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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킹과 구원

by 구작

말 많은 여자들이 점심시간 내내 아이러브스쿨로 시끄러웠다

그 사이트를 통해 삼십여년만에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났다고 한다

이제는 흰머리가 희끗하고 배 나온 아줌마 아저씨들이지만 만나서 옛이야기 할 때면 오롯이 그때로 돌아가는 게 신기했다고 한다

옥이는 그이들을 신기한 마음 반, 겁나는 마음 반으로 지켜봤다

'나도 찾을 수 있을까?'


옥이는 그날 저녁 큰딸 연이에게 찾고 싶은 이가 있다고 밝혔다

옥이의 고향은 경기도 남부이다

구색 갖춘 시였지만 옥이는 논농사하던 곳에서 자랐다

크지 않은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나왔던 터라

미희를 어렵지 않게 아이러브스쿨에서 찾을 수 있었다

"엄마, 이 분 맞아? 미희란 이름은 이 분밖에 없는데."

'성미희' 맞다

성씨는 많지 않다

'미희'란 이름은 귀하지 않지만

은자, 미자, 순희, 옥희 등 아버지가 막걸리 한 되 사주고 받았을 이름이 천지던 그 시골에서 미희는 귀티나는 이름이었다

예쁘고 공부도 잘했던 미희였던지라 찾는 동창들이 많았나보다

게시판에 미희 얘기가 많았고 미희는 더러 한두번 짧은 인사로 대꾸하는 것 같았다

"이 분에게 쪽지를 보낼 수 있는데 해볼까?"


쪽지 보내고 2주 후 옥이는 미희 만날 날을 잡았다

전화 통화를 했는데 미희가 당장 만나자고 반가워했다

미희는 충청북도의 A시에 살고 있었다

절경이라는 호수가 유명해 옥이도 아는 도시였지만 가보지는 못했다

옥이는 연이에게 부탁해 같이 가자고 했다

고향친구이고 단짝친구였으며 가슴이 아릴 만큼 설레는 만남이지만

크리스마스 선물을 열 때처럼 두려움도 느껴져 큰딸이 필요했다

미희는 시내에 작지도 크지도 않은 교회에서 살고 있었다

남편이 목사였다

"우리 목사님은 이 교회를 혼자 일구셨어. 아들 둘에 나까지 큰 농사를 지으신 거지. 난 주님과 목사님의 보호 아래 참 행복하게 살아왔어. 이런 삶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야."

지나온 삶을 조근조근하게 읊는 미희의 얼굴이 달처럼 환했다

미희는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어렸을 때처럼 예쁘고 맑았다

미희에게만 시간이 멈춘 듯 했고 잔주름 없는 얼굴에 그가 말하는 행복이 팽팽하게 자리했었다

옆에서 기도하듯 미희 말을 듣던 목사도 호수처럼 평온한 얼굴로 그들 가정의 안락을 비춰냈다

"목사님 우리 과일 먹을까요?"

미희의 말에 목사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나더니

"여보, 어느 접시에 낼까요?"라고 목사가 말하자 미희가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연이는 옥이에게 "저 이모 정말 예쁘다. 공주 같아."

옥이는 팔자주름에 접힌 볼을 한껏 부풀리며

"쟤는 시집 잘 갈 줄 알았어. 학교다닐 때도 남학생들이 가방 들어주겠다고 난리였다니까."



옥이와 미희는 계절마다 A시와 서울을 오가며 끊겼던 우정을 쌓아올렸다

미희네에 갈 때마다 옥이는 목사와 미희의 단란한 모습에 안도했다

미희가 사랑 받고 사는 모습에 자신이 친정엄마가 된 듯 했다

미희는 목사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듯 했고

목사도 미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충심으로 존중하는 듯 했다


한 해가 지나고 추석 즈음 옥이는 다시 연이와 미희를 만나러 갔다

볕이 잘 드는 교회 마당에 식사가 준비됐다

하얀색 면보가 테이블 위에 깔렸고 음식들은 아들들 손에 들려 예쁜 접시로 옮겨왔다

미희는 위치를 잡아주면 접시가 퍼즐 맞춰지듯 놓였다. 많이 해온 손들이었다

"미희야, 우리도 도울게. 뭐할까?"

