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겨울이 채 가시지 않은 3월이었지만 입학식 활기가 가득했던 캠퍼스는 분명 봄이었다
무채색의 외투가 가득한 강당에 노오란 스웨터는 경칩에 깨어난 개구리처럼 팔딱팔딱 눈에 띄었다
너는 그렇게 내게 봄이었고, 봄을 수놓는 개나리처럼 내 1학년 인생에 역사를 새겼다
아나운서를 꿈꾸고 들어온 넌 이내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비단 과뿐만 아니라 학교 전체의 스타였다
넌 화장도 안 했고, 애써 웃어보이려 하지도 않았지만
누구든 널 예쁘게 봤고 누구든 네 얼굴에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과 정원이 44명. 남자는 24명이었다
입학한 지 한 달이 지났을까?
1학년 44명만 처음으로 모인 술자리에서 우리는 신나게 선배들을 씹었다
사발식을 권하는 복학생,
건배하고 다 마실 때까지 기다리던 선배,
치마가 짧다며 나무라던 여선배,
감언이설로 데모에 끌고가던 선배 등등
여자들만 밥 사주던 남자 선배들 얘기에 자기는 못 얻어먹었다던 여자 동기를 24명의 남자들이 위로했다
여자들만 술 사주던 선배놈들 얘기에는 거의 대부분이 욕지기를 내뱉었다
입이 걸던 한 여학생이 너를 노려봤다
"넌 돈 들 일이 없겠다? 밥이든 술이든 사주겠다는 선배들이 줄을 서서?"
뒷담화에 뜨거워진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하지만 넌 노오란 스웨터보다 부드러운 미소로 말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니? 얻어먹으면 마음이 불편해. 특히나 선배들은 잘 모르는데 밥 먹으면서 할 말도 없어서 부담스럽더라구. 난 우리끼리 먹는 게 좋더라. 우리 이제 오전 수업 끝나면 시간 맞춰서 같이 밥 먹자. 너희도 우리끼리 먹는 게 좋지 않아?"
넌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좌중을 둘러봤고
적어도 24개의 검은 머리는 위아래로 힘차게 힘들렸고 '나도 너랑 먹고싶었어!'라는 고요한 외침이 술집 안에 오랫동안 메아리쳤다
우리끼리만 먹는 술자리에 흥이 났을까? 편해서였을까?
2차 중반에 이르자 절반은 쓰러지고 토하고 혀가 꼬였다
2차를 마치자 절반 넘게 귀소본능을 발휘했다
3차는 자취생들과 불나방들로 구성됐다
네가 학교 후문에서 하숙을 했기에 불나방 십여 마리도 3차로 향했다
3차는 너의 콘서트에 가까웠다
별 말이 없던 너였는데 자리가 편했는지 알코올 효과가 발휘되는지 네 조막만한 입에서 진주같은 말들이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피리 부는 사나이, 아니 처자는 빼갈보다 독한 향취로 불나방들을 바보로 만들었다
그날 용기 있는 A가 네게 고백을 했고
속을 숨기지 못한 B는 얼굴이 붉어졌고
소심했던 C는 담배를 들고 나갔으며
음흉한 D는 A에게 멋지다고 엄지를 치켜들고
술이 약한 E는 꼬인 혀로 A를 향해 "빙신"이라 욕한 후 잠들었다
그날의 통계에 따르면 이래저래 너를 좋아하는 남자동기가 11명으로 밝혀졌다
이로써 1학년 남자의 절반 12명이 너를 좋아하고 있었다
용기 없고 소심하며 음흉하면서 술을 못 마시는 나는
공식 통계에도 오르지 못하는 놈이었다
4월부터 6월까지 11명의 절반이 네게 고백하고 장렬히 전사했다
나머지 절반은 패자의 몰골에 기겁해 다른 여자를 찾아 떠났다
나는 용기 없고 소심하며 음흉했기에
너의 남자친구가 아닌 친구가 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너와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내는 행운아가 될 수 있었다.
