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회사 업무는 아침 9시부터 시작해 대략 오후 4시 정도면 마무리가 된다. 원래는 오후 5시가 정식 퇴근 시간이지만, 급한 일이 없는 이상은 콩이와 까꿍이 하원 시간에 맞춰 퇴근을 한다.
난 브런치 수요 연재를 시작한 후, 화요일 오후 4시가 되면 꼭 A4 두 장 분량의 글을 프린트 해 가방에 넣는다. 마지막으로 조용히 읽어본 후, 업로드를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날은 무슨 이유에선지 글이 완성 되지 않은 채로 사무실을 나와야 해서 마음이 바빴다.
글 작업할 장소를 정해야만 했다.
하원만 시켜 주고 집으로 갈까? 조용히 작업하면 금방 완성 될거야.
아니면 요즘 자기들끼리 잘 노니까 콩이네에서도 글 작업이 가능할지도? 조금 더디게 되더라도 기다렸다가 엄마를 모셔다 드릴까?
또 모질지 못한 싱글녀 고모의 선택은 후자였다. 하지만 이런 나의 선택을 비웃기라도 하듯 내가 선택한 계획은 콩이의 말 한마디로 산산조각이 났다.
콩이와 까꿍이는 어린이집에서 탈출하듯 뛰어나와 차 뒷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할머니가 아가들 뒤를 따라 타면서 말했다.
“우리 아가들, 오늘은 날씨가 별로 안 좋으니까 놀이터 가지 말고 곧장 집으로 가서 놀자.”
할머니의 제안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모님이 운전기사에게 말하는 것처럼 턱하니 자리 잡고 앉아 콩이가 답했다.
“아니, 오늘은 고모집!!”
헉!!! 예상 밖의 답이었다.
“콩아, 뭐라고??” 나는 재차 물었다.
“고모집!! 고모집 가서 놀거라고!”
나는 ‘이런 젠장! 누구 맘대로!!!’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평소 부드럽고 우아한 고모인 양 말했다. “콩아, 오늘은 고모가 할 일이 좀 있어서 내일 놀러 오면 안 될까?”
나의 선택 목록에는 콩이네에서 글을 완성하느냐, 집에 가서 조용한 가운데 글을 완성하느냐 두 가지가 있었다. 나의 집에 그들이 온다는 건 목록에 없었다. 절대 그래선 안 되는 상황이었다.
고모 보석함에는 보석은 없어!!!
한 달에 한번 꼴로 고모 집을 찾는 조카들,
그들이 다녀간 후면 거실에 있는 모든 물건들은 침실로, 침실에 있는 모든 물건들은 죄다 거실로, 자리이동이 아주 심한지라 한바탕 청소를 하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다. 어느 날인가는 한바탕 청소에 지친 몸으로 겨우 침대에 누웠는데, 발아래 뭐가 걸려서 보니 주방에 있어야 할 국자가 이불 속에서 나온 적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느 날인가는 업무가 바빠 그들만 남기고 회사로 복귀해 일을 마치고 온 적이 있었다. 여전히 집이 엉망이 되어 있는 건 그런가보다 했는데, 그 날은 할머니와 악동들의 눈치가 이상했다.
“뭐야?? 빨리 말해.”
“실은 고모, 튼튼이랑 공인 줄 알고 던졌는데.”
“뭘!!!! ...뭐어얼 던졌는데???”
일본에서 건너온 도자기 인형으로 내가 무지 이뻐하던 녀석이었는데, 던져 깨뜨리고 잔해까지 깨끗이 치워놓은 거였다. 그런 전력이 있는 그들이 왜 하필, 글을 써야 내일 업로드할 수 있는 이 시점에!! 왜 하필 고모집을 외치고 있는 것인지, 빨리 콩이의 마음을 돌려야겠단 생각뿐이었다.
“콩아, 고모가 오늘은 너무 급하게 할 일이 있어서, 고모 좀 생각해 주면 안 될까?”
이제 아예 까꿍이도 합세해 외쳤다. 타협은 없었다.
“고모집!! 고모집!!” 6살, 5살 아가들한테 무슨 배려를 기대하니 싶어 마음을 비우고, 나의 집으로 차를 돌렸다.
마음을 비우고, 그들과 한바탕 침대에서 뒹굴고 놀았다.
“까꿍아! 너무 재밌지?”
“응.”
“그러면 까꿍이 오늘 고모랑 고모 집에서 이렇게 놀다가 자고 갈래?”
“응??” 까꿍이는 당황한 듯 반문을 했다. 평소 엄마 껌딱지인 까꿍이에겐 위기의 제안이었을 것이다.
“자고 가라?? 고모 혼자 자면 무섭고 심심해.”
까꿍이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의외의 답을 했다.
“응, 고모. 근데, 오늘만이다!?”
“우와. 정말??”
옆에서 듣고 있던 콩이가 말했다.
“고모, 까꿍이는 엄마 껌딱지라 고모랑 못 자. 포기해.”
하지만 까꿍이는 어색하게 씨익 웃으며 다시 한번 더 다짐을 받았다.
“정말 오늘만이다. 고모.”
드디어 콩이맘이 퇴근해 아가들을 데리러 왔다.
저녁까지 거하게 먹고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 나는 옷을 주섬주섬 입는 까꿍이가 뭐라 말하나 싶어 그에게 말했다.
“까꿍아, 고모랑 자고 갈거지?”
까꿍이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고모, 아까는...” 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무섭고 심심하다는 고모 말에 ‘오늘만이다’하며 씨익 웃었던 멋진 배려.
‘까꿍아 네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배려였어.’라는 말 대신 까꿍이에게 말했다.
“까꿍아! 아까는 장난이었지?”
그때서야 까꿍이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모? 고모도 장난이었어?”
“응, 고모 장난이었어.”
“응, 그렇구나. 나도 장난이었는데.”
비록 그날 나는 늦은 밤까지 글을 수정하게 되었지만, 아주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배려를 받아 행복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