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달에 태어난 내 이름은 봄 춘, 꽃 화 '춘화'다
첩첩산중의 겨울은 지독히 매섭기 때문에 사람들이 봄을 갈망하는 건 당연하다
우리 동네는 한반도에서 가장 긴 산울타리인 태백산맥에서
서남향으로 소백산맥이 갈라지는 산맥들의 그 기묘한 사타구니에 자리했다
앞에는 저수지가 있어 국민학교 때까지 나룻배를 타고 물을 건너야 했다
중학교를 가려면 저수지를 건너고 하루에 세 번 오는 버스를 타고 면소재지에 가야했기에
4남2녀 중 다섯 째인 나는 국민학교 졸업장으로 만족해야 했다
졸업하고는 줄창 밭농사 돕는 일만 하고 살았다
그래도 답답한 건 몰랐다
어쩌다 엄마따라 장에 나가면 읍내가 신기했지만 그것도 일년에 두어번이었기에
남들도 나처럼, 옆집 순이처럼, 뒷집 봉석이처럼
일어나면 소꼴 베고, 밭일 하고, 점심 먹고 그늘에서 한숨 잔 후 해질녘까지 밭일하는 게 일상인 줄 알았다
남과 비교하면 인생이 슬퍼진다지만 당시 나는 비교할 일상보다 내 일상이 나았다
나는 순이보다 형제가 많아 일도 적게 했고
봉석이처럼 남자가 아니라 힘든 일은 안 했다
스무살이 넘어도 출가할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동네에서 결혼식을 본 적도 없었고 여자로서 남자를 좋아한다는 개념도 몰랐다
뒷집 봉석이가 코밑과 턱이 거뭇해져도 어깨가 벌어져도 팔뚝에 핏줄이 도드라져도
봉석이는 같이 깨벗고 멱감던 봉석이일 뿐이었으니까
스물넷에 아빠랑 장에 가서 닭을 사온 적이 있다
그 후 다음 장에 다녀온 아빠가 사내를 데려왔다
"너랑 결혼하고 싶다는 데 너는 어떠냐?"
아빠가 내뱉은 몇 안 되는 단어들이 하나도 귀에 안 들어왔다
나는 그때 겁먹은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싫어요."
사내는 집밖을 둘러본 후
"우리 영월은 여기에 비하면 참 도시요. 아, 그렇다고 여기를 무시하는 건 아니요. 나도 춘양에서 나고 자랐소. 춘양 알지요? 봉화 춘양."
나는 답하지 않고 획 돌아 방으로 들어갔다
사내는 장돌뱅이였는데 장마다 오는 아빠를 붙잡고 딸을 달라고 사정했다
한 달 후 사내는 다시 집에 왔는데 손에는 고기를 싼 신문지 뭉치와 소주 댓병이 들려있었다
마을 친척까지 우리 집에 모였고 작은 잔치가 벌어졌다
나는 그때까지 사내랑 결혼할 생각이 없었지만 나 외에 모든 사람들이 결혼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탄 것 같았다
사실 한 달 동안 전혀 생각 안 해본 건 아니었다
순이가 전 해에 제천으로 시집을 갔는데 지난 설에 미색 천에 수선화가 수놓인 치마를 입고 와서 도시물이 좋긴 좋구나 생각했었다. 읍내 사는 저이에게 시집가면 나도 좋은 옷 입고 배 안 곯고 살겠구나 싶었다
그치만,
저이는 눈도 작고 얼굴은 시커멓고 어깨도 봉석이보다 좁은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장돌뱅이인 것도 술이 도는 마당에서 들리는 말을 듣고 알았다
아빠는 첫 날 알았으면서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사내는 아빠와 집안 어르신들께 약조를 받고 갔다
나는 세 달 더 집에 머물다 집이 마련됐다는 전갈을 받고 사내에게 갔다
한 달 후 읍내 예식장에서 신식으로 식을 올렸다
시작은 좋았다
나도 드레스를 입어봤다
종일 가래골에서 읍내까지 온 친척들에게 예식장 밥을 접대했다
또 지겨운 산이지만 설악산으로 신혼여행도 갔다
돌아오니 단칸방이지만 우리집도 있었다
가장 좋은 건 시부모가 없었다
시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시어머니는 개가해 남도 바닷가에 사신다고 했다
