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나만큼 알뜰한 여자도 없어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연재소설

by 구작

결혼하고 지도의 끝까지 내려간 너를 다시 본 건

바다의 끝을 찾아 갈 일로 출장을 갔기 때문이다

너무 먼 곳이라 출장 전에 SNS에 신세한탄을 했더니

오지랖 넓은 선배가 네가 거기 있다고 알려줬다

보통 오지랖이 아닌 그 선배는 네게도 내 출장을 알렸다

그래서 우린 만났다

우린 동문의 오지랖으로 충분히 만날 수 있는

'아무 사이 아닌' 그런 동기였으니.


네 결혼식이 마지막이었으니 15년 정도 지났겠다

너는 '해 일'자가 들어간 그 고장에 살면서도

여전히 하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의 만남에 누구나 할 인사치레를 하고

우린 서로를 살폈다

하얀 얼굴, 작은 기미들, 눈썹 문신...

평범하게 늙었나?

목 주름은 별로 없고, 피부는 아직 탄력을 품었다

역시 미인은 안 늙는 건가...

손에 눈이 멈췄다

얼굴 색보다 많이 짙다

핏줄이 섰다

주름이 자잘하다

손가락 끝이 뭉툭하다

...손이 늙었다


15년 세월이 네 손에 담겨 있었다

난 눈을 들어 보이지 않게 웃었고

너는 내 눈을 보고 눈가에 주름을 만들며 웃었다

15년만의 서먹함이 하얀 테이블에 70센치미터쯤 있었다

그 사이에 뉴욕치즈케잌과 초코롤, 커피 두 잔이 놓였다

내 잔에는 김이 모락모락

네 잔에는 얼음이 달그락


"더운데 따아를 먹어?"

-이젠 늙어서 차가운 게 잘 안 먹혀

너는 다시 눈가에 주름지게 웃었다

우린 결혼 후 삶, 결혼 외의 삶을 한참 얘기했다

누구에게나 할 얘기들

누구라도 맞장구 칠 얘기들

너는 그곳에 가서 아이 셋을 낳고 살고 있었다

전업으로 살다가 이제 아이 학원비 때문에 알바를 알아본단다

우리가 있는 그 카페에도 얼마전 면접을 봤단다

그런 얘기는 학교사람들은 모른다고 한다

네 고장은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산업도시라

다들 네가 시집 잘가

벤츠 끌고 브런치 먹으며 산다고 알고 있었다


"다 먹자, 남기면 아깝잖아."

남기면 아까워서 먹어치우는 건 우리 엄마 세대나 하는 건데

과 퀸카였던 네가 15년 후 그러고 있다

너는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고

가을이면 색색 메리울 가디건을 입고

교정 단풍보다 더 가을처럼 다니던 너였다고 하니

이번엔 입가에 주름 짓고 웃었다


"넌 이곳 짠내도 풍기지 않고 샤넬 향이 날줄 알았어."

오랜 해후에 취해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뱉었다

"나만큼 알뜰한 여자도 없어."

그러고는 오래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빨대로 하릴없이 아아를 저었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했다

그런데 언어회로가 네 말에 멈춰버렸다

'나만큼 알뜰한 여자도 없어.'

너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왜 나는 생각했을까?

알뜰, 궁색, 실패, 후회

같은 연상의 단어들이 아닌데 왜 난 네가 불쌍해졌을까?

15년 전 나는 너를 짝사랑했다

네 결혼식 전에 이미 너를 '짝사랑'에서 지웠지만

웨딩드레스를 입은 너를 보고는 무너졌었다

15년이 지나 나는 다시 네 앞에서 무너졌다

연민도 애정일까?

동정은 너를 더 비참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너를 동정해서는 안 됐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무 멀어 또 오기 힘들겠고 네가 서울에 오면 연락해."

- "이 곳에서 늙어 죽지는 않겠지. 건강해라."

인사로 '건강'을 얘기할 정도의 마음이다. 네게 나는.

나는 네 번호를 저장하지 않았다

너와 만난 시간은 연인들이 사진찍던 포토존을 찍은 사진으로 저장했다

SNS에 그 사진을 올리며 '노을이 예쁜 곳'이라고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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