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인글라스의 색을 닮았던 너
'앤'이라고 소개하는 여자가 있었다
친구는 '다이애나'라고 한다
둘은 '빨간머리 앤'을 나눠가진 것
나는 앤을 잘 몰랐다. 유년기에 사내들에게는 '빨간머리 앤'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머리 앤" 시작이 이랬던가?
그래서 사내들에게 앤은 비호감이었다
앤은 주근깨도 없었고 빨간머리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눈 앞의 앤으로 '빨간머리 앤'의 캐릭터를 그려야했다
앤은 수줍음이 많았지만 활기찼다
조용조용 말했지만 그 작은 입에서 신기하게도 많은 말이 나왔다
첫키스를 할때 그녀 눈은 갈 곳을 잃었지만 입술은 저돌적으로 내게 들이닥쳤다
우린 재즈클럽에서 만났다
아니 내가 앤을 거기서 처음 봤다
앤은 다이애나와 함께 왔었다
나는 재즈를 좋아하는 여사친과 같이 갔다
여사친은 같이 가기로 한 친구가 펑크를 내자 급하게 나를 콜했다
직장에서 첫 월급을 받아 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락을 좋아하던 내게 재즈는 지루했다
여사친은 좋아하는 밴드가 있었고 나는 주변으로 눈을 돌렸다
내 앞 줄에서 두어칸 옆에 앉아있던 앤은 다이애나를 보며 예쁜 미소로 얘기하며 관람했다
웃을 때 콧대 양쪽으로 주름이 두어개씩 잡혔는데 그 주름이 친근하게 느껴졌었다
공연이 끝나고 우린 근처 와인바를 갔다
재즈를 듣고서는 와인을 먹어야한다고 여사친이 우겼다
여사친에게 쏠 예상견적보다 더 큰 돈이 나갈 판이었지만
앤과 다이애나가 향하고 있었기에 군말 않고 들어갔다
앤과 다이애나는 샴페인을 마셨다. 둘도 주당은 아닌 듯 했다
우린 레드와인을 시켰고 물론 와인을 아는 척하던 여사친이 주문했다
앤의 콧주름이 계속 신경쓰였지만 그곳에서 앤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여사친에서 재즈클럽 DAUM 카페가 있다는 애길 듣고 나는 다음날 가입했다
공연후기 사진에 앤이 있었다. 다이애나가 올린 후기였다
앤이 댓글을 달았고 앤의 지난 글들을 찾아봤다
그리고 쪽지를 보내게 됐고 며칠이 지나서야 앤은 확인하고는 답을 했다
앤과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참 많은 계산과 설정이 필요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길버트는 아니었다. 그래서 더 노력해야했다
앤은 재즈 같은 여자 였고 샴페인 같은 성격이었다
재즈처럼 고혹적이었고 샴페인처럼 신선했다
재즈가 매개였지만 우린 영화로 가까워졌다
대화에 영화가 더 많았고 영화관에서 주로 데이트했다
'접속'을 볼 때 처음 손 잡았고
'편지'를 보면서 키스했다
세상에는 우리 둘만 있었다
당시 재즈를 듣는 친구들은 거의 없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대학로를 대학생들은 술과 데모로 찾았다
세상은 어수선했지만 우리는 스크린 위에 있는양 세상과 멀어져 로망을 즐겼다
그녀는 떠날 때도 평범을 거부했다
프랑스로 떠난다고 했다
이유는 미술도 아니었고 와인도 아니었다
스테인글라스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스테인글라스는 세계사 시간에만 배웠던 것 같은데...
푸아그라만큼 거리감이 있는 그걸 배운다고 그녀는 떠났다
식품생물학과를 다니던 그녀였기에 나는 스테인글라스가 화초로 만든 게 아닐까 생각했다
앤은 어느 일요일 오후에 쇼파에 늘어져있다가 스테인글라스를 다룬 다큐를 봤다고 한다
지평선이 펼쳐진 초원에 돌로 지은 큰집이 있었고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있는 아저씨들이 상의가 다 젖도록 망치질을 했다고 한다
불로 유리를 굽고 색료로 여러 '글라스'를 만들며,
쇠를 자르고 불로 달궈 꺾은 후 글라스를 끼워맞춰 하나의 창을 만든다고 했다
그게 너무 경이롭다고, 이역만리 그곳에 작은 동양인 소녀가 갈 명문이 됐다고 한다
그 주 주말에 우리 동네 성당을 찾아 유심히 스테인글라스를 봤다.
그 성당의 것은 유리에 그림을 그리고 뚜거운 검은 테이프로 모양을 낸 것 같았다
앤에게 달려가 유레카처럼 소리치고 싶었다
아냐! 스테인글라스는 그런 게 아냐
적어도 지금 성당 창문마다 꽂히는 스테인글라스는 그렇게 만들지 않아
프랑스 그 공장들도 곧 시대의 흐름에 맞추지 못하고 문 닫을 거야
그렇게 해서는 지금처럼 아름다운 색과 빛을 만들지 못할 거야!
앤이 내 눈앞에 프랑스 행 티켓을 흔들 때까지 나는 말하지 못했다
앤은 내게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다
2년제 스쿨을 다닌다들지. 그걸 마치면 오겠다들지
아뜰리에에 갔다가 자기를 안 받으면 파리 구경 좀 하고 다시 돌아오겠다들지
가면 편지를 할게, 우리는 계속 사귀는 거야
그 어떤 약속도 하지 않고 떠났다
처음 본 그때 그 주름을 콧등에 잔뜩 새긴채
한국의 스테인글라스 장인이라면 언젠가 뉴스에 나올 것 같았다
아니 적어도 프랑스에 가서 전통 기법의 스테인글라스를 수학한 여성이라면 주부생활에라도 나올 것 같았다
앤은 어디에도 없었다
3년 후쯤 앙코르와트 투어를 갔을 때 앤같은 가이드를 봤다
가이드치고 어렸고 투어 내내 밝게 웃었다
한 탑에 기대 캄보디아 왕조에 대해 얘기하다 탑에 있는 꽃 문양을 가리키며 스테인글라스에 비교했다
"이 곳의 사원과 탑들은 무채색이예요. 온통 돌이기 때문이예요
유럽 성당도 돌로 만들어졌지만 스테인글라스가 빛과 색을 만들어주죠
여긴 색깔이 없어요. 그래서 전 여기다 더 사랑스럽습니다. 진실하죠"
앤은 어디 있을까?
앤이 한국을 떠날 땐 진심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