이복형제들이 있었지만 자주 왕래하지 않았다
나의 하루는 가래골과 다르게 게으르고 단촐했다
소꼴 베러 일찍 일어날 필요도 없었다
불쏘시개로 아궁이에 불을 지필 필요도 없었다
잠이 많은 그이라 나도 느즈막히 일어나
주인집 정제로 가서 풍로에 성냥으로 불을 붙이고 냄비밥을 했다
아침은 먹은 그이는 트럭을 끌고 장을 나갔고
나는 방 하나 청소하고 옷 한두 벌 빨고
마루에 앉아 고향의 것과 같은 해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영월도 사방이 산이라 고향과 다를 바 없었지만 영월의 해는 길었다
그이의 출장도 길었다
장돌뱅이라 오일장에 나갈테니 오일에 한 번 외출하는 줄 알았다
실제로는 오일에 한 번 집에 오는 날이 많았다
근처 장만 아니라 제천, 원주, 충주, 문경 등 생전 들어보지 못한 먼 타지로 다녔다
첫 애를 낳을 때도 그이는 장에 있었다
첫 애가 태어나자 그는 더 멀리 나갔다
청도에 가야 좋은 사과를 매입할 수 있다고 했고
춘천에 가야 더 많이 팔 수 있다고 했으며
겨울에는 전라도까지 가서 곶감과 고구마를 사왔다
그이의 트럭은 늙어갔고
나는 애를 둘 더 낳았다
첫째는 아들이었고 둘째는 딸이었다
애 보는 걸 가르쳐줄 시엄니도 없으니 스스로 알아서 키워야 했다
둘째는 떼가 심했다. 잠도 설쳐댔다
겨우 둘째 업고 일할 수 있을 때 셋째가 들어섰다
내 손은 두 개인데 셋을 어찌 키우나 겁이 났다
옥수수 따서 쪄먹다가 셋째를 낳았다
감자만한 얼굴에 조약돌 같은 눈을 가진 아이었다
아이가 울고 보채도 기운이 나지 않았다
젖이 부풀어 아려오니 애를 더 안기 싫었다
마루에 아이를 눕혀놓고 강바람에 열을 식히고 있었다
아이가 갑자기 헤죽 웃었다
나는 너를 보고 웃은 적이 없는데 웃더라
나는 너를 두고 동강에 몸을 던져 편해지고 싶었는데
너는 나를 보고 샘물처럼 맑게 웃더라
하느님이 손을 뻗어 아이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나보다
어서 웃어 엄마랑 행복하라고
애가 셋이 됐어도 남편의 출장은 줄어들지 않았다
더 많이 팔 수 있다며 더 멀리 다녔으나 집에 가져오는 돈은 읍내장날 수익과 다를 바 없었다
술도 도박도 안 하는 남편이 왜 돈을 못 벌까 궁금했었다
셋째가 다섯 살때부터 남편을 따라 장을 다녔다
애들 방학이면 고모집에 애들을 맡기고 며칠씩 지방도 같이 갔다
일 년 같이 다녀보니 남편이 돈 못 버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남편은 사업머리가 없는 사내였다
전라도 여수에 절인생선을 사러 갔다가 주인장이 재고라며 문어를 떠넘겼다
남편이 넘겨 받으려는 걸 내가 나서 경상도에도 문어가 많다고 마다했지만
그쪽 돌문어와 여수 피문어는 다르다며 막무가내였다
마다하지 못하는 남편은 결국 덤으로 소라 몇 개 받고 샀다
그러면서도 오는 내내 비싸게 문어를 팔았다며 '전라도 것들' 운운하면서 주인을 욕했고
영월장에서 포항 문어보다 비싸게 팔아 한 마리도 못 팔고 결국 다 버렸다
그 후 나는 일을 하러 나갔다
남편만 믿고는 살 수 없음을 깨달았다
시골에서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닥치는 대로 했다
식당에서 설거지도 하고 전도 부치고
시장에서 전병도 말고 배달도 하고
동강에서 올갱이도 줍고 피라미도 낚았다
봄에는 밭에 가서 땅을 갈았다
여름에는 산을 헤집으며 곤드레 나물을 꺾었다
가을에는 배추 뽑으러 천지를 돌아다녔다
겨울에는 일이 없었다
시간이 나니 아이들과 많이 놀아줄 수 있었지만 밤이면 한숨이 나왔다
이듬해 봄이 되자마자 김치공장에 취직했다
안정적으로 수입이 생기니 살림이 나아졌다
애들 납부금도 밀리지 않게 됐고
