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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안아주기만 하면 됐던 거야

by 구작

고객님께 오늘 청소할 내용에 대해 말씀 드리고 정수기의 전원을 껐을 때였다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벌써 세 번째 전화라 미룰 수 없었다

"고객님 죄송한데 잠깐 화장실 좀 써도 될까요?"

>그럼요, 저 문입니다


"무슨 일인데 자꾸 전화해?"

-왜 카톡을 안 봐!

"일하잖아. 회사에서 오는 연락 쳐내기도 바쁘다구. 무슨 일인데?"

-나 오늘 늦는다고. 상무님 승진해서 축하연이 있어

"언제는 내게 허락 받고 늦었어? 왜 이렇게 전화를 해대?"

-아니 어제 아프다고 애들 좀 봐달라고 했잖아. 오늘 못할 거 같은니까 그러지

"....... 알았어, 끊어."


한숨이 길게 나왔다

세면대의 수전이 빛났다

모던한 디자인의 블랙톤 세면대에 거울 같은 수전이 빛을 내고 있었다

이런 수전은 얼마일까?

이렇게 비싼 건 물때도 끼지 않으려나?

물을 틀었다

'쏴아' 깨알 같은 거품으로 이루어진 물이 쏟아졌다

'비싼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은 거품마저 부유하구나'

손을 씻고 얼굴을 들었다

거울의 나는 아무 색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빨리 할게요."

>천천히 하세요. 당장 물 먹을 사람도 없으니까 급할 거 없습니다

식탁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던 고객은 온화한 미소로 답했다

그리곤 일어서더니 냉장고에서 자몽주스와 홍삼진액포를 꺼내 건넸다

>이런 걸 좋아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수기 청소 일을 한 지 2년째이다

두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새로 찾은 직장이다

처음엔 영업을 해야했는데 재주가 없어서 필터 교체와 청소 담당으로 전환했다

매일 여러 집들을 옮겨다니고 새로운 사람들과 맞닥뜨리는 게 쉽지 않았지만

대부분 내게 신경 안 쓰는 편이라 오히려 편했다

몇 달 하다보니 고객과의 대화를 최소한으로 하는 방법도 터득했다

그런데 그렇게 조용히 일하다 보니

은근히 그들에게 내 존재감이

버튼을 누르면 출수구가 내려오는 기계장치와 다를 게 없지 않을까 생각이 되기도 했다

필터를 교체할 때 자동으로 와서 교체하고 청소하며 돌아가는 로봇

그런 푸념은 순간이었다

오히려

대화를 이유로 개인생활을 캐묻는 사람이나

고객이란 지위로 치근덕거리거는 남자나

나이를 무기로 훈수두는 여편네들보다는 적막이 편안했다

이 집은 1년째 오고 있는데 대체로는 사모님이 계셨지만

여름부터 바깥주인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재택근무를 하는지 늘 노트북으로 일하는 모양새다

할 일에 대해 설명을 하면

입학식 날 초등학생처럼 긴장한 얼굴로 진지하게 듣는 게 특이했다

끝날 때 다시 완료한 작업에 대해 설명하면

교장선생님 같은 넉넉한 미소를 머금은 채 들었다

노트북에 올려진 손이 가늘고 긴 걸보면 정수기 필터를 손수 갈,

굳이 공대 출신이 아니어도 어느 남자나 할,

기계나 공구에 친근한 손은 아니었다

손가락 두세 마디에 겨우 들러붙은 군살로 평생 펜을 쥐어봤을 손이다


필터를 교체하고 정수기의 물을 빼내고 있을 때 또 전화가 울렸다

물 빠지는 데 시간이 걸리기에 발신자를 확인했는데 첫째 아이였다

전화를 받아야할 것 같아 고객님을 돌아보니 진동소리를 들었는지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전화 받으세요

몸을 돌려 전화를 받았다

"응, 엄마야, 무슨 일이야?"

+엄마, 지민이가 목이 아프대

통화가 길어질 것 같아 화장실로 향했다.

"목이 아파? 기침해?"

+기침도 하는 것 같은데 목이 아프다고 울어

"열 나는지 이마 만져볼래?"

+좀 뜨거운 거 같아

"그럼 욕실에 있는 수건을 물에 적셔서 지민이 이마에 대주고 있어. 엄마 곧 갈게."

+응, 빨리 와 엄마. 내가 달래도 지민이가 계속 울어

"지민이 바꿔줘봐."

