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색 치마 위로 하얀 벚꽃잎 하나가 내려앉았다
고개 들어 또 어디서 꽃잎이 떨어질까 찾아봤다
같은 벤치의 끝에 앉은 젊은 여자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 여자는 왼쪽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어디선가 굴러온 공이 여자의 발에 닿았다
여자는 눈을 뜨고 공을 굴려 보냈다
"다치셨어요?"
여자가 나를 쳐다본다. 말이 없다
"붕대가 감겼길래..."
<다친 건 아니고 좀 뻐근해서요>
"다행이네요. 손목 다치면 잘 안 낫거든요."
<요새 집안일을 무리해서 했더니 시큰거리더라고요>
"그럴 땐 쉬어야 해요.
일을 안 해야 나아요."
여자가 나를 가만 쳐다본다
<쉬고 싶네요>
여자의 눈이 깊어진다
"힘들죠?
곧 좋아질 거예요."
<그런 날이 올까요?>
"그럼요.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행복한 날이 와요."
여자가 또 가만 나를 본다
여자의 눈이 내 안쪽 망막에 닿는 것 같다
<어머님은 언제 행복하셨어요?>
내 눈이 풀어진다
"많았죠.
우리 애들 태어났을 때,
애들 키울 때,
우리집 생겼을 때,
남편 사업 잘 돼서 돈 걱정 없이 살게 됐을 때,
또..."
<지금도 행복하세요?>
"지금은... 그럼요 지금도 행복해요.
이렇게 좋은 날 공원에서 볕 쬐고 꽃 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요.
나는 이제 이런 것에도 감사할 나이에요."
말하고 나니 내 마음이 무릎에 닿는 햇발같다
<내일도 행복하실까요?>
"그럼요. 남편도 아이들도 건강하니 행복할 거예요."
그녀의 눈이 다시 깊어진다
"힘내요, 아가씨도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을 거예요.
가족과 사나요?"
<네, 엄마와 아빠, 동생과 살아요>
"그럼 다 가졌네요. 가족이 있으면 행복은 가까이서 오더라구요."
<가족이 있어 더 행복하세요?>
"가족때문에 속상할 때도 있었지만 행복할 때가 더 많았죠."
<좋으셨겠다.>
"좋았죠. 운이 좋았어요. 좋은 남편과 좋은 아이들을 만났죠."
<어머니가 좋은 분이셔서 그럴 거예요.>
"그럴까요? 나는 더 잘하고 싶었어요.
또 우리 남편과 아이들을 다음 생에 만난다면 더 잘 할 자신이 있어요."
그녀의 눈이 작아진다
<가족들이 참 행복하시겠어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나만큼 우리 가족들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러실 것 같아요>
"좋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아가씨 손도 곧 좋아질 거예요.
손이 나으면 더 행복해질 거고
공원에서 나처럼 꽃 보고 바람 맞으며 즐거울 거예요."
<네, 곧 행복해질 것 같아요>
우린 눈을 맞추고 웃었다
웃고 나니 배가 고파왔다
"배가 고파요.
우리 애들도 배 고프겠다.
먼저 일어나요.
또 봐요, 아가씨."
그녀의 눈이 멈췄다.
내가 갑자기 일어섰나보다
일어서서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하나 둘 셋. 멈췄다
'어? 집이 어디였더라?'
<엄마, 같이 가자>
그녀가 내 팔짱을 끼고 나를 이끈다
내 나이 예순 셋, 나는 치매다
지난 연말이었다
남편의 부부동반 점심모임이 있어 준비를 했다
남편과 택시로 10분 거리 식당에서 보기로 했다
시계를 보니 30분이 남았다
분리수거를 하고 세탁소에 옷을 맡기고 출발하면 될 것 같았다
양손에 짐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분리수거장에 가서 종이와 플라스틱, 유리, 비닐 등등을 나누었다
분리수거장을 벗어나는데 때아닌 강한 햇볕이 눈을 어지럽혔다
어지러웠다
머리도 어지러웠다
몸도 흐트러져 급히 분리수거장 기둥을 잡았다
순간 머릿속이 검게 변했다
머릿속에 아무것도 없었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1초 아니 3초 그러다 길어지는 것 같았고
금세 정신 차린 것 같았지만 이미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나는 아파트 인근 공원벤치에서 드라이클리닝을 맡기려고 했던 남편의 정장바지를 든 채 발견됐다
나를 발견한 건 놀란 나였다
처음에는 단순한 기절인지 기억상실인지 판단이 서지 않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며칠 집밖을 나서지 않았다
그러자 집안에서 기억을 잃었다
쇼파에서 깬 적도 있고, 베란다에 주저앉아 정신 차린 적도 있었다
그러다 베란다에서 잘못될 수도 있을 것 같아 혼자 있을 땐 쇼파와 내 손을 묶었다