너는 중간고사를 마치고 학교에서 세 정거장 떨어진 이모네로 들어갔다
귀가가 늦는다는 하숙집 아줌마의 밀고가 제 발등을 찍은 격이다
나는 너의 이모네 가는 길에서 자취를 했기에 우린 자주 하교길을 함께 했다
가끔 저녁 먹고 가자고 네가 말할 때면 난 일주일치 용돈을 아낌 없이 내던졌다
그럼 너는 다음을 기약했고 그때 "투자는 존버"라는 이치를 깨달았다
기약 없는 로맨스를 소소한 낭만으로 버티던 내게 변수가 끼어들었다
용감했던 A가 용기보다 더 강한 뚝심으로 네 이모집 옆에 자취방을 얻었다
경기도라지만 1시간 30분이면 지하철을 타고 통학할 수 있었던 A는 기말고사를 말아먹고 학교 근처에 차취해야 할 근거를 획득했다
용감하면서 뚝심있으며 음흉하면서 술도 잘 먹는 A는 개강과 동시에 네게 저돌적으로 돌진했다
야생마처럼 달려드는 A를 너는 적당한 회유와 철저한 무시로 양처럼 다스렸다
아직 연애할 마음이 없다는 예의,
너는 더 좋은 여자를 만날 거라는 위로,
나는 네가 아는 것처럼 좋은 여자가 아니라는 회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오르는 심장을 두 손으로 꺼내 네 눈 앞에 갖다바치는 A의 진심을 너는 무시하면서 철저히 고고한 네 위상과 지위를 유지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듯,
불행히도 너희의 줄다리기에 나는 A와 술 먹는 날이 잦아졌다
대개는 위로를 하면서 재도전할 용기를 불어넣어줬지만
너의 예의 갖춘 회유성 위로가 어쩌면 사실일 수 있을거라는 암시도 적절히 섞으면서 내 자존심을 지켰다
우리의 관계가 진전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적어도 나의 꿈은 현실감각을 키우고 있었다
어쩌다 네가 시시껄렁한 내 얘기에 크게 웃어주기라도 하면 나는 자기 전에 몇번이고 그 말을 복기하면서 어떤 포인트에 네가 그렇게 웃었는지 분석하고 또 학습했다
그날도 그랬다
혹시 넌 기억하고 있을까?
내 친구 학교 앞에 놀러 왔던 날
우리들 연인같다 장난쳤을때 넌 웃었고 난 밤 지새웠지
달콤했던 그 밤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나고 동기모임이 있었다
나는 네 옆에 앉고 A는 네 앞에 앉았다
그외 그때까지 마음을 지킨 듯 아닌 듯 했던 5명의 남자는 어딘가에서 너를 지켜보고 있었을테다
그렇게 모두 모인 밤
술취한 널 데리러 온 그를 우리에게 인사시켰던 그 밤,
그 날은 나의 생일날이었다
널 데리러 온 그는 우리보다 6살 많은 복학생 선배였다
재가하는 늙다리 왕서방에게 복녀를 내주듯 우리는 얼어붙었었다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니옆에 그를 보며
나완 너무 다른, 난 초라해지는
그에게 널 부탁한다는 말 밖에
널 울리는 사람과 위로 밖에 못하는' 나였다
그날 나는 A와 자취방까지 같이 걸었다
A는 노래했다
"소중했던 내 사람아 이젠 안녕
찬란하게 반짝이던 눈동자여
사랑했던 날들이여 이젠 안녕
달빛 아래 타오르던 붉은 입술
떠난다면 보내드리리"
술에 젖은 A의 목소리는 질펀했고 노래는 처량했다
소심하면서 음흉했던 나는 소리내어 노래하지 못하고
A의 노래에 박자 맞춰 속으로 가사를 읊었다
다만 마지막 가사는 내뱉자마자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도
모른 척 스쳐 갈 수 있게 멋있게 살아줘'
'나는 혼자여도 괜찮아
널 볼 수만 있다면 난
늘 너의 뒤에서, 늘 널 바라보는
그게 내가 가진 몫인것만 같아'
네가 공개 연애를 하자 너와 함께 하교하던 시간도 자연스레 줄었다
너는 그 선배와 4개월여 사귀다가 2월에 헤어졌다
방학이라 고향에 있던 내게 너는 달보다 시린 목소리로 이별했음을 알렸다
네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공중전화 수화기가 얼음보다 차가웠지만
나는 손에 힘주어 수화기를 움켜쥐었다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몰라 한숨만 쉬었고
오른손으로는 전화박스 유리창에 너의 이름을 썼다
달보다 환한 박스의 천장등이 내 그림자를 연하게 만들었다
2학년 시작과 동시에 너의 싱글 뉴스가 전해졌다
A는 다시 활기를 찾았지만 선배들의 공세는 심해졌다
'6살 늙다리도 해냈는데 나라곤 못할쏘냐?' 남자들은 단순했다
너는 그때 착했을까? 외로웠을까?
