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술집 주인>의 프리퀄
3월 어느 볕좋은 날
친구들과 줌바댄스를 마치고 학원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아 바나나우유를 빨 때였다
며칠 전부터 공사 중이던 앞 건물에 간판을 실은 차가 멈췄다
수지는 사교댄스장이 생길 거라고 했고
리나는 크로스핏센터가 들어설 거라고 했다
둘 다 바라는 바를 얘기한 게다
뭐든 그들의 짐작이 맞은 적이 없었다
수지는 "댄스장 생기면 나는 탱고를 배울 거야."라며 양팔을 들어 스텝을 밟았다
리나는 "근육도 질이 있어. 크로스핏하는 놈들은 질이 달라."하면서 게슴츠레 눈을 흘겼다
둘의 응큼함을 뭉개듯 건물로 올라가는 간판은 '징요가'였다
"요~가?" 우린 서로를 쳐다봤다
"뒷건물에도 요가원이 있는데 되려나?"
"요새는 필라테스하지 않어?"
"뻣뻣한 우리랑은 거리가 먼 곳이네"
흥미가 떨어져 일어나려는 찰나
쌔끈하게 빠진 몸매에 야시시한 니트를 입은 남자가 공중에서 흔들리는 간판을 보며 외쳤다
"센터를 맞춰주세요! 제가 멀리서 보고 잡아 드릴 게요!"
그러더니 길을 건너 우리쪽으로 왔다
고등어가 건너오고 있다
쭉 뻗은 다리가 우리와의 거리를 씹어먹으며 다가온다
파닥파닥 질 좋은 가슴근육을 튕기며 온다
햇볕을 반사한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나린다
다가올 수록 고등어가 아니라 은갈치다
(우리를 등진 그는 간판 위치를 조정한다)
곧휴, 아니 곧추 선 척추가 등에 골을 팠다
허공을 가르는 팔은 세 여자의 마음을 농락한다
말아올린 니트 덕에 팔목의 핏줄이 팔딱거리는 걸 봤다
(세 여자는 왜 그때 서로의 손을 잡았을까)
"네, 그 정도면 됐어요."
'아니, 가시게요? 저흰 아직 안됐어요!'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들었나?
그가 돌아보며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새로 이사왔습니다."
(일동 어버버)"안녕하세요, 저흰 여기 살아요."(아니, 이제 요가원에 살아요!)
화답을 기대하는 여섯 눈동자에게 은갈치는 치아 네 개가 보이는 웃음을 남기고 갔다
목을 뺀 사슴을 본 적이 있는가?
우린 그날 각자 두 마리씩 봤다
내가 말했다 "플러팅이 훌륭하네."
리나가 말했다 "정맥질이 훌륭하네."
수지가 말했다 "엉덩이가 훌륭하다."
처지에 따라 보이는 게 다르다
수지는 이혼했다. 무려 재혼이었다
리나는 사별했다. 제사도 안 지낸다
나는 미혼이다. 혼인신고 안 하고 이혼했다
수지 "이렇게 뻣뻣한 몸뚱이로는 관에도 못 들어갈 거야"
리나 "난 요새 허리가 안 굽어져서 발톱도 못 깎겠어"
둘 다 살이 문제인 몸뚱이다
"할래?"
수지가 내게 물었다
"가자."
-"어딜?"
"레깅스 사러!"
