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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8 비와 당신

by 구작


당신을 생각하면 아련합니다. 그리고 애잔합니다


우리 추억에는 유독 비가 많습니다

아마도 한 여름의 꿈 같은 만남이었기 때문이겠죠


낮이 가장 길 때 우리는 만났습니다

서로의 집에서 모두 멀었던 성남의 한 공연장이었습니다

시간이 남아 우린 밥을 먹었고 첫 만남 메뉴치고는 참 가식 없던 부대찌개였습니다

오이를 못먹는다고 하니 당신은 웃었습니다

그 웃음에 멸시가 아니라 호기심이 가득해 저도 따라 웃었습니다

오이때문에 저는 당신에게 '신기한 여자'가 됐습니다


두 번째는 청계천이었습니다

아마도 장마의 끝자락이었을 겁니다

며칠 흐렸지만 비는 내리지 않아 우리 누구도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았었습니다

황학교 아래 사연 깃든 타일들을 보며 우린 그들의 현재를 상상해봤습니다

"영원히 함께하자 000아" 이 둘은 아직 사귈까요?

"엄마 환갑에 하와이 가자" 효자네~ 정말 하와이 갔을까?

"000아 결혼해줘!" 이런 프로포즈는 싫은데~ / 왜요? / 전 더 진심이 느껴지는 방법이었으면 좋겠어요 / 이를테면?


예를 들기는 어려웠습니다

나는 한번도 남자의 진심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진심이란 것이 어떤 모양과 깊이인지 알지 못합니다


종로에 닿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위는 어두워지고 있었고 물 속 조명은 빛을 냈습니다

비는 쏟아지기 시작했고 위로 올라가는 계단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눈 앞에 폭포가 보였습니다

"저 안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럼 물을 다 맞지 않을까요?"

"여기 있어도 비 맞아 젖어요"

당신은 내 손목을 잡고 폭포 속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찰나에 폭포물을 헤집고 동굴 같은 비밀의 장소로 들어갔습니다

순간 맞은 물에 옷은 흠뻑 젖었습니다

곧바로 몸이 살짝 떨려왔습니다

이어 당신은 밖을 보며 목에 묻은 물을 닦았고 그 손은 단단해보였으며 굵은 목은 신뢰가 갔습니다

잠깐 어깨가 바르르 떨리지는 듯 하더니 가슴이 쿵쿵 거렸습니다

이제 갓 알아가는 남자에게 육욕을 느낄 정도로 본능적인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니기에

저의 낯선 반응이 저는 무척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당신 등 뒤에 숨었습니다

"비 그치면 가요. 소나기겠죠. 괜찮아요?"

-"네"

잠깐 당신의 눈에 내 얼굴에 멈췄습니다

저는 당신이 내게 더 가까이 올까봐 무서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을 밀어낼 생각은 없었습니다

당신은 내 얼굴에 묻은 물에서 머물다 이내 돌아섰습니다

저는 또 부끄러워졌습니다


우린 짧게 청계천에 온 소감을 나누다 나왔습니다

징검다리를 건너다 장난치며 개천에 빠졌습니다

무릎이 살짝 넘는 깊이였습니다

저는 목부터 밑단까지 단추로 여미는 원피스를 입었었습니다

허벅지가 젖은 느낌이 났지만 그보다 젖은 건 가슴이었습니다

당신은 내 손을 잡아 끌어올렸고 그 손은 참 단단했습니다


우린 을지로로 가 노가리와 맥주를 먹었습니다

처음 온 제게 당신은 친절히 노가리 먹는 법을 알려줬고 그 가게의 역사도 소개했습니다

당신이 발라준 노가리가 내 앞에 놓였고 지독히 매웠던 소스는 내 얼굴을 더 붉혔습니다

저는 당신 앞에 쌓인 노가리 대가리를 들어 반으로 쪼갰고 입에 넣어 씹었습니다

당신은 그 일련의 동작을 눈으로만 지켜보다 마침내 입이 벌어졌습니다

"그걸 먹어요?"

