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연작소설
너는 위험한 여자였다
잔잔했던 내 일상에 들어와 내 삶을 송두리채 뒤흔들어 놓았다
남자 2, 여자 4명으로 조가 꾸려졌다
교양수업이라 모두 과가 제각각이었다
조장을 뽑아야 했고 껌을 씹고 있던 여학생이
"남자가 해요"라며 조용한 분위기를 깼다
두 명의 남자 중 하나인 나는 곧 다른 남자를 봤다
그 남자는 멋쩍게 웃었고 다른 여자 둘은 웃었다
모두의 눈이 너를 향했다
너는 미동도 없는 눈으로 그 남자를 보며 말했다
"남자라서 동의하는 건 아닌데 하고싶어 하는 거 같으니 하세요"
그리고 넌 일어섰다
올림머리에 대비되던 너의 하얀 목덜미에는
전철표만한 타투가 새겨져 있었다
우리 수업은 <민속문화의 이해>였다
도시 속 민속문화를 찾아내 분석하는 과제가 있었다
어디를 답사할지 머리를 맞댔고
북촌한옥마을, 성균관, 도봉산 무당촌 등이 나왔다
껌녀는 동대문 풍물시장에 가자고 했다
잠자코 있던 네가 입을 열었다
"안산에 남근바위가 많다던데 그걸 찾아보죠"
우리는 아무도 대꾸를 못했지만 풍물시장보다는 나은 선택이란 걸 모두 직감했다
나는 답사 당일까지도 '안산'이 경기도 안산인 줄 알았다
우리는 홍제역에 내려 안산을 올랐다
우리는 3개의 남근바위를 찾아냈다. 모두가 생각보다 거대해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멋쩍어하며 사진을 찍고 크기를 재고 생김새를 품평했다
이걸로 어떤 결론을 도출해야할지 몰랐으나
너는 남근석에 파인 구멍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멋진 리포트를 완성했다
마지막 강의 후 조장이 술자리를 제안했다
모두가 흥건히 취하고 너와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들떴다
나란히 앉은 우리는 섬 같았다
알코올로 몸이 데워졌는지 너는 긴 머리를 땋아올렸다
또 타투가 보였다. 바코드였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너는 내 눈을 가만 봤다
눈을 거둬야할 것 같았지만 알코올이 날 기만했다
"숫자는 무슨 의미인가요?" '20070924'
-"죽고 싶은 날."
...... "이제 2년 남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사네요"
너는 내 눈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여자친구로 만난 너는 생각보다 재미난 여자였다
강의실에서보다 훨씬 잘 웃었고 말도 많이 했다
나는 나와 달랐던 네가 좋았고, 네가 불안했다
너는 예상보다 밝았지만 생각보다 염세적이었다
죽을 날을 받아둔 너는 하고싶은 걸 해야 직성이 풀렸다
밤새 춤을 추고 한달 용돈을 하루에 다 쓰고
48시간 안 자고 책만 보기도 했으며 말없이 며칠 여행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사랑'은 하지 않았다
내가 네게 사랑을 고백했을 때 네 눈은 차가웠다
"넌 사랑을 안 믿으니까 나랑 더 잘 될 수 없어."
내딴에는 협박이었지만 너는 그때 이별을 결심했다
나또한 로맨티스트가 아니었기에 이내 네게 끌려갔다
때로는 너보다 더 쿨하게, 더 비관적으로 널 대했다
그러다 이내 내게 처절하게 사랑을 쏟아부었다
일년 여를 만나도 너의 생활은 달라지지 않았고
나의 삶만 망가지고 있었다
너는 책임을 못느꼈고 나는 네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너를 벗어나려 했으나 네가 아닌 세상은 다 유치했다
나는 너를 민속신앙처럼 대하고 있었다
포석정을 흐르는 바가지처럼 한 바퀴 돌아 네가 내게 오면
나는 모든 서운함을 잊고 기꺼이 너를 받아 올렸다
너는 예측할 수 없는 시간을 타고 오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래도 온다는 희망으로 버티고 이겨냈다
네게 가장 서운했던 건 20070924의 의미를 알려주지 않은 것이었다
2007년에 들어섰을 때 나는 무서워졌다
정말 네가 그 날에 사라져버릴까 두려웠다
너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무섭도록 똑같았다
6월이 되자 나는 무슨 준비를 해야할 것만 같았다
네게 물어도 너는 답하지 않았다
끌로 네 문신을 긁어 없애고 싶을 정도였지만 너는 무덤덤했다
7월이 지나고 8월이 되자 나는 너를 내 자취방에 들였다
나는 집에서 뿐만 아니라 너의 외출도 따라다녔다
너는 마다하지 않았다
너도 변화가 있었다. 너는 잠을 자지 못했다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리던 여름날 너는 밤새 식은땀을 흘렸다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앉아 무릎을 안았다
세상이 요란할 땐 안락한 침대가 오히려 무섭다고 했다
딱딱한 바닥에 앉아 허리를 세우고 있어야 덜 무섭다고 했다
나는 바닥에 요를 깔고 너를 눕혔다
"바닥에 등을 대고 세상이 널 받히고 있는 걸 느껴봐
세상이 무서울 땐 내가 같이 바닥에 누워있어 줄게."
그해에는 지독히도 태풍이 잦았다
우리는 침대보다 바닥에서 더 자주 자야했다
태풍은 9월 중순까지 이어졌다
24일을 일주일 앞두고 나는 또 물었다
"그 날이 무슨 날이니?"
바닥에서 밤을 보낸 후, 21일 아침에 너는 내게 나가자고 했다
우린 홍대로 나갔고 타투샵에 갔다
너는 바코드에 커버를 하겠다고 했다
5년간 네 목을 조였던 절멸의 날짜는 검은 막대가 되었고
그 아래에 레터링이 새겨졌다
"Into the storm"
나도 팔 안쪽에 같은 글을 새겼다
오늘처럼 요란한 밤이면 거실 바닥에 같이 눕는다
너는 내 팔베개를 하고 누워 내 레터링을 만지작거리며 잠에 든다
너는 내게 날짜의 의미를 말하지 않았고 나 또한 묻지 않았다
너의 과거는 지나는 순간 절멸한다.
내용과 상관 없음(출처: 핀터레스트)
*제목은 영화 <퍼플 하트> 대사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