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연재소설
[남자]
"나를 찾고 싶어요"
이별의 이유로는 식상했다
유행가 가사에서 본 듯하기도 했고
영화 제목 같기도 했다
"너를 찾는 게 뭐야?"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 내게 '나'는 없는 것 같아요"
4년여의 연애에 종지부 찍는 말로 너무 무책임했다
있어 보이는 말이지만 뜬구름 같은 소리였다
붕어싸만코만 먹던 애가 진정한 아이스크림을 찾겠다며 스크류바를 먹는 격이랄까
너는 그렇게 허공에 "끝" 한 글자 던지고 갔다
'끝'의 전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평일에 3일은 만났고 주말마다 같이 하루를 보냈지만
평일 밥, 술, 집
주말 집, 밥, 술, 집
코스는 고정됐고 나들이를 언제했는지 기억도 안 났다
그 전해부터는 섹스도 줄었다
어쩌다 하나가 될 때, 어떨 때는 양말도 안 벗었다
관성처럼 몸을 섞었고, 사정도 아닌 배설이었다
'나를 찾고 싶어요'
무슨 말일까 곱씹어봐도 모르겠어서 불쾌해졌다
그럼 내가 만나던 너는 누군데?
내가 네게서 너를 지웠다는 원망이 느껴져 화가 났다
너를 소개해 준 동창은 네가 크게 될 헤어디자이너라고 했다
너는 예약 손님이 많아서 일하는 날에는 쉴 틈이 없었고
쉬는 날에는 일할 때처럼 맹렬하게 잠을 잤다
소개 받고 난 후에도 너를 도통 보기 힘들어서 나는 "얼굴만 보자"고 요구했다
네가 9시에 퇴근하면 버스로 10분 거리의 집까지 같이 가는 게 데이트의 전부였다
한동안은 데이트라기 보다는 에스코트에 가까웠다
그때 나는 별 말 하지 않고 네가 편히 퇴근하도록 도왔다
같이 퇴근한 지 이주일이 지나서야 너는 손님들 얘기를 하며 재잘거렸고
한 달이 됐을 땐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쉬기도 했다
옷깃을 여밀 필요가 없을 정도의 선선한 밤바람이 불던
가을의 초입에
너는 "오빠는 수양버들 같아요"라고 했다
수양버들 아래 앉으면 언제나 바람이 분다며
그 바람이 모든 걸 씻어내 준다고
하늘거리는 가는 가지와 여린 잎사귀를 보면 이제 막 디자이너로 올라선 너 같다며
가늘어도 태풍에도 끊기지 않고 겨울을 맞는 근성이
네게 롤모델이었다고 말했다
내 삶의 지표같은 수양버들에 나를 빗대니 나는 고백이라도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태풍도 맞서겠다던 너의 근성은 손놈들 앞에서 무릎이 꺾였다
워낙 감정노동이 심한 바닥이라 그럴 수 있겠다 했지만
세상엔 참 무례한 사람이 많았다
상처 입은 날이면 너는 집에 가는 내내 씩씩 댔다
때론 술집에 들러 독한 술로 기분을 씻어냈고
알코올을 핑계 삼아 욕지거리를 내뱉기도 했다
그런 너는 가시나무를 닮았었다
너의 불만은 진상 손님을 넘어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도 향했다
불화가 생기면 넌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휴가를 내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너는 술을 마시면 울었다
분해서 운다고 하다가 나중엔 힘들다며 엉엉 울었다
그런 너는 사시나무를 닮았다
바람 불면 스산한 소리를 내는 사시나무를.
지명하는 손님이 많은데도 너는 일을 곧잘 그만 두었다
퇴근 시간이 늦다고
손이 아프다고
원장이 마음에 안 든다고
인센티브가 적다고
퇴사할 때마다 새로운 이유가 생겼고 사표를 던지기 전에 고민하는 시간도 짧아졌다
그런 너는 낙엽이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너는 나에게 의지했다
매일 만나기를 바랐고
매일 내가 퇴근하기만을 기다렸고
만나면 너의 마음을 읽어주고 채워주길 원했다
무기력하게 직장을 다니던 너는 갈수록 말이 줄었다
우린 같이 있어도 서로 다른 시공간에 있었다
그래도 너는 눈으로, 호흡으로 내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안정을 찾았다
그렇게 너는 내 공간에 네 존재를 심었고
나는 셋방살이에 살림을 내준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설렘, 공유, 위안, 기대, 그리움의 시간들을 지나
반목, 정체, 공허, 외면, 낯설음의 시대에 들어섰다
[여자]
연애의 이유는 명확하나 이별의 이유는 모호하다
그가 너무 좋아서, 그가 없으면 아파서 연애를 시작했다
그가 싫어져서 그가 있으면 아파서, 이별을 택한 건 아니다
그와 상관 없이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
"나를 찾고 싶어요"
준비한 말은 아니었지만 뱉고 나니 시원했다
오빠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설명해달라고 하는데 설명하지 못했다
나도 '나'가 어떤 사람인지
'나를 찾는다'고선 뭘 해야할지 몰랐다
뱉고 나니 더 나를 찾고 싶었다
한 사람과 4년을 만난다는 건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했다
만나는 자세의 문제였다
1년은 물 끓는 주전자처럼 요란했고
2년은 샘처럼 고요했다
마지막 1년은 바다였다
모든 걸 품었고 모든 걸 용서했으며 모든 외부의 자극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때론 폭풍이, 때론 고요가, 때론 녹조처럼 썩어들었지만
바다는 바다였다
나는 어느 순간 오빠에게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나는 홀로 서지를 못했고 내 옆에는 오빠만 있었다
그가 없는 세월동안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음에도
그가 오빠라는 이유로 의지했다
아니 그런 존재가 처음으로 곁에 와서 자연스레 의지했다
누군가가 내 투정과 가식에 대꾸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안심했다
마주하는 산이 없으면 메아리가 없듯
그가 없으면 내가 없을 것 같았다
쉬는 날이라 그의 집에서 퇴근을 기다렸다
청소도 하고 빨래도 했다. 반찬도 하고 저녁도 준비했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 컴퓨터를 켜고 웹서핑을 했다
포털을 열어 커뮤니티를 둘러보려고 했다
포털 계정에 자동로그인이 됐다
스팸과 청구서 메일 사이에 별처럼 빛나는 제목이 보였다
[오늘 만든 감바스 알 아히요 봐줘요!]
