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자와 경숙이
목소리가 왜 그러냐?
-언니 내가 좀... 아파.
어디가 아픈디?
-언니는 몰라도 돼~
아야, 내가 니 하나밖에 없는 언니야. 언니가 몰라도 되는 동생 병이 뭐다냐?
평생 병원 신세 안 지고 살던 동생이 지 입으로 아프다고 한다
분명 보통 일이 아닌데 말을 안 한다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
네가 어디가 아픈지 모르지만 난 심장이 톱으로 썰린 것 같고 쪼개진 대나무로 매질 당한 것처럼 등짝이 아프다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
나는 광복되던 해에 태어났고
너는 전쟁나던 해에 태어났다
너른 들판과 굽이져 흐르는 얌전한 강을 품은 마을이었지만 우리 마을도 난을 피할 순 없었다
난리통에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부지는 3년이 안 돼 계모를 들였다
십자가와 함께 들어온 계모는 우리를 참 많이 미워했다
계모가 오자마자 아들을 낳자 우리집은 완전히 계모판으로 넘어갔다
남동생 이름은 요셉이었다
내 이름은 경자다
네 이름은 경숙이다
아부지는 서울 가서 살라고 서울 '경'자를 써 이름 지었고
네게는 좀 더 여성스러운 이름이라며 '숙'자까지 썼다
계모는 연이어 여동생 셋을 낳고 또 남동생 하나를 더 낳았다
모두 세례명을 내려서 우리 자매와 계모의 자식들은 명확히 구분됐다
생활에서도 우리와 배다른 형제들은 확연히 차이났다
너와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빨랫터에 가야했다
계모에게 맞지 않는 시간이라 다행이었지만
한겨울 얼음장을 깨고 빨래를 해야할 땐 차라리 싸리나무에 등짝을 맞는 게 낫다 싶었다
어린 너는 찬물에 손을 안 넣고 싶어서 방망이질을 전담한다고 했다
그것도 하기 싫어 품에 넣어온 만화책을 보며 하릴없이 보내기도 했다
그런 네가 미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얌체라도 내 동생이 되어 내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이었다
경자보다 먼저 경숙이가 서울로 떠났다
계모에게 나는 식모였기에 집을 벗어날 수 없었다
경숙이 너는 15살에 서울로 올라가 건설사 사장님네 식모로 들어갔다
그 작은 손으로 어떻게 식모살이를 할까 하는 생각에 밤이면 달만 찾아봤다
올라간 지 두 달만에 네게 편지가 왔다
다행히 사모님이 좋은 분이라고 한다
따뜻한 흰쌀밥도 마음껏 먹을 수 있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안도가 됐지만 그리움은 짙어졌다
나는 네가 그리워 동생들에게 마음을 썼다
동생들은 그 엄마와 달리 나를 잘 따랐다
갓난아기까지 있는 터라 쉴 새 없이 바빴지만 외롭지는 않았다
너를 따라 서울로 가고 싶었지만
계모가 마련한 혼처에 들어가며 난 이 동네에 뿌리 박고 말았다
너는 보라색 양장을 입고 내 결혼식 전 날 도착했다
사모님이 3일이나 휴가를 줬고 축의금 내라고 봉투도 줬다고 했다
5월, 달이 얇던 그 날 우린 달이 기우는지도 모르고 얘기를 나눴다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떠나는데 네가 눈에 밟혔다
사모님이 잘 해주신다고 했지만 네 손은 많이 두터웠다
전날 밤, 비로소 잠이 든 너는 대자로 누워 편히 잤다
우린 평생을 계모 눈치로 새우잠을 잤는데
대자로 누운 네 모습이 왜 그렇게 고단해보였는지,
신랑의 손을 잡고 우릴 축하하는 사람들 속으로 행진하는데
너의 자는 모습과 박수치며 웃는 얼굴이 교차해 결국 눈물을 쏟고 말았다
지리산 깊은 곳에 터를 잡아서 서울은커녕 읍내 나가는 것도 일이었다
내가 결혼하고 3년 후 너는 사장님이 소개해준 제부를 만나 식을 올렸다
나는 막 첫째를 낳은 후라 갈 수가 없었다
축하한다는 말은 직접 하고 싶어 이장집에 가서 네게 전화를 했다
"논현동입니다."
