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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작 Apr 09. 2024

[E] 서울엄마 볶은김치


포장도 되지 않은 도로에는 하루 버스 다섯 대만 오고갔다

그런 시골에 온천이 터져 국딩 4학년 때 개발이 시작됐다

순기는 개발바람과 함께 서울에서 전학온 하얀 얼굴이었다


우리집은 동네에서 비켜있는 외딴집이었고

순기집은 동네에서 우리집으로 향하는 길목의 끝집이었다

담임은 내게 같은 동네니 같이 다니라고 했다

그날로 나는 순기와 짝꿍이 됐고 그 놈 얼굴을 보자면 내 얼굴이 더 까맣게 느껴져 괜히 싫어졌다


점심시간이 되자 자연스레 우리 자리로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열개의 까만 눈동자는 순기의 손을 좇았다

손기 손에는 우리에게 없는 것들이 닿았다

우리는 철제 도시락이었지만 순기는 플라스틱 도시락이었다

도시락 가방을 책상에 올리고

가방의 지퍼를 열고

2단 도시락을 꺼내고

클립을 풀고 도시락통을 나란히 펼쳤다

숨이 멈췄다

저 비밀스럽게 하얗고 고급지게 코팅된 플라스틱 도시락에서 뭐가 나올지 궁금했다

큰 통을 여니 하얀 쌀밥이 나왔고(이때도 보리밥을 싸오는 친구가 있었다)

작은 통을 여니 계란말이가 나왔다(우리들 계란말이에는 으레 쪽파가 들어갔지만 순기의 계란말이는 순결했다)

마지막 통을 앞두고 까만 얼굴들은 상기됐다

TV에서 보던 스파게티나 동그랑땡, 하다 못해 계란 입힌 소세지라도 나올 줄 알았다

하얀 손이 뚜껑을 여니 진한 갈색의 볶은김치가 나왔다

우리는 볶은김치에 김이 샜다


순기는 사흘 연속 볶은김치를 싸왔다

"너 이거 엄청 좋아하나 보다?"

-좋아하기는 한데, 한 번에 많이 했는지 계속 싸주시네. 먹을래?

나도 집에서 먹던 거라 낯선 반찬은 아니었지만 서울 볶은김치는 어떤가 궁금했다

한 젓가락 집어 입에 넣었다


10년 평생 달콤하고 고소한 볶은김치는 처음이었다

우리가 먹던 볶은김치는 시큼하고 젓갈내 나는 단순한 맛이었다

그런데 서울 볶은김치는 김치답지 않게 달콤했고 김치임에도 고소했다

그날 나는 엄마가 마음 먹고 싸준 스팸구이를 볶은김치와 바꿔먹었다


집에 가자마자 나는 엄마에게 내가 먹은 볶은김치를 소개했다

엄마는 내일 볶은김치를 싸주겠다며 웃었다


다음날 점심 설렘을 누르고 반찬통 뚜껑을 열었다

시큼한 김치 냄새가 확 올라와 열한살에게 상처를 줬다

집에 가자마자 엄마에게 이런 볶은김치가 아니라고 다시 설명했다

엄마는 볶은김치가 다를 수 있냐며 남은 건 저녁상에 올릴테니 남길 생각을 하지 말라며 엄포를 놨다


다음날 점심은 설렘과 의심을 동시에 지닌 채 열었다

빨강에 가까운 김치가 내게 실망감을 넘어 모욕감을 안겼다

집에 가자마자 엄마에게 

"이 색깔이 아니라고! 갈색이여 갈색! 저 부지깽이 같은 갈색이라고!"

-김치가 어째 갈색이 된다냐! 묵은지래? 태웠대? 암만 볶아도 갈색은 될 수 없당께!

엄마는 녹슨 부지깽이를 들어 부엌에서 나를 내쫒았다


같이 하교를 한 지 일주일쯤 지나 순기는 나를 집에 초대했다

서울새댁 순기 엄마는 동네에서 볼 수 없던 긴 머리를 묶고 앞치마를 두른 채 부엌에서 나와 인사했다

서울엄마에게서는 고소한 냄새가 났다

순기엄마 냄새가 아니라 부엌에서 따라나온 냄새였다

그랬다. 순기엄마는 볶은김치를 하고 있었다


"반가워~ 우리 순기에게 잘해준다는 얘기 들었어. 고맙다. 환타 마실래? 아줌마가 지금 반찬하고 있는데 불 줄이고 음료수 가져갈테니 마루에 올라가 있어."

우리네 말투와 다른 말로 순기엄마는 내 혼을 빼놨다

정신을 차린 건 순기엄마가 들고온 환타와 절편을 보고서다

허기를 채우자 궁금해 미칠 것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아줌마, 볶은김치 어떻게 만들어요?"

순기엄마는 잠깐 당황, 짧게 웃음 그리고 긴 설명을 내놨다

우리 엄마 볶은김치와 다른 건 설탕과 조리시간이었다


순기집을 나와 달렸다

심봤다를 외치고 싶었다

비법이 기억에서 사라질까 입 안에서 계속 굴리며 달렸다

부리나케 부엌으로 들어서니

엄마가 풍로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숨을 고르니 그제야 냄새가 코에 들어왔다

볶은김치였다

순기네와 우리집 볶은김치 중간 정도의 냄새였다


"엄마! 설탕을 넣고 약한 불에 한 30분 끓여야 된댜!"

엄마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며 부엌에서 날 내쫒았다

나는 등떠밀려 나가는 순간에도 "국 끓이듯이 끓여야 한대! 볶으믄 탄댜!"라고 비법을 전수했다


그러나 그 후 며칠 동안 볶은김치는 도시락에도 상에도 올라오지 않았다

분명 부엌에는 고소한 냄새가 배어있지만 밥상에는 올라오지 않았다

그 사이 나는 순기의 볶은김치를 점심마다 먹었기 때문에 애써 엄마에게 보채지 않았다


다시 며칠 후, 순기가 우리처럼 나물반찬을 싸왔던 어느날

난 반찬통을 열고 순기와 바뀐 줄 알았다

내 반찬통에 순기 도시락에서 보던 갈색의 고소한 볶은김치가 들어있었다


하교 후 부엌으로 달려가 엄마에게 맛있게 먹었다고 인사했다

그후로도 볶은김치는 자주 볼 수 있었고 나는 그때마다 남김 없이 먹었다



지난 주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옛날도시락 메뉴를 먹었다

11살이 된 딸이 내 도시락을 궁금해 하더니 자기도 한 입 달라고 한다

밥 위에 분홍소세지를 올리고 볶은김치를 올려서 줬다

맵찔이가 잘 먹을까 싶었는데 우걱우걱 씹으며 엄지를 치켜든다


방학 때 돌봄을 나가는 딸이 오늘부터 도시락을 먹게 됐다

어제 메뉴를 물어보니 휴게소 도시락처럼 싸달라고 한다

볶은김치에 김가루도 꼭 챙겨달라고 주문한다




곧 반찬통을 열 아이가 어떤 표정일지, 맛은 어땠을지 궁금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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