이혼, 사별, 미혼의 깃발 아래 발정나도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40대 여성 셋은
눈도장을 제대로 찍으려고 개원하자마자 달려갔는데
역시 속초바닥은 좁았다
아니 여편네들 입소문은 무서웠다
리나 이년이 요가복 택배가 아직 안 왔다며 한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우리 순위는 10위권 밖으로 밀렸다
1빠로 등록한다고 원장님이 손 잡아 주는 것도 아니고
1년을 등록한다고 원장님이 두리둥실 헹가레해주는 것도 아닌데 접수부터 묘한 경쟁이었다
그래도 원장님 바로 앞자리는 우리 차지였다
수지가 좀 크다
용케 첫수업에서 앞자리를 차지한 후 "바다도 잘 보이고 명당이네. 여긴 이제부터 우리 자리여~"라고 공언한 게 먹혔다
다른 여자들은 생고등어 대가리 씹은 듯 표정을 구겼지만 수지에게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리나는 철판이라 타격 1도 없었고
나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척 양미리처럼 애들 사이에 끼었다
실제 갈치는 서서 헤엄친다
바닷속에서 서서 유영하는 갈치를 보면 황홀경에 빠진다지
그가 두 손 모아 바로서면(우르드바 하스타사나)
그를 감지하는 감각이 살아나고
그러다 허리를 접어 두 손으로 바닥을 짚으면(웃타나사나)
벌어진 골반만큼 둔부만큼 마음 열어 그를 받아들인다
엎드린 채 손으로 바닥을 짚고 상체를 세우면(업독)
그 앞에 나도 엎어져 턱을 양손으로 괴고 "나 이뻐?" 할 뻔했다
나를 내치듯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엉덩이를 들어 산을 만들면(다운독)
그 세모 안으로 들어가 똬리를 틀고 싶어진다
그러다 누워서 손과 발바닥만 대고 몸을 활처럼 들어올리면(우르드바 다누라사나)
우리는 숨이 막혔다
활짝 열린 가슴, 매끈한 복근 그리고 갑툭튀...
반바지 툭튀... 튀... 시선은 '튀'에서 멈춰 다리로 내려가지 못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눈을 질끈 감으려 했으나 뇌놈이 말을 안 들어 입꼬리가 올라갔다
리나와 눈이 마주쳤고 리나는 다 안다는 듯 배시시 가자미처럼 웃었다
'난 그런 여자 아니야! ' 항변하고자 고개를 반대로 돌렸는데 그곳에는 수지가 있었다
무언가를 씹을 듯 입을 벌리고 뽕 맞은 듯 쌤을 쳐다보던 수지가 "뿡"했다
그 후에도 다리를 들고, 몸을 꼬고, 한 발로 서고,
뱀이 됐다, 비둘기가 됐다, 개구리가 됐다,
목석같은 우리 몸을 희롱하듯 별 자세를 다 잡았지만
수업을 듣는 13아해들은 짐승처럼 징쌤 몸만 보며 침을 흘렸다
우린 일주일만에 주3회에서 주5회로 더블차지를 묻었고
다음달 수강할 땐 주5회 6개월권을 끊으려다가
장비빨로 초반 러쉬하는 리나가 룰루레몬 쟁이기로 돈이 딸린다 호소해 3개월만 등록했는데 재등록 2주만에 우린 리사에게 절을 해야 했다
아무리 과욕 탐욕 성욕(이건 좀 과했군. 애욕이라 하자)을 부르는 은갈치 보는 게 목적이라지만
주5일은 우리 같은 목석들에게는 너무 힘들어 6주만에 수지 입에서 쌍욕이 터졌다
울산바위 정상에 치킨을 뒀다고 해도 공짜라면 달려갈 수지가,
돈이 되면 시어머니가 물려준 옥가락지도 당근하는 리나가 차츰 수업을 빼먹기 시작했다
물론 거기에는 합리적 의심을 할만한 다른 이유도 있다
은갈치가 수지와 리사의 애정공세만큼 리액션을 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둘보다 비교적 얌전하고 순수하며
'전 선생님께 관심 없고 오로지 수련하러 온 요기니랍니다'라고 철벽치는 듯
새침하게 고상떤 나의 작전이 먹혔다
수지와 리나는 나의 의도를 간파한 눈치지만
(수지는 수업 전에 자꾸 내게 뭘 먹였고
리나는 내 레깅스가 몸땡이보다 작은 사이즈라고 공개적으로 꼽을 줬다)
나는 그들보다 좀더 유연한 몸이었기에 경쟁력이 있었다
곡소리와 침 넘어가는 소리가 난무하던 분위기는 차츰 요가원다운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레싱룸에서는 징쌤 얘기가 끊이지 않았으며 새로운 소식이 나오면 피아 구분 없이 화자에 귀를 모았다
징쌤은 1월에 속초에 왔다고 한다
서울에서 왔다는데 서울에서 무얼 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속초에는 혼자 있고 서울에 자식들이 있지만 아내는 확인되지 않았다
누구는 이혼이라 하고 누구는 사별이라 했지만
모두의 마음은 그가 혼자라는 결론에 모아졌다
누구는 그의 집에 밥 해주는 여자가 있다고 했고
누구는 그가 밤이면 등대해변에서 소주를 마신다고 했고
누구는 그가 새벽에 뒷골목 요가원에서 나왔다는 걸 봤다고 했으나
감히 징쌤에 대한 흉흉한 소리를 냈다는 이유만으로 매섭게 무시당했다
징쌤에 대한 의문이 커지고 사실이 확인되지 않으니 우리 애는 더 타들어가
마침내 용감한 우리 친구, 화성에 떨어뜨려도 살아돌아올 수지가 나섰다
"쌤~ 우리가 벌써 백일이나 했는데 백일잔치해야하지 않겠어요? 홍홍홍"
장하다! 김수지!!
