않았고 우리 얘기만 하고 있어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계속 얘기했다.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자기의 진심을.


이런저런 연인들이 겪는 권태와 오해와 해명과 상심과 실망을 일주일 여 반복한 후 우린 헤어졌다

그녀는 억울해했고 나는 후련했다

배신감에 그녀를 내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두려웠다. 그녀의 현재가 무서웠다

미래에 겁내하는 그녀를,

내게 의지하려는 그 마음을,

그러면서 새로운 위안에 익숙해지는 그 단순함을,

바다 건너란 운명을 더 믿으려는 그 열정을.


3월, 개나리가 피던 때였다

그녀가 전화해왔다

안부를 묻고 근황을 묻고 자신의 현재를 전했다

3일 후에 미국으로 원어민과 떠난다고 했다

가서 결혼을 하고 거기서 살 거라고 했다

홀로 남는 어머니께 미안하지만 운명인 것 같다고 했다

영상통화로 인사한 시부모님의 인상이 좋았다고도 했다


그해 12월쯤,

나는 난생처음 해외여행을 계획했다

첫 여행지로 뉴욕을 선택했다

그녀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그때 나 또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있었고 그간 그녀 생각은 전혀 나지 않았었다

또래에 비해 늦은 첫 해외여행지로 뉴욕을 선택하면 한번에 전세를 역전할 것 같다는 비보같은 경쟁심이 있었다

뉴욕의 싼 한인숙소와 관광지 그리고 브루클린 재즈바 같은 내 취향의 몇몇 스팟을 찾아 열심히 온라인을 뒤졌다

현지 정보를 찾기 위해 구글링을 하다가 한 티스토리를 봤다

한인 여자가 시카고 이민 생활을 정리하고 있었다

자기 사진은 없지만 글에 충분히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익숙한 말투가 보였다

"가장 진실한 친구는 술이죠"

"매운 걸 먹기 전에 쏘맥은 마중물이예요"

"습관적으로 하늘을 봐요. 그럼 꿈이 보여요"

티스토리 주소 url을 확인했다

맞다 그녀다

클레오도 아니고 클라우디아도 아닌 cl로 시작하는 이름

그 이름을 부르면 자동으로 웃게 돼서 좋다던 그 닉네임

그 이름이 url 창에 박혀있었다


너는 네가 좋아하는 날씨의 마을에 남편과 부모님과 살고 있었다

작은 정원이 있는 2층 집이었고 시댁 부모님은 네 말대로 인상이 좋아보였다

큰 개를 키웠는데 웃는 얼굴이 너를 닮았다. 네가 골랐겠지

너의 모습은 오토바이 휀다에 비친 뒷모습이 다였다

넌 주말이면 남편과 그걸 타고 교외 작은 호수를 가는 걸 좋아한다고 한다


일년여 동안 100여개의 포스팅을 했네

거기 사는 재미가 좋은가보다

20여개의 글을 읽다 창을 껐다. 잘 살면 됐다


15년 즈음 지난 작년, 나는 길을 가다 어느 여인을 보고 네가 떠올랐다. 다시 그녀 얼굴을 보려했지만 총총히 멀어졌다

마스크 위 눈썹이 초승달이었고 뛰듯이 걷는 뒷모습이 영락없는 너였다. 네가 즐겨입던 주름치마도 공교롭게 같았다

네게 미안하지만 나는 네가 미국에 오래 못 살 거라 생각했다. 너는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것만큼 안에서 사랑받길 원하는 아이였으니까. 어디서든 행복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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