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얼굴이 있었다. 달처럼 밝았다너무 밝아 다들 바라만 봤다.
지도에서 우리 마을을 찾으면 등고선 좁은 산골에 있었다
대부분 농사를 짓던 집에서 자라던 우리들은 부모의 그을음을 대물림 받은 듯 모두 까맸다
해가 짧은 산골이라 더 애써 낮을 부여잡고 놀았던 우리였다
그렇게 까만 얼굴들이 땀과 먼지로 뒤범벅이던 8월에 너는 이사왔다
너의 모든 것은 우리 마을에 어울리지 않았다
너는 하얀 얼굴이었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를 곧잘 하나로 땋았다
너는 엄마하고만 살았고
그 엄마는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진료소 소장이었다
곧 너는 농사를 짓지 않는 유일한 집의 아이였고
얼굴이 까맣지 않고 긴 생머리를 가진 유일한 여자아이였다
개학을 하자 5학년 1반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너와 네 형제를 주시했다
아침조회 때 넌 우리 반 맨 끝에 줄섰다
누구보다 큰 키였는데 누구보다 하얀 얼굴이라 모두의 눈에 띄었다
그렇게 너는 네 인생에서 가장 독특한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남녀칠세부동석이 칼같았던 문화였다
어른들보다 아이들이 더 칼같이 지켰다
여자랑 놀면 놀림감이 됐고 여자랑 말을 섞어도 흉을 봤다
커서 생각해보니 부끄러울 정도로 유치한 질투심이었다
너는 여자아이들에게 둘러쌓여 지냈다
까만 얼굴들은 너의 얼굴과 머리카락에서 시작해 너의 원피스, 필통, 손톱까지 궁금해했다
너는 교실 맨 끝에 앉았기에 교실 풍경은 그 시대 반공사상처럼 극명히 갈렸다
남자들은 곧 북침을 시작했다
네 책상 옆에서 쉬는시간마다 남자들은 림보를 했다
여느때보다 열정적으로 허리를 꺾었고
그렇게 꺾어 보는 세상에 너의 웃는 얼굴이 나타나니 허리힘은 더 단단해졌다
나는 림보를 잘 하지 못했다
패배감이 들었지만 나는 림보로 친구들을 이길 수 없었다
우리 학교에는 축구부가 있었고 한 학년에 한 반밖에 없었고 그 반에도 남자는 20명이 안 됐기에
거의 전원이 축구부였다
나는 특출나게 잘하지는 않았지만 지략을 인정받아 미드필더로 뛰었다
굳이 자평하자면 손흥민은 아니었지만 박지성이랄까(흠흠)
우리 축구부는 군 대회에 나가 준우승을 했다
보통은 이긴 후 엄마에게 달려갈 초딩들이었으나 그 날은 반 아이들과 강강수월래를 했다
네 손이 누구의 손을 잡았는지 나는 기억하고,
그 놈은 남학생 무리에서 깍두기 급이었기에 네가 마음이 있어 잡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우리집은 버스종점 앞에서 식당을 했다
진료소장님은 매주 월요일 읍내 보건소에 나갔고 가끔 우리집에서 식사를 했다
그렇게 우리 엄마는 소장님과 친해지셨다. 나는 엄마를 더 사랑하게 됐다
6학년 여름이 됐는데도 어떤 남학생도 너랑 친해지지 않았다
누구나 마음을 품고 있었지만 누구도 20여명의 경쟁자에게 눈초리를 받으며 행동하는 용기는 없었다
2학기 개학하는 날 너는 네 책상이 아니라 교단에 섰다
도시로 전학간다며 인사를 했다
그날 남학생들은 학교를 마치고 모두 집으로 갔다
수업이 끝나면 운동장 벤치에 모이던 불문율이 어겨진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너는 광주의 학교로 전학을 갔고 나는 남은 가을을 준비한 후 그 동네 중학교에 진학했다
다시 일년 후, 내 동생이 네 동생의 편지를 받았다
둘 또한 같은 학년이었고 서로 친해 편지를 주고 받게 됐다
네 동생의 편지를 통해 나는 네 안부를 들을 수 있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동생에게 부탁을 했다
"걔 언니에게 나랑 편지할 건지 물어봐줘."