"아냐, 목사님과 애들이 잘 해. 손님은 앉아계세요."

미희가 찡긋 윙크를 했다. 눈과 코의 움직임에도 피부에는 잔주름이 잡히지 않았다

옥이와 연이는 과한 배려에 엉덩이가 들썩였지만 초가을 햇살 덕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성찬이 완성될 즈음 목사는 주방에서 나왔다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멀리서 오신 귀한 손님들인데 부족하다면 너그러이 양해 부탁 드립니다."

"목사님, 저는 이런 상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너무 기대돼요."

"우리 목사님이 요리를 잘 하셔. 교회 모임 식사 준비도 곧잘 하시거든."

"아내가 요리를 잘 해서 제가 많이 배웠습니다."

미희와 목사는 식사보다 풍성한 덕담으로 서로를 배불렸다

"목사님, 식탁에 꽃이 있으면 좋겠어요."

부탁도 아닌 명령도 아닌 말에 목사는 일어나서 마당에 핀 꽃을 꺾어왔다

"이제 식사하실까요? 연이도 많이 먹어."

목사가 수저를 들고 이를 지켜보던 미희가 뒤따라 음식을 앞접시에 덜었다. 아들들이 옥이를 바라봤고 옥이는 그제서야 눈치껏 수저를 들었다. 개미들이 죽은 곤충을 발견하고 집으로 옮기는 듯한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풍부한 햇볕, 푸른 마당, 가지각색 음식, 평온한 미소들 속에서 식사는 잔잔한 물결처럼 천천히 진행됐다

"목사님, 이것 좀 따주세요." 미희가 화이트와인병을 목사에게 내밀었다

"냅킨이 있었으면 좋겠네." 목사가 주방에 다녀왔다

"목사님, 소금 좀 주실래요?"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인데 미희는 목사를 불렀다

미희는 고등어구이 접시를 목사에게 내밀었고, 목사는 가시를 발랐다

발라진 고등어 살을 입에 넣고 조물거리던 미희가 손을 내밀자 목사는 냅킨을 건냈다

"옥이는 어렸을 때 고기를 참 좋아했었는데 요즘도 잘 먹어?"

"몇년 전만해도 매일 고기 반찬을 올렸었어. 어렸을 때 잘 못 먹었던데 한이었나봐. 그런데 이제는 많이 안 먹혀. 늙었나봐."

"엄마가 치아가 안 좋으세요. 이제는 생선을 많이 드세요."

연이가 덧붙였다

"목사님, 고등어 접시 좀 옥이쪽으로 주세요."

목사가 일어나 접시를 옮겼다

"아니, 괜찮아요. 저 손 닿아요."

목사가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접시를 옥이쪽으로 옮겼다

"연이는 갈비를 잘 먹네. 목사님 연이에게 갈비 좀."

목사가 일어나자 연이도 따라 일어나 어정쩡하게 접시를 받았다

부산스러운 식탁과는 달리 아들들은 묵묵히 밥을 먹었다

"목사님, 차를 마실까요?"

"목사님, 찬장에 쿠키가 있을텐데요"

한가로운 가을날 교회 앞마당에서 목사는 꿀벌처럼 바지런했다

"목사님, 뚜껑 좀."

미희가 쿠키통을 내밀자 목사는 받아들어 힘을 썼다

옥이가 웃으며 말했다

"목사님 이름 닳겠다. 쉴새 없이 목사님을 부르네."

"아내는 저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해요. 그런데 제가 또 그걸 좋아합니다. 자발적 머슴이죠."

사람 좋은 성격에서 나온 대꾸에 모두가 따뜻한 웃음소리를 냈다

아니, 모두에서 한 명, 미희는 웃지 않았다

"좀 쌀쌀한 것 같네."

미희가 팔뚝을 부비며 추운 내색을 했다

"담요 좀 갖다줄까요?"