장마면 잠기는 집에서 이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편도 동네에 정착했다
남편은 동네에 가게를 내고 농작물 도매상을 했다
감자, 옥수수, 배추, 더덕 등 사고 팔 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이 모이지는 않았다
희한하게도 남편이 밭떼기로 산 작물만 그해 풍작이라 가격이 낮았다
남편은 더 많은 밭을 돌아보러 나돌았고
애들은 커가면서
내가 무치는 김치는 더 늘었다
다행히도 애들은 공부를 잘 했다
불행히도 시골이지만 공부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가혹하게도 애들은 일찍 철이 들었다
큰애는 군대 대신 산업체 위탁 근무를 했고
둘째는 인서울 대신 지방 국립대 장학생을 택했다
막내만은 내 힘으로 막내가 원하는 대학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막내가 수능볼 때 남편은 보증을 잘못 섰다
광고를 하겠다던 막내는 간호대 합격증을 받아왔다
큰애는 스물여섯의 나이에 첫 직장에서 만난 여자와 결혼했다
똑똑하고 예쁜 서울 여자였다
둘째는 스물일곱의 나이에 애를 가져서 사내와 인사를 왔다
순하고 착한 서울 남자였다
둘째를 시집 보내는 날, 막내와 나란히 누웠다
"너는 시집 늦게 가라."
-걱정 마. 엄마랑 오래 같이 있을 거야
막내는 서울에 직장을 잡았다
일이 바쁜데도 쉬는 날이면 두 시간을 달려 집에 왔다
아침에도 오고 밤에도 왔다
일이 아무 때나 끝나니 아무 때나 올 수 있어 좋다고 했다
막내는 스물일곱의 나이에 또 다른 시험에 합격해 김치 무치며 오무라든 내 어깨를 펴줬다
그날 주인공인 막내 없이 마을잔치를 열었고 노래 한 자락 하라는 성화에 나는 춤까지 추었다
그 시절 우린 평화로웠다
자식 둘은 아이를 낳아 잘 키웠고
막내는 우리집의 자랑이었다
단 하나 남편이 문제였다
남편은 그 사이 농작물 도매를 그만두고 구급차를 운영했다
친척의 일을 이어 받은 것인데 운전 하나는 오래 해왔으니 능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운전은 잘했다. 다만 돈을 모으지는 못했다
환자를 실어나르고 현금으로 받다보니 눈먼돈이 되었다
어디서든 남편은 주머니 속의 현금으로 기분을 냈다
술도 못 먹는 양반이 동네에서 술을 제일 잘 샀다
주머니에 현금이 가득했지만 주머니 부피는 기껏 한줌이기에 남편 전재산은 수십만원에 불과했다
막내가 서른이던 해에 사내를 데려왔다
착해 봬지만 한량 같은 전라도 남자였다
며느리와 큰사위와는 다르게 "어머님, 아버님" 싹싹하게 다가오는 게 나쁘지 않았다
술도 먹을 줄 알고 재미나게 말할 줄도 알고 상 치울 땐 벌떡 일어나 거들었다
우리집 남자들과는 달랐다
우리집 고인물, 남편의 생각은 달랐다
'전라도'도 문제고 기술 없어 보이는 직업도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나 막내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결혼을 앞두고 남편에게 돈을 얼마나 해줄 수 있냐고 물었지만 구급차 대출이 많이 남았다며
직장생활을 3년이나 한 애가 혼자 시집도 못 가냐고 성을 냈다
막내가 3년간 번 2천만원이 구급차와 가게 내는 데 들어갔는데
남편은 주머니 털어 돈 쓰더니 제돈으로만 사는 줄 알고 있었다
서른하나가 되던 해 막내는 결혼했다
김치공장 다니며 모은 천만원을 딸에게 보내면서
"우리가 받은 게 많은 데 이것밖에 못 줘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내가 받은 게 얼마인데 더 못 드리고 이렇게 일찍 나가서 미안해, 엄마"라고 메아리 쳐 왔다
"미안해"는 뭐에 대한 미안함일까 한참 생각했다
받은 게 많아서?