너의 첫 편지는 나를 충격에 빠뜨렸다
"사실 나 네가 마음에 들었어"
편지를 보내고 다시 답장을 받기 까지 평균 열흘이 소요됐다
나중에는 답장 기다리는 게 힘들어 3일이 지나면 새로운 편지를 썼다
중2 여름방학에 나는 광주에 사는 누나에게 반찬을 가져다주면서 너와 약속을 잡았다
우리는 금남로에서 만나 영화를 봤다. 탑건이었나? 전투기가 나오던 영화였으나 내용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네가 입고 나왔던 연한 보라색 원피스와 파란색 방울이 달린 머리끈은 기억한다
영화를 보고 롯데리아에 가서 햄버거를 먹었다
그리고는 거리를 걷다 음반가게에 들어갔다
이런 저런 테이프를 뒤져보다가 신승훈의 앨범을 들고 네가 말했다
"이걸 나눠 가지고 싶었는데..."
그리고는 내려놨다
가지고 싶으면 가지는 건데 왜 내려놓지?
헤어지는 네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했고 나는 그 아쉬움이 좋았다
누나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또 시골집으로 오는 버스에서 내가 곱씹은 건
너의 하얀 얼굴, 세련된 원피스, 영롱한 방울, 소스를 전혀 묻히지 않고 햄버거를 먹던 그 품위...모두 아니었다
"나눠 가지고 싶었는데......"
왜 너는 그 말을 했을까, 그리고 왜 그걸 사지 못했을까?
신작로를 달리던 버스가 큰 돌을 밟았는지 크게 요동쳤다
"뎅~"
분명 내 머리에서 그런 소리가 났다
우리집은 가난했고 나는 겨우 차비만 받아 광주 누나집에 갔다
누나에게 시내 구경을 한다고 하니 5천원을 줬다
차비를 빼고 지폐 4장이 남아있었다
영화도 네가 샀고 햄버거도 네가 샀다
중학생 용돈으로 이미 충분히 지출했을 터였다
첫 데이트를 하는 남자는 돈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테이프가 5천원이었으니 같은 테이프를 나눠가지려면 1만원이라는 돈이 필요했다
나는 네 의도를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때 알았더라도 나는 그 테이프를 살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당시 내 손에 쥐기 힘들었던 지폐 4장을 놓기 싫었을 터였다
버스에서 내린 내 얼굴은 8월의 노을보다 더 붉게 타올랐다
나는 네게 편지를 할 수 없었다
네 편지는 서너통 쌓였었다
그래도 나는 네게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광주를 다녀간 지 한 달쯤 지났을 때 동생이 물었다 "형 왜 편지 안 하냐고 하던데"
애꿎은 동생 머리에 불이 났다
22살 대학교 3학년 때 너는 내게 연락을 해왔다
그때까지도 소장님은 동네 진료소를 지키고 있었다
엄마를 통해 내 소식을 듣고 연락을 했다
너는 광주 대학을 다녔고 나는 서울 대학을 다녔다
너는 방학 때 서울에서 학원을 다닌다며 날 찾아왔다
나는 그때 군대를 미루고 학교를 다닐 때였다
우린 같은 신문방송을 전공하고 있었다
너는 졸업을 대비해 방송국 취업을 위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는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한답시고 데모를 하고 있었다
나는 네게 내가 왜 군대를 미뤘는지 부모 속 썩이면서 학교에서 뭔짓을 하고 사는지 말하지 않았다
헤어질 때쯤 너는 그때 왜 편지를 안 했는지 물었지만 나는 그때처럼 입을 닫았다
31살이 되고서 강남 한 식당에서 너를 만났다
너는 남자친구가 사장인 식당의 매니저를 맡고 있었다
나는 결혼을 준비하던 직장인이었다
가게가 문 닫기 한 시간 전쯤 찾아가 자리를 잡았다
너는 남친에게 양해를 구하고 내 자리에 앉았다
고기를 시켰고 소주도 시켰다
십여년만에 만나 고기를 굽고 소주를 건배하는 게 어색했다
셔터를 내린 남친이 자리에 합석했다
우린 거나하게 마셨고 남친은 너의 옛날을 궁금해했다
림보 얘기, 하교할 때 진료소 앞에서는 달려야했던 얘기...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많이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하얀 얼굴이 있었다. 달처럼 밝았다
너무 밝아 다들 바라만 봤다"
너를 보면서 나는 저 말을 했다
그날 나는 네게 곧 결혼한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희망은 아니었다. 네게 축하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 후 우린 다시 만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