논현동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지만 네 목소리는 단번에 알아봤다
'사모님이 다 챙겨주시니 걱정할 필요 없어
언니 마음 다 알아
조카 태어나도 못 가보는 게 미안해
우리 신혼여행을 고향으로 갈 거니까 거기서 보자
이렇게 목소리 들으니 좋다, 언니야'
네 목소리를 들으니 정작 나는 말을 못하겠더라
입을 열면 울 것 같아
그러면 네가 더 울 것 같아
손가락으로 전화기 선만 꼬고 있었다
인사를 해야 하는데 인사를 할 수 없었다
이장의 헛기침이 여러번 나고서야 인사했다
"남의 전화라 오래 못하겠다
내일 잘 하고 정말 축하해, 오면 보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울렁였다
그때 나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우리집에도 전화를 놔야겠다.'
나는 다섯을 낳았고 너는 셋을 낳았다
서울에서 우리집으로 오려면
다섯 시간 기차를 타고 하루에 다섯 번 있는 버스를 타고 다시 한 시간을 와야했다
그래도 너는 이삼년에 한 번씩 애들을 데리고 왔다
서울에서 온 조카들은 우리 애들과 함께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면서 놀았고
조카들이 그때의 너처럼 대자로 뻗어자면 나는 밤새 배가 따뜻했다
막내아들이 1학년에 입학할 때 나는 아들만 데리고 너희 집에 갔다
테레비에서 보던 단칸방이라 낯설지가 않았다
제부가 하던 철물점 가게를 가로질러 들어가면 세 평 남짓 방이 나왔다
방의 쪽문을 열면 반 평쯤 되는 부엌이 있었다
그 작은 곳에서 다섯식구 입을 책임진다고 생각하니 비로소 네가 다 큰 것 같아 안도가 됐다
쪽문 옆에는 사다리가 있었는데 아이들방으로 쓰는 다락이었다
나는 무서워서 사다리로 올라갈 생각을 못했다
다녀온 아들 말로는 다락의 창으로 도로가 보이고 차가 많이 다닌다고 했다
밤에도 끊이지 않을 차소리에 네가 대자로 편히 잘 수 있을지 걱정됐다
그후로도 우린 자주 왕래했다
물론 그 사이 집에 전화도 놔서 한 달에 한 번쯤은 안부를 나눴다
셋방에 살던 우리는 비록 더 산골로 들어갔지만 내집마련의 꿈을 이뤘다
너도 그 즈음 비록 논현동과 차이 나는 동네지만 빌라에 네집을 마련했다
우린 그렇게 남한의 끝과 끝에서 평행한 삶을 살아갔다
우리의 평행선이 접점을 늘려간 것은 십여 년 전부터였다
혀에 이물감이 있어 병원에 갔더니 서울 큰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다
'서울'도 무서운데 '큰병원'을 붙여 들으니 오금이 저려왔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홀로 병원을 갔다
혀에 이름을 굴리기만 해도 든든한 아들이 결혼해서 역 근처에 살고 있었지만 아들에게도 전화하지 않았다
원자력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큰병원 가서 검사 받으랬는데 검사는 의외로 금방 끝났다
결과를 들으러 다시 오라는 선생님께
내가 얼마나 고생해서 이 곳에 왔는지,
내가 얼마나 마음 조리며 여기에 왔는지 주절주절 떠들었더니 조금 기다리라고 했다
그 시간이 암처럼 두려웠다
그 시간이 한밤 중 대밭에서 흘러나오던 바람소리처럼 무서웠다
그 시간이 그 겨울 얼음을 깨고 손을 담갔던 섬진강처럼 잔인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니었다
뭐가 생기긴 했는데 약 바르고 약 먹으면 좋아질 것 같으니 먹는 것 조심하고 세 달 후 다시 검사해보자고 했다
어렵고, 들어도 모를 병명을 얘기하셨지만 "나 안 죽소?"라고 거듭 물어봤고, "그럴 일은 없으실 겁니다" 두 번 들었으니 그걸로 된 게다
병원에서 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올 때는 먹는 물 사먹는 것도 아까워서 참고 왔는데 택시비가 아깝지 않았다
아들에게 전화했다
병원 검사차 왔다는 전화에 놀랐으나 "암시랑토 안 한단다. 기분 좋아서 택시 탔다."고 하니
웃으면서 집에서 하루 주무시고 가라 권하더라. "아니다, 개 밥 줘야 하니 가야한다."고 물리쳤다
착하나 살갑지 않은 며느리에게 아파서 오는 시애미가 반가우랴
그리고 네가 떠올랐다
네게 전화를 해 다시 아들에게 한 것처럼 말했다
"언니, 놀랐겠다. 우리집에 와서 자고 가."