더 못 드려서?
일찍 나가서?
다음날 입을 한복을 다리면서 울었다 '엄마라서 미안해.'
나의 60대는 평화로웠다
공장에서의 노동은 고됬지만 걱정할 일이 없었다
유일한 걱정거리인 남편은 잔소리한다고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포기했다
때 되면 자식들이 찾아오고
와서 같이 하하호호 재미나게 시간 보내고
일 끝나면 친구들과 막걸리 먹고
때 되면 버스 타고 놀러 가고
주말이면 남편과 꽃도 보러 가고 맛집도 갔다
화려하고 대단한 삶은 아니었지만,
마르지 않고
멈추지 않고
변하지도 않는 강 같은 생이었다
가히 '춘화'같은 삶이었다
'꽃이 시들다'
만개한 꽃이 영원할 수 없듯 나의 평화도 오래 가지 않았다
'인생칠십고래희 : 나이 칠십은 옛부터 드물다'
백세시대라지만 '고희'의 운명은 유효하다
73세 설날에 남편이 죽었다
남편은 70에 중풍으로 쓰러졌다
담배와 믹스커피를 입에 달고 산 남자의 운명이었다
운동을 안 하던 사람이라 회복이 안 됐다
퇴원해서 힘겹게 1년 더 일하다가
은퇴하고 어렵게 1년 집에서 살다
상경해서 병원에 1년 있다 죽었다
아픈 몸으로 일하던 때에는 돈에 미련이 생기면 안 되는 사람처럼 주위에 베풀고 다녔다
집에서 있을 땐 운동도 게을리 하고 담배는 계속 했다
어느날 출근 준비를 하는데 쿵 소리가 났다
예견했지만 내 심장도 쿵, 떨어졌다
그길로 인수인계한 자신의 옛 구급차를 타고 서울 요양병원으로 갔다
딸 둘이 사는 동네였고 아들과는 십여 킬로미터 거리였다
전업이던 둘째가 수시로 낮을 지켰고
막내는 퇴근길에 들러 일하듯 아빠를 돌봤다
아들은 주말에 다녀갔다
그 설날,
아들은 아빠가 병원에 계시니 내게 올라오라고 했다
딸들은 시댁에 갔다
그 설날 오전 11시
둘째는 상을 치우고 성묘를 가려던 참이었고
막내는 시댁에서 서울로 막 출발했을 때였다
남편은 예고 없이 호흡을 힘들어하더니 30분만에 떠났다
비슷한 고비가 몇 주 전에 있었던 터라 이번에도 넘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렀다
명절이라지만 아이들, 사위들의 직장동료들도 멀리에서 찾아왔다
명절이라지만 남편에게 밥 얻어먹던 무리의 절반은 오지 않았다
그래도 남편의 이복형제들은 삼일 내내 빈소를 지켰다
장례식 후 아들이 일주일 더 남아 정리를 했다
사망신고를 하고 남편 통장도 정리했다
남편이 죽어서야 그의 호주머니를 볼 수 있었다
빚이 1억2천
아프기 전에 친구에게 맹지 1천평을 1억에 샀는데 빚이었다
그 친구가 그곳에 고속도로가 난다고 했단다
아들이 그 땅을 팔려고 봤더니 9천이란다
이후에도 과태료, 세금 등등 고지서가 날라들었다
그 종이들이 유서 같았다
49재에 다시 모두 모였다
상을 준비하는데 며느리가 교인이라는 이유로 상 차라리는 걸 거부했다
교회 다닌 지가 십 년이 넘었는데 49재에 선언해야 했을까
그간의 제사들은 신앙심이 부족해 지내왔던 걸까
제사가 끝나고 아들이 더 매운 선언을 했다
"제사를 지내지 맙시다"
나는 누구보다 남편을 미워했다
누구보다 남편을 추모하는 데에 노력 할 마음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아들의 선언은 서운했다
아버지 향이 아직 다 타지도 않았는데 아들은 왜 서두를까
그 해 추석에 며느리는 아이가 고3이라는 이유로 내려오지 않았다