사진이 하나 있었다
제목처럼 정직하게 감바스 사진이었다
새우와 마늘만 들어가 '색'이 없는 감바스였다
조끼조끼 같은 호프집에서나 내는 조악한 안주로 보였다
팬은 어느 가정집에나 있는 코팅 팬이었다
'참 허섭스레기네'라고 생각하고 스크롤을 내리는데
"오빠에게 배운대로 했는데 어때용?
생긴 건 이래도 존맛탱!!
오빠가 해주는 것보다 맛있는 거 같은데?
궁금해요? 먹어볼래? ㅋㅋㅋ"
저 '오빠'는 내 오빠리라
"와인이 생각나는데 참아야지! 내일 먹을 거니까~
00빠는 갑오징어 바질페스토가 맛있대요!"
이후에도 비슷한, 어떻게 보면 친한 선후배 사이에서도 나눌 수 있는 내용이렀다
그런데 "오빠가 만들어준 감바스"가 지워지지 않았다
그가 감자스를 할 줄 안다는 것도 몰랐고
그가 내게 요리다운 요리를 해준 게 언제인지도 기억 안 났다
포털을 닫고 컴퓨터를 껐다
의자에서 일어나 바닥에 앉았다
좀 전에 만든 저녁상이 무릎 앞에 있었다
김치찌개를 하고 조기를 구웠었다
오빠는 찌개에 소주를 먹으니 입가심하라고 오이와 당근도 냈다
오이를 하나 들어 씹었다
비렸다. 그래도 쌈장 없이 끝까지 먹었다
그녀에 대해 생각했다
'누굴까? 어떤 사이일까? 얼마나 됐을까?'
이런 의문보다
'어떻게 생겼을까? 얼마나 어릴까? 헤어스타일은 뭘까?'
를 떠올렸다
피부는 하얗고 볼은 발그레할 나이에
어깨를 살짝 넘는 머리, 밝은 갈색, 끝만 굵은 펌
왜 나는 그녀를 그리면서 남은 입을 싱싱한 웃음으로 표현했을까
피가 곧 뚝뚝 떨어질 것처럼 신선한 선홍빛 그녀 입술에는
설렘, 공유, 위안, 기대, 그리움이 있었다
일어서서 거울을 봤다
피부는 말할 것도 없고 입술은 상처에 붙은 마른 피같았다
립스틱을 찾으려고 가방을 뒤졌다
바닥에 있을 립스틱이 만져지지 않는다
가방을 뒤집어 내용물을 쏟아낸다
지갑, 폰, 물티슈, 커피숍 쿠폰, 볼펜, 머리끈, 동전,
그리고 식당에서 받은 사탕 한 알
어디에도 립스틱이 없다
립스틱이 어디로 갔을까?
내 또래 여자애들은 립스틱, 틴트, 립라이너, 립라커
입술에 바르는 것만 서너개 가지고 다닌다는데 나는 왜 립스틱 하나가 없을까?
내 립스틱은 어디에 있을까?
그에게 립스틱을 찾다가 헤어질 결심을 했다고 할 수 없었다
감바스를 나누는 여자를 알아챘다고 말하기는 더 어려웠다
여자 얘기를 꺼내면 나는 소멸할 것 같았다
그가 소금으로 만든 나를 바다에 풍덩 빠뜨리는 것처럼 생각됐다
우물쭈물하다가 좋은 대답이 나왔다
"나를 찾고 싶어요"
나는 나를 찾기로 했다
가능하다면 네 안에 들어서고 싶었다.
너를 갈망하던 간절함과 영원을 약속한 희망의 크기는
서로의 몸에 회한과 절망의 깊이를 더한 채 박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