가고 싶었다. 너도 보고 싶고, 네게 안 아픈 나를 보여주고 싶고, 안 아픈 너도 보고 싶었다
"아들에게는 바로 간댔는데 느그집에서 자고 가믄 아들이 서운하지, 개 밥도 줘야 하고 내래갈란다.
3개월 후에 또 와야하니까 그 때는 자고 갈게."
그 후 너는 우리집에 부쩍 자주 내려왔다
여름에는 휴가 보내러 오고 김장철마다 언니 김치가 맛있다며 내려왔다
그러면 나는 김장김치에 갓김치, 파김치 겨우내 먹을 갖은 김치를 담그고
봄에 꺾은 고사리도 담고, 찻물로 우려 먹으면 위장에 좋다는 볶은 무도 담고, 부각도 부쳐서 손주들 주라고 들려보냈다
그래도 더 못 주는 것이 늘 아쉬웠다
네게는 친정엄마처럼 챙겨주고 싶었지만 서울에는 없는 것이 없을테니 뭘 더 줘야 할지 몰랐다
그만큼 너는 내게, 또 우리 애들에게 잘했기 때문이다
지난 김장철에 너는 내려오지 않았다
제부가 코로나에 걸려 많이 아프다고 했다
평소 피부병이 있던 제부는 코로나 후유증이 심했다
해를 넘겨도 좋아지지 않아 너는 직장도 그만두고 남편을 간병했다
3월이면 우리 마을은 노오란 산수유꽃이 핀다
네가 3월에 내려온 지 꽤 된 것 같아 내려오라고 전화했더니 제부가 아직 운전할 수 없다며 다음에 온다고 했다
5월은 아부지 제사가 있다
나는 가지 못하고 서울 사는 요셉 집에 모이니 네게 전화했지만 제부가 아프니 안 간다고 했다
6월 끝자락에 여느해처럼 장마가 시작됐다
서울에 비가 많이 내린다고 했다
비가 오면 아픈 사람은 더 아프다
네게 전화를 했는데 안 받았다
제부에게 전화를 했더니 네가 아파서 입원을 했단다. 전화를 잘 못 받는데 저녁 이후에는 받을 거라고 했다
6시가 지난 걸 보고 전화했는데 받지 않았다
'그래 서울은 저녁을 늦게 먹으니까.'
8시쯤 전화를 했는데 안 받았다
제부에게 다시 전화를 했더니 몸이 안 좋은가 보다며 내일 해보라고 한다
내가 그 밤을 온전히 보낼 자신이 없었다
다시 전화를 들었다. 대여섯 번 벨이 울리더니 네가 받았다
입원했다고?
-자꾸 피곤해서 왔는데 입원하라고 해서... 며칠 됐어
어디가 아픈데?
-괜찮아. 큰병원 왔으니까 나을 거야
그런데, 목소리가 왜 그러냐? 왜 그렇게 힘이 없냐?
너 뭔 병에 걸린 거냐?
-언니 내가 좀... 아파.
어디가 아픈디?
-언니는 몰라도 돼~
아야, 내가 니 하나밖에 없는 언니야. 언니가 몰라도 되는 동생 병이 뭐다냐?
경숙이가 급성 백혈병이란다
병 이름부터가 무시무시하다
암도 무서운데 백혈병은 더 무서운 거 아닌가
백혈병도 지랄인데 급성이라면 더 난리난 거 아닌가
내 동생이 백혈병에 걸렸다
평생 고생만한 내 동생이 아들딸 다 여의고 이제 좀 살만하니 몹쓸병에 걸렸다
아직 난 내 동생을 놓아줄 수 없는데 어떡하나
말년에 우리집 와서 같이 살기로 했는데 우리의 '말년'을 너무 자만했나보다
내 동생이 안 아팠으면 좋겠다
서울 경, 맑을 숙. 서울에서 맑게 사는 우리 경숙이가 맑게 예쁘게 더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