아이는 우느라, 아픈 목을 참느라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는 아이를 달래다

속이 상해서,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가 미워서,

아이를 미워하는 내가 한심해서,

가만 아이의 쉰소리만 한동안 듣다가 "지민아 엄마가 곧 갈게."하고 끊었다

다시 물을 틀고 손을 적신 후 차가워진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얼굴이 뜨거웠다

거울의 내 얼굴은 말라붙은 피가 바랜 색이었다


"고객님, 다 마쳤습니다. 30분 정도 지나야 냉수가 잘 나올 거예요."

의례적인 설명을 하면서 가방 속의 브로셔를 만지작 거렸다

이번 달에는 신규 고객 유치를 하나도 하지 못했다

이런 건 결정권을 가진 사모님들에게 영업해야 해서 이 남자에게 브로셔를 보여줘야 하나 고민이 됐다

고민하는 순간 남자가 움직였다

>잠시만요

혹시 모르니 남자에게 브로셔를 주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살림에 무지하니 쿨하게 계약할 수도 있다

오히려 설명해달라고 나를 붙잡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 가야하니 더 붙들려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남자가 종이백을 들고 나왔다

>이거 가져가세요. 아이들이 있으신 것 같던데 얼마 전에 일본을 다녀와서 군것질거리가 좀 있어요. 젤리와 사탕, 과자 같은 거예요. 조개만한 곤약젤리는 한입에 삼키면 기도가 막힐 수 있으니 꼭 쪼개 먹으라고 아이에게 일러주세요.


남자가 종이백을 건넨다

남자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내게 선물을 주고 있다

나는 브로셔를 만지던 손을 쉽게 꺼내지 못한다

남자의 얼굴을 보니 다시 교장선생님같은 얼굴로 어서 받으라 눈짓한다

나는 손을 꺼내, 바지에 한 번 닦고 종이백을 받아든다

"이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요... 자녀분들 먹을 걸 괜히 나눠주시는 건 아닌지..."

>곧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많이 사왔어요. 이웃도 주려고 산 거니까 부담 느끼지 마세요. 크게 보면 선생님네도 이웃이잖아요

종이백과 함께 닿은 그의 손이 젤리처럼 말랑하다

브로셔를 깊이 쑤셔 박고 종이백과 자몽주스, 홍삼진액을 넣었다


지하주차장 차에 올라 시동을 켰다

아이 생각에 빨리 악셀을 밟고 싶었지만 발을 뗄 수가 없었다

크게 호흡했다

나를 멈춰야 했다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길게 숨을 내뱉은 후

눈을 떴다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시계바늘은 6시에 닿아있었다

동네병원은 6시 30분까지라서 시간이 촉박했다

동네병원을 놓치면 차로 20분 거리의 어린이병원까지 가야했다

지민이는 많이 아픈지 자리에 누워있었다

이마를 만져보니 불덩이였다

첫째에게 옷을 챙겨입으라고 하고는 지민이를 들춰안았다

현관을 나서는데 가방 속 종이백이 보였다

백을 열어 젤리 몇개를 움켜쥐었다

집을 나서니 25분이었다. 늦어버렸다

어린이병원까지 달렸다

병원에는 대기환자들이 가득했다

명단에 이름을 올리니 대기시간이 1시간이었다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받지 않았다

다시 전화 했다. 신호가 싹둑 잘렸다

톡을 했다

'지민이가 열이 많이 나. 지금 어린이병원에 와있어. 그런데 나도 오늘 좀 힘들다. 중요한 자리라는 건 알겠는데 오늘 좀 일찍 와줄 수 있어?'

내 대화창의 '1'이 사라지지 않았다

+엄마... 배고파

"밥도 못먹어서 배고프겠다. 지민이 진찰 끝나면 이 아래 돈까스집 가서 먹자."

+응 엄마

++엄마

"지민이 깼니?"

++목이 아픈데 뭐가 먹고 싶어

눈물이 차올랐다

지민이를 안아 가슴 깊이 더 끌어당겼다

'바스락'

아이의 몸과 겹쳐진 점퍼 주머니에서 소리가 났다

젤리였다

나뭇잎 모양의 통에 담긴 곤약젤리는 아이가 한입에 먹기에는 컸다

붙어있던 뚜껑을 여니 단물이 곧 넘칠듯 했다

지민이 입에 대니 후루룩 마셨다

손가락 만한 혀가 낼름 곤약젤리를 찔러본다

"한번에 다 먹기에는 크니까 이빨로 잘라 먹자"

