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연작소설
두터운 앨범에는 추억이 가득하고 좀 더 특별한 페이지에는 탭을 달기도 한다. 너와의 기억에도 그런 탭 붙이기가 가능하다면 난 좀더 너를 추억할 수 있었다
장마가 끝나고 찾아온 무더위에 우리는 상수역에서 만났다
홍대의 구석이라 할 수 있는 상수역을 택한 것에 나는 기대가 좀 더 되었다
2000년대 후반 나는 상수역 근처를 좋아했다
그곳에는
책을 가져가면 커피를 내주던 북카페가 있었다
전국의 유명 막걸리를 팔고 전라도 이모님의 손맛이 좋았던 주점도 있었다
그 골목은 홍대의 떠들썩함도, 젊음도 비켜선 곳이었다
여섯 시 즈음이던가,
아직 덥지만 옅어지는 햇무리에 선선함이 기대되던 그 때쯤
우리는 작은 파스타집에서 만났다
초록색 플레어스커트에 하얀색 티셔츠를 입은 너의 모습에
물가의 수양버들 그늘이 옮겨온 듯 했다
내가 다시 보고싶은, 너에 대한 첫 기억이다
한 달여를 더 만나 초가을이었던가
주말에 선유도공원에 놀러갔다
하수처리장을 리모델링한 공간을 산책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부산한 아이들을 피해 걸었는데
너는 한 아이를 등 뒤로 숨기며 아이처럼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이 아직도 자주 떠오르고
그럴 때마다 심장이 콕콕 쑤신다
다시 꺼내고픈 두 번째의 너다
낙엽이 지고 겨울이 찾아왔다
첫눈이 온다는 소식에 우리는 상수역에서 만났다
소개팅했던 파스타집을 다시 갔고
눈을 기다리며 한강을 향해 걸었다
넌 눈을 보기 힘든 남쪽에서 와서
11월 중에 눈을 맞을 수 있다는 것에 기대가 컸다
군대에서 눈 치우던, 시덥잖은 얘기를 하는데
네가 갑자기 멈춰섰다
"오빠 나 봐바!"
너는 두 눈을 모은 괴상한 표정이었다
"내 코에 눈이 내려앉았어!"
눈은 벌써 사라졌지만
넌 아직도 코에 눈이 있는 것처럼,
현미경으로 봐야 보이는 육각형의 결정을 보기라도 한듯
두 눈을 모아 코끝에 소실점을 걸었다
그러곤 내리는 눈을 찾아 방방 뛰었다
너는 다시 코에 눈을 앉히겠다며
코를 하늘로 치켜세우고 돌아다녔다
그런 너를
나는 두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고싶었다
겨울이면 떠오르는 너의 기억이다
그해 마지막 날 우린 팔각정에 올랐다
해가 바뀔 시간이 다가오니
멀리 종로에서 폭죽이 쏘아올려졌다
너는 내게 기대 그걸 보며 말했다
"나도 저렇게 펑 터져버렸으면 좋겠어."
너를 만나면서 들은 가장 난해한 말이었기에
나는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숨 돌리고 겨우 꺼낸 말은
"터지면 내가 다시 합쳐놓을 거야.
드래곤볼이라도 모아서 할 거야."
웃기지도 않은 말이었다.
너무 후회스러워 짙게 새겨진 기억이다
우리는 봄을 맞기 전에 헤어졌다
연초에 너는 고향에 다녀온 후 무너졌다
너는 매서운 추위처럼
한겨울밤 짙은 어둠처럼
녹지 않고 굳은 눈얼음처럼
네 안으로 침잠했고 굳어버렸다
너는 우울증이 있다고 고백했다
날 만나기 전부터라고
나와 만날 땐 애써 노력한 거라고 했다
그 고백은 너무 늦어 내가 달리 손쓸 수 없었다
우울증을 처음 겪어 네게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위로해주고 달래주고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해도
너는 계속 땅속으로 꺼져갔다
애원해 받아낸 우울증의 이유는 "아빠"였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다
달이 넘어가자 나는 지쳐갔다
연락이 닿지 않아 네 집으로 찾아갔는데
너는 옥상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
흑막같은 하늘에 하얀 연기를 피어올리던 너의 얼굴은
첫눈을 코끝에 걸던 그 얼굴과 달랐다
여자친구 구실을 쥐어짜내려는 듯
발렌타인데이에 내게 시간을 내줬다
신촌에서 만났다
너는 초콜릿을 준비했는데 크진 않았지만
네가 준비했다는 자체만으로 감사했다
나는 네게 목도리를 선물하고 싶어졌다
너의 목은 거위의 목처럼 가냘펐고 안쓰러웠다
백화점은 우리 같은 연인들과
새뱃돈을 탕진하러 온 가족들로 가득했다
목도리를 세일하는 매장에서 골라보는데
한 아이가 뛰다가 네게 부딪혔다
너는 악 소리를 지르며 주저 앉았다
네가 주저 앉은 것보다 평소 듣기 힘들었던
너의 큰 목소리에 나는 놀랐다
"왜 뛰어. 뛰는 곳이 아닌데 왜 뛰어!"
너는 크게 소리쳤다
그러다 알 수 없는 소리로 울부짖었다
너는 말라갔고 그 여백을 히스테리로 채웠다
나를 만나려 하지 않으려 했고
사람들을 보지 않으려 했다
"너 왜 이렇게 된 거야? 내가 알던 네가 아니잖아!"
인내의 끝에 터진 나의 외침에
너는 "나도 내가 어떻게 더 괴물처럼 변할지 모르겠어."
라며 바닥에 주저 않아 울었다
'끝'이란 선언도 없이 우린 끝났다
우리 앨범은 반도 채우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연애는 펼쳐진 앨범 그대로 상자에 넣어 땅에 묻은 것 같았다
봄이 지나고 다시 여름이 왔을 때
널 소개해 준 친구에게 들었다
너는 시골에 내려갔다고
아버지의 부고를 받았다고
장례식장에는 아무도 허락하지 않았다고
이제 다시 친구들과 연락을 한다고
아마 내게도 연락하지 않겠냐고
다시 맑고, 먹구름이 몰려오고, 비가 오고, 천둥번개가 치고
다시 날이 개고, 덥고, 눈살이 찌푸려지고
노을보면 기분이 풀리는 그런 여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