미희는 아무말 하지 않았고, 목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배당으로 향했다


아들들과 연이의 대학 얘기, 취업에 대한 걱정, 교회 확장에 대한 계획 등에 대해 나누고 해가 기울기 전에 옥이와 연이는 일어섰다

운전은 연이가 했지만 옥이는 그에 못지 않게 피곤했다

저녁을 대충 때우고 잠자리에 들 찰나에 전화가 울렸다. 미희였다

"넌 목사님 앞에서 어떻게 그렇게 무안을 줄 수 있니?

내가 목사님을 얼마나 불러댔다고 그런 소리를 해?

목사님이 좋아서 하는 걸 왜 내 탓을 해?"

옥이는 대꾸하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항의였고, 미희를 다시 만난 이후 처음으로 맞닥뜨린 날선 미희에 겁이 났다

"미희야 미안해. 난 웃자고 한 말이었는데 생각해보니 내가 가벼웠던 것 같아."

"옥이 넌 항상 그래. 말을 너무 쉽게 내뱉어. 말할 땐 상대방을 고려해야 하는 거 아니니?"

수화기 내려지는 소리가 둔탁하게 났다

옥이는 수화기를 쉽게 내려놓지 못했다


그날밤, 옥이는 연이와 식탁에 앉았다

연이는 옥이의 말을 듣고 엄마를 달랬다

"미희 이모가 말이 좀 심했네. 내가 봐도 이모가 너무 목사님 목사님 했어. 우리가 있는데도 그러는데 평소엔 얼마나 더 하겠어. 엄마가 이모를 핀잔주려고 한 것도 아니고 부러워서 그런 건데 이모가 오해했나보다."

부러웠을까? 옥이는 연이의 말에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

미희에게 다시 사과하러 전화를 했으나 통화는 미희가 건 전화보다 짧았다

미희와 옥이는 일찍이 겨울을 맞았다



겨우내내 미희는 옥이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기다리던 전화는 목사에게서 걸려왔다

"옥이씨, 큰일났습니다."

옥이는 목사 전화를 끊자마자 연이를 불러 곧장 B시로 내려갔다

A시와 한 시간 거리인 B시에 목사가 전한 대학병원이 있었다

그곳에 미희가 누워있었다


한 해가 다시 지나고

유난히 추웠던 1월도 지나고

설날도 지났는데 교회는 높은 천장 때문에 매일 추웠다

예배안 가운데에는 화목난로가 있었다

미희는 난로 앞에 앉아 늦은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어깨에는 숄을 두르고 모직 치마에 기모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아이들은 방학을 맞아 여행을 떠났고

목사는 신도의 장례 예배를 하러 인근 거리의 장례식장에 가있던 차였다

불이 잔잔해지자 미희는 장갑을 끼고 장작을 하나 들어 난로에 넣었다

난로 옆에서 며칠 불을 쬔 장작에 곧바로 불이 붙었다

불길이 살아나자 미희도 신이 났다

손수 장작을 넣은 게 신기했다

가느다란 손에 투박안 목장갑을 낀 것도 처음이다

옥이와 틀어진 후 미희는 변하고 있었다

'내가 그깟껏 못할까봐?'

처음엔 고약한 심보로 움직였다

점점 스스로 해결하니 그게 마땅한 어른의 모습으로 느껴졌다

살아나는 불꽃을 보고 미희는 옥이를 생각했다

다시 미희는 장작을 더 넣었다

목사가 빼곡히 장작을 넣었던 걸 봤던 터라 서너 개 넣으려고 했다

먼저 넣은 장작이 입구를 막고 있었다

난로 옆에 부지깽이를 들어 장작을 밀었다

장작이 덜컹 움직이면서 잔불이 난로 밖으로 튀었다

작은 불씨였지만 바짝 마른 장작들은 불씨에 타닥타닥 제몸을 태웠다

불이 커지고 있었다

미희는 핸드폰으로 목사에게 전화를 했다

"목사님. 난로에서 불씨가 떨어져 장작에 옮겨붙었어요!."

장례식장에서 육개장을 먹던 목사는 무슨 말인가 싶었다

"목사님! 난로 옆 장작들이 탈 것 같아요!"

