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연재소설
'낙하하는 저녁'이었다
막 가을에 들어선 저녁은 선선한 바람으로 귀가를 재촉했다
노을은 보랏빛으로 물들었고
그 신비한 색에 황홀함을 느낄 찰나 먹색으로 물들어갔다
그 날 저녁은 그렇게 가을로 낙하하는 늦여름이었다
느릿느릿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새로 생긴 반찬가게에 들렀다 가는 길이라 좀 늦었지만
그렇다고 빨리 걷고 싶지 않은 그런 날씨였다
일찍 간다고 더 맛있는 저녁 밥상을 차리는 것도 아니고
일찍 간다고 가족이 더 나를 반기는 것도 아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온 감각을 실어 발을 붙였다 떼면서 걸었다
어두운 골목에 가로등이 불을 밝히자
키가 껑충 큰 한 남자의 존재가 켜졌다
면바지에 블레이저, 숄더백... 대한민국 중년 직딩의 표본이다
키까지 작았더라면 난 바로 눈을 거두었을 테다
키 큰 그가 가로등을 지나치면서 손을 번쩍 들더니
벽에 걸린 담쟁이 잎에 손을 댄다
손을 뻗어 키가 다른 담쟁이 잎 하나 하나에 손뼉을 맞춘다
홈런을 치고 덕아웃에 들어와 하이파이브 하는 선수처럼
입꼬리를 올린 채 재미지게 '찰싹' 담쟁이와 손바닥을 맞춘다
높게 달린 담쟁이는 덩크를 하듯 껑충 뛰어 손을 맞췄다
그 날 그 담에는 그가 그린 궤적이 음표가 돼 남았다
'가을아침'처럼 발랄하고 기분 좋은 노래였다
식은 밥을 푸고 밀키트를 렌지에 돌려 꾸역꾸역 밥상을 차렸다
학원에서 돌아온 아이1이 가방을 던져놓고 앉았다
방에 있던 아이2는 핸드폰을 보던 채로 앉았다
담배를 피고온 남편은 손도 씻지 않고 앉았다
각자는 서로의 밥그릇에 머리를 묻고 먹기 시작한다
아슬아슬하게 엇갈리지만 서로의 젓가락은 부딪히지 않는다
"이거 000(밀키트) 돌린 거지?"
-응
"엄마, 그냥 배달이 낫지 않아?"
-요새는 배달도 시간 오래 걸리더라
"그럼 미리 주문하면 되잖아?"
-먹고 싶은 거 물어도 누구 하나 답하지 않잖아
"알아서 시키면 되지. 우리가 뭐 반찬투정하나?"
그래, 반찬투정이야 없다
그런데 말도 없다 너희는.
남편이 젓가락으로 깻잎을 어렵게 뗀다
'잡아줄까?' 생각하는 찰나, 성질 급한 그는 손으로 뗀다
손가락에 묻은 김칫국물을 입 속에 넣는다
그 손에 아직 니코틴이 남았을텐데...
남편 손을 보고 아까 그 남자의 손이 떠올랐다
담쟁이와 손뼉 치던 길고 핏줄 선 그 손은 어떤 반찬을 집고 있을까?
아니, 그 손은 아내 손을 잡기도 할까?
일하느라 고생했다고
애들 챙기느라 고생했다고
장바구니 들고 오느라 힘들었겠다고
고생해서 손가락이 두꺼워졌구나 안쓰러워하면서
이제 자네도 늙어서 주름이 느는구나 걱정하면서
이 손에 더 물 안 묻히게 해줄게 다짐하면서
그 손은 아내의 손을 쓰다듬을까?
중등 아이1이 다음 학원에 간다고 일어섰다
아이2가 폰을 들고 방에 들어갔다
남편이 담배와 폰을 챙겨 현관을 나선다
더러워진 식기들을 앞에 두고 일어설 힘이 생기지 않는다
그릇을 모아 창문 밖으로 던지고 싶다
남편 발 앞에 떨어져 그가 벌러덩 넘어졌으면 좋겠다
넘어질 때 폰을 떨어뜨려 액정이 산산조각 났으면,
담배를 떨어뜨려 돗대가 부러졌으면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남편 잘못만은 아니지만 원망이 향할 과녁은 하나여야지 마음이 편하다
그 때 네 손을 잡지 않았더라면......
입영열차에 올라탄 너는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2년 반은 금방이야! 휴가도 자주 나오니까 딴 생각 품지 마!"
그 말이 무서워서 널 기다렸던 게 아니었다
그간 쌓은 사랑을 2년 반만에 배반하는 게 나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내가 지킨 사랑의 힘이 그 정도라면
다음에 평생 함께 살 사랑을 또 어떻게 믿겠냐고 생각했다
사랑보다 신의로 지킨 연애는
의리의 약속처럼 결혼으로 이어졌다
제대 후 5년을 더 연해하고 우리집앞에서 프로포즈 받았다
어쩐 일로 집에 데려다준다고 하더니
돌아서는 날 돌려세운 후 넌 주머니에서 반지케이스를 꺼냈다
그 과정 하나하나가 너무도 예측 가능해 웃겼지만
'그래도 결혼 생각이 있구나'하는 기특한 마음이 들어 감동하는 척 했다
반지를 빼고 내 약지를 들어 끼워넣었다
우리 사랑의 점성만큼이나 투박하게 넌 로맨틴한 다짐 하나 없이 끼웠다
당시의 우리 섹스처럼 내 얼굴을 살피지도 않고 타이트한 반지를 밀어넣었다
우겨넣은 네 반지, 네 미래를 보고 넌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런 너를 보고 나는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너랑 콘돔 없는 섹스를 하고 테스터의 한 줄에 느꼈던 그것과 같았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반지를 든 네 손을 뿌리칠 수 있을까?
못 할 이유야 없지만
살아본 인생이 재미 없어 거절할 자신도 없다
자리에 눕자 다시 그 담쟁이 손이 떠오른다
눈을 감는다. 생각한다. 몸이 떠오른다
안 되겠다 싶어 거실로 나가 차가운 맥주를 마셨다
그후 그 담쟁이 길을 다시 걷지 않았다
그 가게에서 산 반찬이 맛없기도 했지만
그 손을 다시 볼 용기도 없었다
용기... 무엇에 대한 강한 마음일까?
여튼 그 마음을 만들지 못했다
다시,
그 때와 같은 계절이다
보랏빛 노을도 같고
오늘 저녁 밥상도 같다
똑같이 먹고 치우는 나날이다
라디오에서 '가을아침'이 자주 흘러나왔지만 스산할 뿐이다
젖은 손을 닦고 모과차를 내 마신다
먹색 베란다 창으로 흰 점이 떠오른다
그 담의 그 가로등이다
차를 다 마시는 시간 정도,
딱 그 정도 추억하고 세탁기 알람따라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