"아 그럴까요? 그럼 내일 저녁수업 끝나고 보실까요?"
수지는 설렜는지 회식이라 굶었는지 조금 헬쓱해져서 왔고
리나는 요가복보다 아우터에 더 힘을 줬는데 4월에 보라색 퍼는 좀 심했다
다른 이들도 평소와 다르게 코디해서 백일잔치에 몰입하는 그들의 진정성을 뽐냈다
회원들의 불타는 야욕은 수업 후 마련된 잔칫상을 보고 짜게 식었다
수업을 마치고 속초급 이브닝드레스로 갈아입고 나온 회원들은
프런트 앞에 마련된 다기세트 앞에 앉아야 했다
요가원 잔치는 차와 명상이었다
그는 Chill Boy였다
"어머 쌤 이게 뭐라니?"
당황한 수지 입에서 반말이 나와버렸다
그녀는 Chili sause같은 여자였다
댕~ 싱잉볼이 울리고 백일잔치 아니 백일묵념한마당이 시작됐다
다도와 싱잉볼을 끝내고 상심한 우리 셋은 파티를 하러 갔다
잔치는 허망했지만 축하할 일은 있었다
우선, 징쌤은 싱글이었다. 사별이었다
우린 먼저 떠나신 그 분을 위해 소주 한 잔을 들어 건배했고
남은 징쌤을 위해 폭탄을 말아 연거푸 세 잔 재꼈다
왠지 그가 마음으로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는 착각에 세 잔이 필요했다
징쌤에 대한 소문은 거의 거짓이었음을 우린 확인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해변을 따라 러닝을 했고
오전 수업 후 점심은 인근 식당에서 혼자 먹으며
오후 수업까지 책을 읽거나 요리를 했다
요리는 저녁 수업 후에 먹을 것으로 저녁을 먹고서는 해변에 나가 어싱(Earthimg)을 한다고 했다
속초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보통 혼자 보낸다고 했다
우린 그날 밤 많은 계획을 세웠다
대체로 징쌤이 외롭지 않게 하자는 구체적 행동계획이었고
그 계획에 징쌤의 동의는 없었지만 무척 징쌤이 바쁠 예정이었다
수지와 리나가 열심히 실행에 옮기려 했고
한 마리 소심한 양미리가 물밑에서 부채질했지만
징쌤은 고독을 선택했다
비단 우리뿐 아니라 많은 회원들이 징쌤을 요가원 밖으로 끌어내려 했지만 택도 없었다
그는 외부활동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고
회원과의 사적인 자리는 일체 마다했다
갈수록 곡소리는 줄어들었고 징쌤 보러 찾던 발길도 잦아들었다
수지와 리나도 징쌤에게 흥미를 점점 잃어 수업에선 본명인 수진과 미나처럼 무던하게 다녔다
나는 오히려 요가가 인생운동이란 느낌이 들 정도로 좋아하게 됐고
매번 등에 땀이 배이게 열심히 했고 사바아사나로 쉴 땐 깊은 내면으로 침잠하는 것 같았다
물론 징쌤에 대한 마음을 놓지는 않았고 사바아사나를 할 때마다 그가 나를 포근히 안아주는 상상을 하곤 해 혼자 붉어진 얼굴로 나마스테 인사했다
시간이 지나니 나도 징쌤이 은갈치로 보이지는 않고 제철 맞은 명태 정도로 보였다
잘 찾아보면 만날 수 있는 좀 괜찮은 50대 아저씨,
다만 제철 맞아 기름이 잘 오른 '아직 쓸만하겠는데?' 정도의 감탄사를 낼 아저씨,
그 정도로 생각하게 됐다
(내가 뭐라고? 40대 양미리 주제에)
그러다 다시 불붙은 건 요가원 바깥에서 징쌤을 만나면서부터다
친구들과 한잔하고 등대해변에 돗자리를 펴고 2차를 할 때였다
수지가 새로 관심을 가진 복어같은 남자와
리나가 썸을 타는 가자미같은 남자 얘기에 한참 빠져있을 때