-"생선은 원래 대가리가 맛있어요"

"그런 얘기는 우리 할머니나 하는 얘기인데"

당신은 한바탕 웃었습니다

저는 양념소스보다 더 붉어졌지만 볼보다 화끈했던 건 가슴이었습니다

우린 같이 택시를 탔습니다

그때가 11시였나... 술이 얼큰했던 남녀가 방향감각을 잃기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한남동에서 멈춘 당신은 같이 집에 가자고 했습니다

저는 미소지었습니다

그 미소에는 어떠한 악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밀쳐냈습니다

-"늦었어요. 엄마가 기다리세요"

당신은 저처럼 미소지었고 택시는 출발했습니다

인천까지 5만원이었습니다. 백수였던 제게는 1주일 생활비였죠



우리가 또 만난 날도 비가 왔습니다. 오늘처럼 왔죠

남산에서 만났습니다. 당신은 인천 사는 제게 남산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지방에서 올라와 한남동에서 자취를 하던 당신보다 제가 더 남산에 가깝지 않았을까요?

인천에서 남산에 오는 내내 그 생각에 웃었습니다


당신은 노란색 비옷 두 장을 준비했습니다

제게 비옷을 입히더니 신발을 벗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곤 우리는 한강진역을 돌아 남산을 걸어올라갔습니다

그렇군요, 당신이 남산을 가는 방법은 이런 거였군요. 또 웃음이 나왔습니다


남산 가는 길은 꽤나 재미있었습니다

장댓비가 내려 춥긴 했지만 발에 닿는 아스팔트는 따뜻했습니다

내리막 아스팔트 따라 물이 흘렀고 그걸 밟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올라가는 버스에 우린 손을 흔들었고

버스 안의 남녀는 우리에게 화이팅을 외쳤습니다

남산타워에 도착하자 당신은 컵라면을 사왔습니다

뚜껑이 컸던 그 라면은 우리를 오래 기다리지 않게 해 고마웠습니다

후루룩후루룩

이제와 고백하건데 저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그렇게 소리내 라면을 먹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당신과 함께였을 때 저는 전혀 새로운 여자였습니다


우리는 늘 웃음과 함께였습니다

작은 것에도 많이 웃었고 특히나 술을 마실 때는 더 즐거웠습니다

당신의 친구도 형제도 제겐 모두 개그맨이었습니다

당신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은 쓸쓸했습니다

그날 밤은 더 허전해 저는 술을 찾았습니다

수화기 너머의 당신은 저를 걱정했습니다

언젠가부터 당신은 제게 술 먹었냐고 체크하듯 물었습니다

우울증이 있는 걸 인정하기 싫어 저는 이후 거짓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재미있었고 당신의 공간, 사람, 생활도 밝고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똑같았습니다

저는 여전히 외롭고 쓸쓸했습니다


추석을 앞두고 계획을 물었습니다

저는 매년 그랬으니 집에 엄마랑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사실 저는 누군가와 명절 계획을 나눈 적이 없어 그게 특이한 스케줄인 줄 몰랐습니다

당신은 그때 저희 가족에 대해 조금 알게 됐습니다


우리가 만난 날은 태풍이 지나가던 때였습니다

추석 며칠 간 못 볼 것이기에 그날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술집에 가자 했지만 당신은 비도 많이 오니 집에서 놀자고 했습니다

저는 술이 필요했습니다

당신은 대화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저는 대화를 거부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는 당신의 그런 관심이 겁이 났습니다

당신에게 '신기한 여자'였는데 저는 더이상 당신의 호기심을 받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왜 그날 싸웠고

내가 왜 우산도 안 챙기도 뛰쳐나왔는지

당신은 왜 저를 쫒아오지 않았는지

저는 아직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추석 이후에 당신이 연락을 했지만 저는 받지 않았습니다

10월 연휴를 앞두고 당신은 또 연락을 했습니다

저는 그날 친했던 남자선배와 술 약속이 있었습니다

한참 마신 후 문자를 했습니다. '00오빠와 술 마셔요. 내일 얘기해요'

우리의 술자리는 길어졌고 당신은 한새벽에 다시 연락했습니다

전화를 받았지만 제대로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많이 취했었습니다

해가 넘어가서야 저는 깼습니다


전화기에는 수십 통의 부재중전화가 있었습니다

당신의 문자도 수 건이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모진말이 남겨졌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못했습니다

그때 저는 당신이 저를 의심한 것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 아무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화가 났습니다. 저를 의심한 당신이 미웠습니다

시간이 흘러 화가 누그러지는 만큼 기억이 또렷해졌습니다

언젠가 당신에게 그 선배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그때 당신은

"내가 남자라 아는데 그 선배는 당신을 좋아하는 겁니다. 정말이예요. 지금처럼 그의 감정을 모른채하면 당신은 나쁜 여자가 될 수 있어요"라고 조언했습니다

비를 좋아하던 당신

빗속에서는 아이처럼 순수해지던 당신

지금도 이 비를 보고 있나요?

"미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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