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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퇴근길에 생리대 하나만 사다줘요

by 구작

오늘은 출근이 더 신이 났다

아내가 다려준 와이셔츠의 촉감이 아내 손길만큼 좋았다

아내가 생일선물로 준 파란색 넥타이를 맸다

날이 화창하니 스트라이프 셋업으로 평소보다 힘을 줬다

아내에게 잘 다녀오겠다고, 저녁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당신이 식당을 고르라고 하고 나왔다

엊그제 비로 벚꽃은 졌지만

초록 새싹이 돋아 봄기운을 부채질했다

골목 끝에 다다르니 새롭지만 낯익은 향이 났다

모퉁이를 도니 라일락이 나타났다

오늘은 즐거운 날이다


연봉협상 후 첫 월급날이다

크진 않지만 그래도 올랐다

매일 직장 가는 길이 네모였다

집을 나서면 직선을 내달려야 했지

첫 번째 모서리를 꺾으면 회사에 도착하지

정신 없이 오전 업무를 쳐내면 점심이고 두 번째 모서리를 돈다

지리하게 어제처럼 오후를 보내면 세 번째 모서리를 돌아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 집으로 내달린다


월급날은 하루가 동그라미 같다

선배가 생트집 잡고 갈궈도 좋고

후배가 MZ력 지랄 떨어도 좋다

구내식당 점심이 싫어하는 청국장이라 굶어도 배고프지 않고

눈치 없는 부장이 퇴근 앞두고 회의를 소집해도 참을 수 있다

돈이 이렇게 좋은 거다

그 돈 들고 갈 집이 있어 좋고

그 돈으로 아내가 웃을 수 있으니 좋다


퇴근시간을 넘긴 회의에서 외식 메뉴를 떠올렸다

매운 걸 먹으려나?

새로 생긴 집앞 식당에 가려나?

오늘은 좀더 비싼 걸 먹어도 되는데

오늘은 나보다 당신이 좋아하는 걸 골라야 할텐데

웬일이야! 회의가 금방 끝났다

동그라미 귀가길로 내달렸다

조금만 기다려~ 빨리 가고 있어요~

"딩동"

아내에게 문자가 왔네

메뉴를 골랐나?


"여보, 퇴근길에 생리대 하나만 사다줘요..."


발의 속도가 떨어진다

다시 문자를 봤다

아..... 그날이구나

매달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잔인하고 아픈 말

몇해 전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오는 아내의 문자

"여보, 퇴근길에 생리대 사와줄래요?"

하늘을 올려다봤다

무심한 하늘

인정도 없는 하늘

그렇게 기도해도 들어주지 않는 하늘

이쁜 천사 하나만 내려달라고 그렇게 기도했는데

이번달도 우리 차례가 아닌가 보다


아내는 또 얼마나 오늘 울었을지

"오빠, 이번에도 실패래."

이 말이 너무 아파서 생리대 하나 사달라고 둘러대는 아내

아내가 습자지처럼 얇아지는 '매월 그날'이 또 찾아왔다

시험관을 계속 실패하고

2번의 계류유산까지 경험하며

눈물나게 고왔던 25살의 처녀는

눈물 다 빠져 말라가는 41살의 아내가 되었네


매달 하는 위로인데 오늘은 어떻게 위로할까...

신이 나 집을 나오던 내 모습에 얼마나 더 아쉬웠을까

미안할 사람은 나인데 당신은 왜 더 미안해 할까

안아줘야지, 오늘은 더 단단하게 안아줘야지

"여보, 나왔어~"

일부러 환하게 웃으며 들어갔다

현관문을 열자 옅어진 햇볕이 먼저 들어가 아내의 얼굴을 비춘다

노을보다 붉어진 코

망글망글 가득찬 눈물

그래도 웃는 당신의 입

"고생 많았어, 오빠."

"당신도 고생했네~"

"나비아빠, 손만 씻고 우리 나가요."

아내가 돌아서 옷방으로 간다

아내가 나를 '나비아빠'라 불렀다

결혼하면서 입양한 12살 반려묘, 나비

오빠, 여보, 당신으로 불렀는데 오늘은 나비아빠라네

당신은 하루종일 나를 위로할 생각을 했나보다

당신은 그렇게라도 내가 '아빠'소리 듣게 하고 싶었나보다

그런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는 내가 아기의 아빠가 될 자격이 있을까


화장실에서 겨우 들썩이는 마음을 가다듬고 옷 갈아입으러 옷방에 갔다

불 꺼진 옷방에 무거운 적막이 가득찼다

꾹꾹 눌러담는 울음소리

채 정리하지 못한 길다란 겨울코트가 걸린 행거 아래에서 나비보다 가냘프게 울고 있다

옷장의 모서리에서 무릎을 세운 채 앉아 고개를 묻고 끅끅거리며 운다

당신은 매일을 그곳의 네모에서 모서리들에 몸을 깎으며 울고 살았구나

"왜 울어~ 나와 이제. 우리 나가자 나비엄마."

손을 잡아 여보야

당신 안에 이번에도 천사는 오지 않았지만

내게는 당신이 언제나 있어왔다

세상이 내게 살면서 얻은 가장 큰 게 무어냐고 묻거든

"우리 아내를 얻었지."라고 나는 말할 거야

그렇게 평생 말하며 살다 죽어서

하늘에 가 채 내려오지 못한 우리 천사를 만나거든

"세상에서 가장 착한 네 엄마는 네 꼬까신 만들고 오느라 아빠 먼저 왔지."라고 전할게








커뮤니티에서 우연히 본 이야기로 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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