이듬해 첫 제사에 며느리는 교인이라는 이유로 상을 차리지 않았다
옆에서 아들도 이번이 마지막 제사라고 못을 박았다
나도 상 차릴 마음이 없는 사람이다
요즘은 다들 명절에도 상 안 차리고 여행다니니 우리도 제사 지내지 말고 마음으로만 기억하자고 했다
막내가 울었다
막내도 나만큼 아빠를 미워한다
막내는 아빠가 남기고 간 숫한 고지서들을 처리하면서 화가 나 울던 아이다
그런 막내가 울었다
막내가 나와 같은 마음일지 모르겠지만 그날밤 나는 남편 죽은 후 처음으로 남편 생각에 울었다
막내가 새언니와 얘기 하고 내게 전했다
며느리는 내가 남편 아플 때 정성껏 보살피지 않았다고 밉다고 한다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좋아했다
남편도 며느리에게 잘해줬던 것 같다
내가 아픈 남편에게 잘해줬던 건 아니다
그렇다고 못한 것도 없었다
병원비를 벌어야 해 일을 계속 했고 며느리보다 더 자주 병원도 갔다
남편이 밉다고 병수발도 안 할 정도로 매정하지는 않다
그 해 추석에는 아들 집으로 올라갔다
아들은 아들노릇하려 나를 불렀지만 나는 편하지가 않았다
그런 내 마음을 막내가 알고 다음 설에는 막내집에 모였다
막내는 "우리집이 그래도 크고 아직 아이들이 어려 방이 남으니 우리집에서 모이자"고 제안했다
같은 단지에 사는 둘째가 동의했고
당황한 아들보다 며느리가 먼저 동의하니 아들도 따랐다
나는 혼자 잘 지내고 있다
아직 일을 하지만
가끔 친구들과 술도 마시고
더러 친구들과 여행도 다니고
수시로 둘째, 막내 가족들과 여행도 다닌다
외롭지도 무섭지도 않다
올 봄에는 길고양이도 들였다
퇴근길에 수로에서 울음소리가 나서 봤더니 새끼고양이 세 마리가 있었다
칠십 평생 길고양이를 지나쳤는데 그땐 새끼들을 품에 안았다
친구 둘을 불러 막걸리를 돌리면서
각각 한 마리씩 책임지기로 약조했다
보리가 필 때 내게 온 아이라 '보리'로 이름지었다
춘화에 새 봄이 들었다
보리가 생기니 변화가 일었다
고양이를 키우는 며느리가 고양이 용품과 간식을 보내줬다
보리를 보러 내려오기도 했다
며느리는 선배 집사의 지위로 내 손을 들어 고양이 안는 법을 가르쳐줬다
며느리와 살이 닿은 게 얼마만일까
떠나는 며느리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보리에게도 고맙다고 말했다
이번 추석에는 아들집으로 간다
딸들은 추석에 시댁에 가야하니 추석마다 나는 아들네와 있게 된다
추석 당일에 갔다가 이튿날 내려온다
보리를 홀로 두기 어렵다고 아들에게 말했지만 모두가 만족할 일정인 것을 안다
혼자 연휴를 보내도 보리가 있어 이제 괜찮다
괜찮은데, 보리와 버티기엔 이번 추석이 너무 길다
홀로 사는 사람에게 명절은 고문이다
막내에게 연락이 왔다
막내가족이 토요일에 우리집으로 온다고 한다
전라도 끝에서 영월까지 오는 데 7시간이라서 설은 우리로 추석은 시댁으로 가는데
이번 추석은 길다며 온다고 한다
오랜만에 장에 나가야겠다
콩가루를 사서 봄에 얼려놓은 쑥에 묻혀 된장국을 끓일테다
막내는 그 쑥국을 먹으면 홍수에 마당이 잠긴 옛집에서 그 국을 마시며 위로를 받던 그때가 생각난다고 좋아한다
막걸리와 문어도 사서 운전하느라 고생한 사위를 먹여야겠다
소고기도 사서 손주들 좋아하는 불고기를 해야겠다
이번 추석은 신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