이내 너는 5살 많은 복학생과 사귀었다
이번엔 내게 직접 연애소식을 털어놓았다
비밀이라고 했지만 보안을 강조했어야 할 대상은 내가 아니라 정복자, 남친이었다
소문은 그에게서 시작돼 소낙비보다 빠르게, 장맛비보다 오래 과에 돌았다
고통스러운 오뉴월을 보내고 나는 입영신청을 했다
용감했던 A는 한 번 더 고백했지만 너는 동갑과 연하 취향이 아니었던 걸 재확인했다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나고 너는 또 헤어졌다
다시 A는 불타올랐고 한 무리 선배들도 수컷냄새가 진해졌다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연말에 입영이 예정됐기에 더더욱 계절보다 먼저 냉정해질 수 있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크리스마스가 지난 후 입대일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넌 내게 심야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막차를 타고 정동극장에 갔다
이제 5시간여 우리를 집에 데려다 줄 차가 없다고 생각하니 극장이 안방처럼 아늑했다
첫 번째 영화는 흥행작이라 웃으며 봤다
두 번째 영화는 예술영화라 잠깐 졸았다
세 번째 영화는 로코물이라 선물 같았다
지하철역 플랫폼 벤치에 앉아 차를 기다렸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난로처럼 들고 있었다
계획에는 없었지만 영화 때문인지 커피 때문인지 밤을 새 몽롱항 정신 때문인지...
나는 고백했다
짧고 간단했지만 명료했다
"널 좋아했어. 사실 아직도."
내 고백을 들은 너,
너는 벤치를 손톱으로 파고 있었다. 내 답을 캐내려는 것처럼.
나는 달려오는 차에 눈을 뒀다. 저 소음에 네 답을 못 들은 것처럼.
사람이 없어 고요했기에 지하철이 달리면서 내는 소음이 컸다
너는 내 어깨에 기대 잠들었다
우리가 내릴 역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자 너는
'고마워... 넌 너무 좋은 사람이야'
그 한마디에 난 웃을 뿐이었다
실연의 아픔을 달래기에 군대는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정신 없이 바빴기에 네 생각을 할 틈이 없었고
혼이 나갈 정도로 힘들었기에 여자 생각하는 호사를 누리지 못했다
그렇게 매일밤 실체 없는 영혼으로 쓰러지듯 잠들었다
하지만 아침은 잔혹했다
이른 아침 혼자
눈을 뜰때 내 곁에
니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면
나도 모를 눈물이 흘렀다
훈련소와 자대 배치 후 초기에 대여섯통의 편지가 네 이름으로 왔다
그러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소식을 전하고 뜸해졌다
학교에 복귀하자 너는 졸업해서 없었다
가만 있어도 동기들로부터 네 소식이 전해졌고
네게 연락하면 충분히 만날 수 있었지만 나는 연락하지 않았다
나는 이내 다른 학교로 편입하면서 너와의 고리를 모두 끊어냈다
심야영화를 본 지 10년이 지나 우린 일하다가 만났다
너는 기업의 홍보팀에서 일하고 있었고 나는 기자였다
너는 나를 봐야했고 나는 너와 같은 홍보팀의 미팅 요구를 귀찮아 했다
그런 핑계로 너의 연락을, 만나자는 연락을 모른척하기에는
우리 이름은 특이했다
"안녕하세요, 000 기자님.
저 ## 홍보팀 @@@라고 합니다."
특이한 이름이라도 동명이인일 수 있지만
'기자님'과 네 이름에 웃음이 묻어있었기에 너라는 걸 알았다
아니 너라는 걸 알고 아직도 네 목소리, 네 말들의 리듬에 내 심장이 진동하는 걸 알고, 신기하면서 부끄러웠다
변한 건 없니 내가 그토록
사랑한 미소도 여전히 아름답니
난 달라졌어 예전만큼 웃질 않고
좀 야위었어 널 만날때보다
보자, 저녁이면 좋겠어
뜨거운 안녕을 한 좋은 사람아, 여전히 아름다운지
"반가워, 보고싶었어.
잘 어울린다, 000 기자님."
변한 게 없네 날 웃게 했던
예전 그 말투도 여전히 그대로네
난 달라졌어 예전만큼 웃질 않고
좀 매말랐어 널 만날때보다
나를 이해해준 지난 날을
편한 우정이라 착각했지
서늘한 안녕을 한 좋은 사람아, 여전히 아름답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