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활짝 폈으니까 주말에 놀러오렴"
지난 수요일, 시골에 계신 엄마가 전화로 개화를 알렸다
우리 시골은 봄꽃이 유명한 곳인데 올해는 예년보다 보름쯤 개화가 일렀다
금요일 퇴근 후 운전대를 잡았다
딩동.
가끔 경조사에서나 보던 육촌형에게서 문자가 왔다
'모친 000님께서 별세하셨습니다'
큰어머니는 팔십 평생을 살아온 동네가 가장 아름다운 날에 돌아가셨다
큰어머니는 내게 오촌이었다
부모와 형제를 일곱살에 갑자기 잃은 아버지는 사촌형제와 가족처럼 지냈다
사촌형을 형처럼 따랐고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도 가까이 지냈다
그래서 나도 자연스레 큰아버지 자녀들과 형제처럼 지냈다
큰어머니를 어려서부터 큰엄마라고 부른 이유다
큰엄마는 괄괄한 성격에 농담도 잘해서 어린 내게도 곧잘 장난을 쳐왔다
"우리 강아지 고추 얼마나 컸나 보자"는 일곱살 때까지 듣던 인사 멘트였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나를 강아지라고 부르셨다
국민학교 운동회 때도 당신 자식들과 똑같이 내게 아이스크림을 사주셨고
내가 소풍가는 날이면 쿨피스와 빵을 사서 보내주셨다
중학교에 들어갔을 땐 운동화를 사주셨고
큰도시로 고등학교를 가게 됐을 땐 몸빼 안 주머니에 꼬깃해 둔 5만원을 꺼내 엄마 몰래 찔러주셨다
엄마와 큰엄마는 둘 다 비교적 외지에서 시집온 케이스로 서로 의지가 컸다
큰엄마는 엄마보다 세 살이 많았고 5년 일찍 시집오셨다
중학교 때까지는 걸어서 30분 거리에서 살았음에도
우리 동네는 산간오지였기 때문에 둘은 친정에 대한 그리움을 서로에게서 찾으며 정을 쌓았다
아빠가 술 먹고 밥상을 엎으면 엄마는 큰엄마에게 가서 달이 동쪽으로 기울 때에나 돌아왔다
보통 우리 엄마가 큰엄마를 찾아갔었는데
내가 중학교 때인가, 한밤 중에 큰엄마가 엄마를 찾아왔다
둘은 작은 방에 들어가 한참을 얘기했는데 더러 엄마가 눈물을 훔치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에게 무슨 일이 있나 걱정하다 큰엄마가 나오는 것도 못 보고 잠들었었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몇년 전 큰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는 그때 일에 대해 말해줬다
큰아빠는 큰엄마와 약혼을 하고서 군대를 갔는데
부대앞에서 슈퍼를 하던 분이 큰아빠를 좋게 봐서 자기 딸과 혼사를 주선했다고 한다
큰아빠는 시골에 약혼녀가 기다리고 있다며 마다했지만
4년이 넘던 군생활은 혈기왕성한 청년에게 너무 길고 너무 고독했다
큰엄마가 우리 집에 와서 밤을 지새고 간 날,
서울에서 어떤 여인이 장성한 아들과 집에 찾아왔다고 한다
큰아빠가 휴가 중에 슈퍼집 딸과 정을 나눴는데 그대로 애가 들어섰다
여자는 제대를 앞둔 남자에게 임신을 밝히지 않았다
남자는 작별인사를 하고 시골로 돌아갔고
여자는 고향을 벗어나 서울로 가 홀로 아들을 키웠다
아들이 결혼을 앞두고 아버지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여자는 애비 없이 아들을 키웠지만 남 손가락짓 받지 않게 잘 키워냈다고 자부했다
아들 또한 아버지의 부재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바르게 자랐지만
자신이 새로운 가족을 만들게 되자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둘은 처음이자 마지막, 딱 한 번 보는 것을 약속하고 아버지를 찾기 시작했다
부대를 찾아가고 국방부에 수소문하고 읍사무소, 면사무소까지 뒤져
서울에서 반나절 거리, 고향에서 한 나절 거리의 그 시골까지 왔다고 한다
큰아빠는 손님 맞을 식당이 있는 큰동네로 가 둘을 만났고 서너시간 지난 날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서로 원망과 미움 없이 만나고 헤어졌다고 한다
아쉬움과 미련까지 없다고 자신할 수 없지만 다시 만날 인연이 아님을 확인하고 인사했다고 한다
그런 일을 큰엄마는 결혼 스무해가 지나 자식 셋을 다 키워낸 후 들었으니
속이 타서 그 밤에 30분 걸어 우리 엄마를 안 찾아오고 못 배겼을 게다
토요일
엄마를 모시고 큰엄마 장례식장을 찾았다
"형님 왜 먼저 가! 나랑 더 있다 가야지 먼저 가면 난 어쩌라고..."
엄마가 주저 앉아 곡을 했다
큰집은 십수년 전에 모든 이가 교회를 다녀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큰엄마 영정 아래에는 "목례나 묵념으로 해달라"고 친히 써져 있어 엄마의 곡이 더 스산했다
우리 엄마는 곡을 잘 했다
요즘 장례식장에서는 곡을 들을 일이 없지만
어렸을 적, 동네에 초상이 나면 곡소리는 시간 단위로 20여분 이어졌었다
"아이고~ 아이고~" 이 말 외 다른 곡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귀천을 떠도는 여자귀신들의 한맺힌 소리가 있다면 그런 소리일테다
어렸을 때 우리 엄마가 남의 장례식장에 가서 곡을 하는 걸 보면
우리 엄마가 뭐 그리 서러운 게 있어 저리 슬피 우나 궁금할 정도였다
반나절 가까이 장례식장을 지켰다
엄마 외 누구도 곡을 하지 않았다
조문객 중 엄마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이도 없었다
큰엄마와 비슷한 나이와 지위였던 친척들도 보이지 않았다
"엄마, 00고모는 왜 안 와?"
"엄마, 00숙모는 오실 수 있지 않나?"
내 물음에 엄마의 답은 비슷했다
00고모는 다리가 아파서 방을 못 나선다
00숙모는 당뇨로 병원에 입원한 지 석 달째다
이제 엄마세대에서 평생 친구였던 이의 마지막을 보러 가는 일마저 제맘대로 할 수 있는 이가 없다
이렇게, 늙는 건 서럽고 외롭다
일요일 아침 큰엄마를 멀리 보내드렸다
엄마는 의전차에 한참을 매달렸다
주름 가득한 얼굴이 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화장장에 가면 엄마가 쓰러질 것 같아 집으로 돌아갔다
동네 어귀는 꽃구경을 온 외지사람들로 가득했다
초입에서 집까지 가는 3킬로가 차로 가득해 1시간이 걸렸다
차에 앉아 노오란 꽃망울을 구경할 수 있었다
"내가 가을에 시집 왔는데 곳곳에 빨간 열매들이 있어서 신기했다
근데 그 열매 때문에 겨우내 힘들지는 몰랐지(열매를 따서 과육을 벗긴 후 한약재로 판다)
한 겨울 보내니까 산수유는 쳐다도 보기 싫더라고
그런데 봄이 되니 저 노오란 꽃들로 사방이 가득한 거야
겨우내 힘든 게 다 잊혀지더라고
그렇게 한 해 한 해 살아온 거지."
올해는 작년보다 꽃이 더 맑았다. 엄마가 내년 봄에는 더 노랗고 큰 꽃을 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