그러면 또 하루 종일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날 다시 외출했고 나는 행인의 연락을 받은 남편에게 발견되었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날,
집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개천에서
남편은 신발 벗고 개천에 들어가 서있던 나를 발견했다
병원에서 치매 진단을 받자 남편은 딸과 아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 후로 나는 서른 일곱살 딸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딸은 서른 여섯살까지 우리 부부가 아이처럼 보살폈다
딸은 얕은 수준의 지적장애가 있다
빵집이나 커피숍에서 알바할 수는 있지만 회사에 들어가 일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오래 알바하지는 못하고 한 곳에서 1년 가까이 일하면 어떤 이유든 그만둘 명분이 만들어졌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많은 딸이었지만 세상의 벽을 일찍 알아챈 딸은 서른 여섯에도 내 품에서 안위했다
그런 딸에게 미안해 나는 평생 같이 딸과 살 것이라고 다짐했었다
내 병을 알고 딸은 처음에 나를 아이처럼 대했다
그러면 엄마가 더 슬퍼진다고, 내가 잠시 이상하면 그냥 손잡고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같이 운동하고 같이 공부하고 같이 노는 시간이 늘어서
비록 짧은 기억들은 놓칠지언정 딸과의 추억은 더 켜켜이 쌓여갔다
남편은 가족 외 누구에게도 내 병을 말하지 않았다
이웃에 사는 작은누나에게도
돌아가신 어머니만큼 의지하는 고향에 사는 큰누나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남편은 내가 앓고 난 후 일 외에는 외출을 최대한 자제했다
그해 추석에 시골을 다녀와서 큰누나가 아무래도 치매가 온 것 같다며 걱정했다
조카에게 전화를 걸더니 엄마를 치매검사 받아보라고 권했다
한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다시 전화를 할 정도였다
그로부터 한참 후에 조카는 검사 받았는데 기억력이 안 좋아진 것이지 치매는 아니라고 의사가 말했다며, 삼촌이 걱정하니 더 잘 지켜보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남편은 가까운 사람들의 정신건강을 걱정하는 일이 늘었다
나는 경증이었기 때문에 사실 일상에 큰 불편은 없었지만
남편의 염려가 커 딸과 거의 집에서 지냈다
이듬해 이웃의 형님이 많이 아프다는 얘기를 들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일을 하시던 형님이었는데 백혈병에 걸리셨다고 했다
남편의 걱정이 또 늘었다
그해 겨울, 큰형님의 팔순이었다
서울 사는 조카가 엄마 팔순잔치를 열었다
큰형님은 작은형님이 걱정돼 보고 싶어서 당신의 생일잔치를 핑계삼아 서울에 올라오셨다
조카의 초대로 남편이 다녀왔다
오랜만에 술자리를 갖은 남편은 거나하게 취해 들어왔다
"누나가 벌써 팔순이네. 누나가 많이 늙었어. 말귀도 아주 어두워졌어
조카가 벌써 낼모레 쉰이래. 당신이 걔 대학다닐 때 반찬 만들어줬던 게 엊그제 같지 않아?
매형은 다리가 불편해서 오지도 못하셨어.
매형하고 술 한 잔 하고 싶었는데..."
침대에 대자로 뻗은 남편이 잠꼬대를 하듯 말했다
<어서 자. 내일 지방출장이라며>
돌아서 나오는데 남편이 또 말한다
"조카가 당신 보고 싶은데 왜 같이 안 오냐고 물었어.
걔가 당신을 좋아했잖아.
미영이, 상영이 안부도 묻더라고.
걔가 우리 애들하고 잘 놀았지.
당신 보고싶어서 설에 우리집에 오겠다잖아.
당신에게 자기 애들도 인사시키고 싶다잖아.
당장 나따라 올 것처럼 당신 얘기에 신나하더라고.
그래서 슬퍼지더라고.
슬프면서 고맙더라고.
나올 때 큰조카가 따라나오길래 걔에게만 말했어.
너만 알고 있으라고, 누나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지.
걔가 정말 우리집에 올까봐 걱정돼서 말했는데,
내 본심은 그게 아니었나봐.
누군가를 붙잡고 말하고 싶었나봐...
......미안해 여보."
<당신이 왜 미안해. 잘했어. 나도 조카 보고싶다. 봄에 나 더 좋아지면 오라고 해. 걔가 불고기를 좋아했었는데 요새도 좋아하려나. 늦기 전에 나도 같이 조카랑 술 한 잔 하고 싶네.>
일곱형제의 큰아들에게 시집온 외숙모는 작지만 야무진 분이셨습니다
저희 엄마는 그런 숙모를 제게 자주 칭찬하셨죠
딸을 낳고는 키우고 학교 보내는 데에 누구보다 열심히 사셨어요
걱정 많은 딸이 조금이나마 돈도 벌어오고
둘째도 직장 잡아 이제 편한 노후를 그릴 때
하늘은 야속하게도 숙모에게 치매를 내렸습니다
숙모가 건강하게 오래 사시길, 작은 것에도 웃을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