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계일학은 너의 외모로 만들어진 별명이 아니었다
너는 학처럼 고고했다
캠퍼스의 봄을 꽉 채운 개나리와 벚꽃처럼 스무살둥이들이 재잘거릴 때 너의 입은 좀체 열릴 줄 몰랐다
가늘고 긴 몸, 하얀 얼굴, 붉은 입술, 깊은 눈과 동그란 귀는 조물주가 학을 사람으로 빚을 때 필요한 재료로 보였다
전공 과목에서 우린 같은 조가 되었고 조모임을 핑계로 우린 밥도 같이 먹고 술자리도 같이 참여했다
넌 밥은 반공기만 먹었고 국물을 마실 때 소리도 없이 삼켰다
반공기 밥을 다 먹으면 공기의 뚜껑을 닫고 넌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한 모금의 물이 네 목을 타고 넘어갈 때, 네 울대가 위아래로 살짝 흔들렸을 때 난 사랑에 빠졌다
전공수업이 여러 개인 날에는 나는 너의 무거운 가방을 들어주었다
학식을 먹을 땐 너 대신 줄을 섰다
교양수업 과제는 내 과제보다 네 과제에 더 공을 들였다
역에서 학교까지 같이 가기 위해 아침마다 캔커피를 사들고 기다렸다
술자리에서 치근대는 선배가 있다면 버르장머리 없이 대들었다
주말에도 너를 따라 미술관에 갔고 맛있는 커피를 파는 카페를 찾아갔다
방학에 우린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연히 같은 곳이었다
따라서 나는 게이들이 알바한다고 소문났던 민*레영토에 가서 앞치마를 둘러야했다
불특정 다수가 찾아오는 영토에서는 매일 전쟁이 벌어졌다
너의 눈에 들려는 숫놈들의 이글거리는 눈빛과 그 눈빛을 경멸하는 냉혹한 나의 눈빛이 시간 별로 전투를 벌였다
나의 눈빛은 숫놈들의 구애에 무심했던 네게도 향했지만 나의 질투에도 너는 무심했다
처절한 두 달 전쟁을 마치자 나는 패잔병이었다. 내 속은 너덜너덜해졌다
개학을 앞두고 난 네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연인의 이별 통보에 너의 표정은 알 수 없었다. 네가 먹고싶어하던 점심메뉴를 남친이 싫다고 한 것을 들은 표정 정도였다
네가 답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취소했다. 사실 헤어지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으니...
너는 별 말 없이 웃었고 그날 우린 첫키스를 했다
집앞에서 헤어질 때 너는 말했다. "다신 그런 말 하지 마."
넌 웃으면서 말했지만 나의 심장은 얼어붙었다
2학기는 1학기보다 쉬웠다. 했던 것을 다시 하면 그만일 뿐이었다
나는 너의 가방을 들어줬고 너 대신 줄을 섰고 네 과제도 책임졌고 항상 네 옆을 지켰다
우린 공부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새내기에게 강요되는 온갖 모임에서 멀어져 우리 둘만의 세상을 즐겼다
술집에는 발길이 뜸해졌고 도서관은 강의실보다 더 자주 찾았다
동기들이 전공서적도 겨우 볼 때 우린 영어공부를 했다
남자들이 당구장과 이제 갓 생긴 PC방에서 밤을 샐 때
나는 너와 심야영화를 봤고 서울의 오래된 길을 걸었다
스산한 계절이 찾아오자 우린 더 가까이 붙어다녔고 너는 내 주위의 모든 시시한 것들을 재단했다
마치 온실 속에 화초를 놓고 노랗게 바래거나 웃자란 잎을 가위로 싹둑싹둑 자르는 것 같았다
내 몸에 꼭 맞는 옷은 아닌 듯 했지만 기분 좋았다. 미국드라마에서 아이비 대학생들이 입는 폴로옷을 입은 듯 했다
난 뿌듯했고 즐거웠으며 너를 에로스를 넘어 플라토닉, 아가페로 사랑하게 됐다
그렇게 나는 너를 세상 사람들이 아는 사랑보다 더 크게 사랑했고 그렇다고 자부했다
평생 너만 사랑할 자신이 있었고 또 그러고 싶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선물을 준비했다
생전 가본 적 없던 백화점에서 알이 작은 목걸이를 샀다
너는 크리스마스에 가족과 함께 보낸다고 했으니 24일 점심에 만났다
붉어진 볼을 하고 네게 선물을 내밀자 너는 받지 않고 웃었다
"우리 헤어지자"
네 입에서 나온 말이었는데 서너발 떨어진 가게의 스피커에서 나왔을 거라 생각하고 그 가게를 올려봤다
다시 네 눈을 봤으나 너는 여전히 웃었다
지난 3월 닭들 속에서 학처럼 머리를 높여 웃던 그 작은 웃음이었다
나도 웃음이 나왔다
"헤어지자고" 웃음을 거두고 너는 다시 말했다
가게 스피커에서 아비규환이 터져나왔다. 내게는 분명 그렇게 들렸다
너는 이별의 이유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다
나는 그 이유들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스피커의 아비규환이 내 머리속을 뒤집어놨다
얼핏 귀에 박힌 그 이유들에 나는 없었고 너만 있었다
"우리가 헤어지는 게 말이 돼? 우리 어제까지만 해도 웃고 있었잖아
아니, 난 우리가 싸운 기억도 없어. 최근에 네게 혼난 적도 없어. 근데 우리가 어떻게 헤어질 수가 있어?"
너는 다시 천천히 이유를 설명했다
"나도 성인이 됐으니 연애라는 걸 하고 싶었어. 네가 다가왔고 나쁘지 않아서 사귀었어. 하지만 일년 해보니 시시해. 연애도 남자도 관심이 없어졌어. 혼자 더 재미 있게 알차게 살 수 있을 것 같고 그게 더 값진 인생 같아"
"그걸 어떻게 하루 아침에 깨달아?"
"아냐. 오래 됐어. 아니 거의 시작부터였을 수도 있어"
"근데 왜 내가 잘해줬어? 공부도 시켜주고, 옷도 사주고, 언니도 소개시켜주고... 왜 잘해준 거야?"
"그냥.. 남들 하는 건 다 해보고 싶었어"
그렇게 너는 떠났다
너는 나를 인생의 가장 황홀한 높이까지 끌고 가서 놔버렸다
나는 낙하했고 그 높이의 중력 크기만큼 부서졌다
-넷플 <그해 우리는> 오마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