갈치처럼 길다란 그림자가 우리를 왔다갔다했다
관광객이겠거니 무시하는데 서너번 어른거리길래 돌아보니 징쌤이었다
한 손에 봉지를 들고 모래밭에 널부러진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자기 쓰레기가 아니라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은갈치같은 허우대로 모래밭을 뒤집으며 쓰레기를 담는데 순간 내 마음도 담아버렸다
수지와 리나도 쌤을 확인하고 복어와 가자미를 내던진 채 반색했다
역시나 용감한 수지가 쌤을 돗자리에 이끌었고 그는 수지의 이두에 눌려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머리를 식히러 나왔다고 하는데
요새 뭔가를 새로 해보려 한다고 했지만 뭘 하려는지는 말 안 했다
어쩌다 쓰레기가 보여 주웠다지만 일상으로 보였다
다른 봉지에는 시장에서 산 가자미가 들어있었는데 그걸로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보려고 한다고 했고
가자미를 만나는 리사가 가자미는 쪄야 맛있는데 찜 말고 다른 요리가 가능한지 반문했고
복어처럼 먹어대는 수지는 가지미로 식해도 하고 미역국도 하고 찌개도 할 수 있지만 조림이 제일 맛있다며 하나마나한 소리를 했다
"가자미는 살이 연해 조리가 쉽지 않더라구요. 조림이 제일 나은데 특별하게 만들고 싶다면 간장조림을 해보세요. 일식 레시피인데 조릴 때 무를 같이 조리고 조려진 무를 한 번 더 튀겨보세요. 튀긴 무에 조린 가자미를 올려 먹으면 별미예요."
나는 말을 하고 바다 위로 떠오른 달보다 불게 타올랐다
"처음 본 요리인데 상상하니 벌써 침이 고여요. 고맙습니다, 원영 씨."
그가 내 이름을 부르자 나는 꽃이 되었다. 가자미꽃.
반면 친구들은 마치 새로운 인간을 봤다는 듯 쳐다봤다
-너 일본요리를 할 줄 알았어?
-너 생선은 징그럽다고 잘 먹지도 않으면서 뭘 조리고 튀겨?
-너 눈을 왜 그렇게 떠?
-너 내가 밉지?
역시 이 여편네들은 가지지 못할 놈이라도 남 주기는 아까워하는 년들이었다
며칠 후 그는 알려준 레시피로 요리를 해봤다며 튀긴 무가 그렇게 맛있는 무가 될지 몰랐다며 감사해 했다
고마우면 뭐라도 쥐어주는 게 예의라 배웠건만 서울것들은 그런 게 없었다
그렇다고 미워할 수 없는 게 수업 때 평소보다 한두 번 더 찾아와 자세를 교정해줬다
그럴때면 동작마저 포기하고 우리를 지켜 아니 노려보는 여편네들 때문에 내가 그의 온기를 느낄 새도 없이 그는 곧 사라졌다
그래도 나는 그가 내 허리를 받혀주는 듯, 내 다리를 잡아주는 듯 평소보다 동작이 잘 됐다
그로부터 두어달 후 징쌤은 다시 잔치를 제안했다
다도와 싱잉볼에 이미 한 대 맞은 우리였기에 별 기대 없었지만
뜻밖에 그는 우리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요가원에서 몇 분 걸으니 작은 선술집이 나왔다
갈치처럼 가늘고 긴 글씨 두 자가 간판에 박혀있었다. [지잉]
징하다... 징쌤의 징사랑
문을 열면 '지잉'하고 삐걱댈 오래된 건물이었다
일드 심야식당처럼 ㄷ자 빠의 선술집이었고 작은 식당이었다
회원 십여명이 둘러앉으니 가득찼다
주메뉴는 바지락술찜, 골뱅이탕, 메로구이, 가지미조림, 야채조림 그리고 돈지루였다
"돈지루? 돈지랄은 들어봤어도..."