상황은 이해 안 되지만 미희의 다급한 목소리에 목사는 큰일이다 싶었다

목사는 곧 갈테니 불이 커지면 119에 신고하라고 일렀다

미희는 목사의 전화를 끊고 더 커지는 장작불에 마음이 급해졌다

전화기를 손에 들고 있었으면서도 119를 누르지 못했다

한뼘 크기로 커지는 불을 한쪽 발이면 밟아 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발을 들어 불붙은 장작을 밟았는데 장작이 기우뚱하면서 미희의 발을 덮쳤다

기모 보풀이 가득했던 미희의 스타킹은 장작보다 붉게 타올랐다

불은 이내 모직치마까지 순식간에 덮쳤다



목사는 20분 후쯤 교회에 도착했다

장례식장을 나서면서 119에 신고하고

오는 길에 교회 창문으로 불꽃이 터져나오는 것을 보고 다시 119에 전화해 닥달했다

차에서 내려 곧장 교회 문에 달려들었다

문을 열자마자 역류한 불이 기습했다

목사는 바닥에 뒹굴였다

분노한 화마가 입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목사는 그때 악마를 보았다고 한다

목이 터져라 미희를 불렀지만 앞으로 전진할 수 없었다

뒤에서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소방관들이 달려들었고 물줄기가 화염 속으로 뻗어나갔다

목사는 타오르는 교회 마당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다

"하느님 아버지 하느님 아버지"

교회 창문을 깨고 화염들이 터져나왔다

소방관들이 진입하기 어려워 물만 쏠 수밖에 없었다

목사는 소방관들에게 달려들어 소리쳤다

"안에 아내가 있어요. 빨리 구해주세요. 빨리 들어가셔야 해요."

소방관들이 목사를 붙잡고 안정시키려 했다

뒤로 끌려가는 목사는 발을 구르며 제발 아내를 살려달라고 외쳤다

그때 교회의 오른쪽 벽이 허물어졌다

"오, 하느님!"

목사는 주저앉아 발을 구르며 울부짖었다

"미희야! 미희야..."



옥이가 병원에 도착하자 얼굴부터 옷까지 모두 주저앉은 목사가 안내했다

"아내가 많이 안 좋아요. 너무 놀라지 마세요. 상황이 안 좋은데 그래도 옥이씨께는 보여드려야할 것 같아서 오시라 했습니다."

목사는 응급실까지 힘겹게 걸었다

베드 커튼이 열리고 미희 아니 미라같은 환자가 나타났다

옥이는 미희 얼굴을 볼 새도 없이 주저앉았다

미희는 온 몸을 붕대로 감고 있었다

전신화상에 정도가 심해 겨우 눈만 뜨고 있었다

황신혜를 닮은 아름다운 얼굴도

잡지에서 돋아나온 듯한 가느다란 손가락도

비단 같던 머리카락도 모두 붕대에 감겼다

자기 같던 하얀 눈망울은 얼마나 용을 썼는지 실핏줄이 모두 터져 붉었다

고고한 학처럼 앉아있는 게 어울렸던 미희가 살기 위해 저렇게 힘을 냈구나 생각하니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붕대가 감겼다

오른쪽 검지 손가락의 손톱만 붕대를 비집고 드러났다

투명하고 윤기났던 그 손톱도 검게 그을려 있었다

옥이는 까만 손톱을 붙잡고 미희 팔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붉은 미희 눈도 투명해졌다


옥이와 연이는 올라오는 내내 말이 없었다

옥이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누웠다

연이는 엄마의 손을 잡아줬다

엄마 손을 쓰다듬다 오른쪽 검지 손톱이 만져지자 눈물이 났다

집에 온 후 세 시간이 지나 옥이는 미희가 하늘나라로 갔다는 연락을 받았다

수화기를 내리고 하늘을 올려다보고선

옥이는 생전 처음으로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다


"하느님을 무척 사랑하던 아이가 이제 하느님 곁으로 갔습니다

제게는 너무도 소중한 친구였습니다

친구에게 못된 말을 한 적이 있어 마음이 무겁습니다

친구도 제게 미안해 마음이 안 좋을 것 같습니다

몇 시간 전 친구 눈에서 우린 화해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미희를 지켜주세요

사랑 받아야 행복한 우리 미희를 잘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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