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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rekim Apr 08. 2019

가네끼스시: 겨울도 여름도 아닌 봄

오랜만의 점심 약속이었다. 사실은 도저히 저녁에 시간을 맞추지 못해 세 달 가까이 이월되던 약속이 어느 날의 점심에 기적적으로 성사된 것이었다. 화창한 낮의 햇살에 퇴근 후에 이자카야에서 따끈한 청주나 마시자던 겨울의 약속이 무색했다. 회사 건물 사이로 짙은 회색 정장을 입은 회사원이 걸어왔다. 입성은 회사원인데 햇살을 손날로 가리면서 걸어오는 모양새가 대학생 때 수업 마치고 밥집 찾아가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회사 건물 가운데 자리잡은 주상복합 상가는 분주하게 점심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큰 사각형을 그리는 상가 복도에 유리벽으로 구획된 식당마다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다. 여러 사람이 만들어내는 낮은 웅성거림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에, 친구는 여전히 넓은 보폭으로 앞서 걸어갔다. 투명한 벽으로 나누어져 있는 상가에서 드물게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벽이 나타났다. 나무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하얗게 쏟아지는 대낮의 일광도 상가의 백열광도 차단된 공간이 나타났다. 눈이 피로하지 않을만큼만 밝은 조도의 공간이었다. 친구가 예약해둔 다찌 안쪽 두 석 외에는 만석이었는데, 귀가 괴롭지 않았다. 따끈한 녹차를 마시면서 앞에서 초밥을 쥐는 손의 움직임을 가만히 구경했다. 서로의 근황을 묻지 않은 채 우리는 초절임한 우엉이나 무 따위의 맛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일상이 요청하는 속도가 아니라 음식이 주어지는 속도를 따라 식사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옆자리에 앉은 사람도 그렇다는 것을 그냥 알 수가 있었다. 

하루 이틀 숙성된 광어의 촉감에 대해서, 삼킨 뒤에도 입에 남는 단새우의 감칠맛에 대해서, 성게알의 달콤함에 대해서, 한시간 가까이 감각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머릿속에 근황이 떠오르려고 할 때마다 음식을 내어 주시는 분은 맛에 대해서 질문했다. 그러면 정신없이 지나간 겨울의 기억이나 여름까지 겪게 될 일들에 대한 염려는 한 구석으로 접혔다. 그냥 먹는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옆자리의 친구는 자꾸 내가 못 먹는 생선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고, 나는 번번이 기대를 꺾었고, 점점 즐거워졌다.


단팥이 올라간 녹차 아이스크림을 마지막으로 나무 미닫이 문을 닫고 나왔다. 백열등 불빛이 눈을 찔렀다. 점심시간이 끝나가는 식당가는 다시 조용해져 있었다. 사우나라도 하고 나온것처럼 개운했다. 상가 건물을 나와서 다시 처음 만났던 곳에 섰다. 둘 다 시간을 확인하고는 가방을 고쳐 들었다. 고생해라, 내가 말했다. 또 보자, 친구가 말했다. 어떻게 지내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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