입을 열고 젤리를 물고 이빨로 자르고 입안에서 굴리더니 꿀꺽 삼킨다

다시 입을 연다. 젤리에 대한 갈망이 느껴져 가슴이 아프다

첫째에게도 젤리를 까줬더니 순식간에 삼켰다. 젤리가 내 기도에 박힌 듯 메어온다


밥까지 먹고 집에 돌아오니 9시가 훌쩍 넘었다

첫째와 둘째 모두 재우니 10시가 넘었다

짐 정리를 하고 업무보고를 서둘러 했다

집을 정리하고 빨래를 걷고 설거지도 했다

더 뭔가를 해야했지만 눈이 감겼다

해야할 일이 가득한 집안을 보고 싶지 않았다

몸이 이끄는 대로 잠들고도 싶었다

따뜻한 물을 받아 세수했다

코에 온기가 들어가고 얼굴이 씻기니 살 것 같다

햇볕에 말린, 그래서 얄팍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이젠 이런 촉감도 아프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발갛다

가난하게 메마른 수건이 얼굴에 현실을 박아놓은 것인지

며칠 추운데 계속 돌아다녀 나도 감기 기운이 있는지

복잡한 살림을 나몰라라 눈 감아 버린 게 속상했는지

얼굴에 열이 올랐다

두 손바닥으로 볼을 감싼다

손에 드는 나이는 속일 수 없다더니 중년의 손이다

주름이 많아져 늙은 손이고

손마디는 굵고 마디의 주름은 깊다

주름 가득한 손이 앙상해 더 초라해보인다

손으로 가리지 못한 눈썹은 가지런하지 못하고 원초적이다

절벽 위 억새밭처럼 경계 없이 제멋대로 났다

크고 힘있던 눈은 속눈썹의 중력에 위태롭게 눌렸다

눈 밑 지방은 가느다란 몸뚱이에 의리라도 챙기는지 탄력을 잃었다

그 허물어진 둔덕 아래에는 쓰러진 패잔병처럼 기미가 널려있다


티비를 켜고 거실 바닥에 앉아 빨래를 갠다

시계바늘은 11시를 넘어섰다

이 시간을 지나면 집에 오는 전철은 없다

지민이의 마른 기침 소리가 들린다

티비에서는 막장 드라마가 나온다

평범하게 살던 주부가 모범적인 교사와 사랑에 빠진다

교사가 메꽃의 꽃말이 '서서히 깊숙이 스며들다'라고 가르쳐주니

여자는 쓸쓸하다 말한다

메꽃을 만지는 교사의 손가락이 희고 가늘고 길다

손가락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는다

가슴이 쿵쾅거린다

티비에서 고개를 거두었다

빨래를 개던 내 손을 바라봤다

남자 손보다 못난 손이다

내 손 아래 지민이 내복이 있다

부드럽고 깨끗한 내 새끼의 내복이다

언제고 내 품에 안길 내 새끼의 껍데기다


검은 베란다 창을 바라보며 숨을 돌렸다

허리에서 통증이 기습해 곧게 펴본다

베란다가 비추는 내 허리는 곧추서지 못했다

현관이 밝혀지며 남편이 차디찬 12월의 밤공기를 끌고 들어온다

내게 휘청이며 다가오는 남편의 얼굴이 불콰하다

내 눈과 마주치니 남편의 눈이 순해진다

바닥에 내려앉는 남편이 쌓아둔 아이들의 옷을 뭉갰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내 가슴에서 무너졌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낙하했다

놀란 남편의 목소리가 커진다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더럽지만 축하해줘야 다음 인사에서 나도 승진할 거 아냐. 톡을 늦게 봤어. 애가 아프면 전화를 하지 그랬어. 이것도 나는 3차 안 간다고 하고 먼저 일어선거야."

쏟아지는 말 속에서 희망을 찾고 싶었지만 실패했다

억울하게도 연민을 발견하고 말았다

베란다로 고개를 돌렸다

밤이 더 어두워져 모든 걸 삼켜버렸으면 했지만 창에 비친 가스렌지 위의 보리차 끓는 냄비가 야속하게 하얀 김을 뿜는다

남편이 내 어깨를 부여잡고 다시 말을 쏟아낸다

남편을 멈춰야 했다

"그만해"

"됐다고"

"괜찮아"

"그만해도 된다고"

남편이 멈춘다

어깨를 움켜쥔 남편의 손이 우악스럽다


"그냥 나 한번만 안아줘."

멈칫하던 남편이 나를 안는다. 미안하다고 다음에는 안 그러겠다고 나도 노력했다고 말한다

어깨를 맞댔지만 가슴까지 붙이지는 않았다

"고생했다. 고맙다 그 한 마디면 되는데......"

머리를 남편의 어깨에 툭 떨어뜨리자 눈물이 썰물처럼 흘렀다


"미안해"

예기치 못한 내 사과에 남편이 잠시 굳었다가 우악스러운 손으로 내 등을 가만 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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