수지의 말에 그가 돈지루를 보여줬다
된장국에 돼지고기와 당근, 연근, 표고버섯, 무 등을 넣어 끓였다
담백하니 맛있어 보였고 수지가 고기만 꺼내먹더니 내 쪽으로 그릇을 밀었다
자기 입맛이 아니란 뜻이다
그는 주방에서 접시를 새로 내와 내 앞의 돈지루를 리나에게 옮기고 새접시를 놓았다
"알려주신대로 무조림을 튀겼습니다."
나는 그의 무튀김을,
내게만 허락된 그 요리를,
특혜에 담긴 그의 관심을,
관심으로 포장된 그 사랑을,
사랑에 담긴 그 야욕을
(너무 나갔으나 그땐 그랬다)
아무튼 그 무튀김을 먹고 혼절할 뻔했다
"너무 맛있어요! 무가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구나."
내 가슴에 '지잉' 전기가 지져졌다
두 여자가 복어처럼 볼을 부풀리고 가자미처럼 찢은 눈으로 날 노려봤다
나는 그의 사랑에서 아니 관심에서 아니 요리에서(썩을) 쉽게 헤어나오지 못했다
복어와 가자미를 만나겠다는 애들을 데리고 매일같이 지잉에 갔다
그곳은 마치 요가원인듯 익숙한 얼굴들로 가득했고
다이어트를 핑계로 요가하던 여자들이 다이어트를 철회하며 요가하다 빠져나간 칼로리를 술과 안주로 채우고 있었다
개업빨이 빠지는 데는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우선 밤 열시에나 열었기 때문에 가정이 있는 여자들은 고맙게도 발길이 끊어졌고
가정이 있어도 자유가 넘치던 여자와 우리처럼 가정이 없는 여자들이 명맥을 유지했지만
자유부인들은 목석같은 그에게 곧 흥미를 잃어갔고
싱글들은 대체로 주머니사정으로 발길을 줄였다
나도 발길이 잦아들었는데 앞서 두 가지 이유보다는 자주 가는 게 내 마음을 들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존재감 없는 양미리일지언정 남의 집에 알까는 뻔뻔한 감돌고기는 아니니까
속초에도 장마가 시작됐다
경쟁이 심하던 지잉도 장마 비수기를 맞았다
세찬 비로 나가기 어려웠지만 비 냄새가 좋아 나가고 싶어졌다
비가 튕기는 땅에서 호박 익어가는 냄새가 났다
택시가 안 잡혀 10분 거리 지잉까지 걸었다
우산과 장화를 신었지만 치마가 젖어들어 무거웠다
문 안으로 보니 징쌤이 책을 보고 있었다
문을 열까 말까 백번 고민하다 문을 열었다
'지잉' 소리가 났다. 어서 들어오라는 것 같았다
"이 비에... 오셨네요?"
-근처 지나갈 일이 있어서요(어설펐다)
-소주 주세요(적절했다)
그날 우린 많은 얘기를 했다
그날 나는 많은 술을 마셨다
그의 고독이
나의 연민이
다시 나의 고독이
그의 위안이
다시 그의 따뜻함이
나의 약함이
술에 술을 불렀다
감기는 눈을 부비며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물었다
"지잉은 무슨 뜻이에요?"
-'지~~잉.' 지~~하면 뭔가 뒤에 더 있을 것 같아 기대가 생기는데 잉.하고 끝나면 '잉?'하고 놀랍지만 또 그게 재밌어요. 사는 게 그렇더라구요. 크게 대단한 것 없고 크게 다를 것 없고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미소지었다
양미리가 그 입꼬리에서 파닥이는 것 같았다
파닥이는 그 입꼬리에 매달리고 싶어졌다
몸을 일으켜 갈치의 입꼬리를 향해 돌진했다
입술을 포갰더니 그 입꼬리가 봄볕에 몸을 말리는 고양이 꼬리처럼 얌전해졌다
'지~잉'하고 내 몸에 전기가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