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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rekim Jul 07. 2019

오설록 1979

날이 밝을 때부터 햇빛 한 점 없더니 점심먹을 때가 되어서는 자잘한 빗방울이 투명한 점선을 그었다. 이른 오후에 약속이 있었는데, 나는 그 약속을 마지막으로 일년간 이어오던 연애에 마침표를 찍을 요량이었다. 그리고 그 약속 한시간 반 후에 다른 약속을 잡아 놓았다. 마지막 만남을 한시간 이상 끌 생각은 없었다. ‘그 일’을 해결하고, 일 년 만에 시드니에서 돌아온 친구와 그간의 근황이나 이야기하면서 차를 마실 생각이었다.     

만남을 마무리하려고 하는 이유는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싸움 끝에 폐허가 되어서도 아니고 꼴이 보기 싫을 정이 떨어져서도 아니었다. 단지 상황 때문이었다. 나의 어떤 상황과 그의 어떤 상황 때문에 이 연애에는 같은 문제가 지속되고 있었고, 나는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별은 언젠가 해결해야 할 일처럼 눈에 밟혔다. 내가 많이 지치기 전에, 가능하면 웃으면서 마무리 짓고 싶었다. 그리고 이별의 순간도 그저 특별할 것 없는 순간처럼 지나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웃으면서 헤어지고 싶다는 마음이 무색하게 그의 차를 타자 마자 다투기 시작했는데, 그와의 약속 한시간 반 후에 다른 약속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우리는 계속 같은 길을 돌면서 대화를 했다. 언성이 높아졌다가 낮아졌다. 나는 3분정도 울었다. 그리고 끝내 웃었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그 익숙한 모양으로 우리는 결국 끝이 났다. 그는 다음 약속 시간을 맞춰 나를 약속 장소에 내려줬다.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다. 약속장소는 흰색 주사위모양 건물의 일층이었다. 유리벽으로 막힌 가운데 녹색의 커다란 쇼파와 검은 테이블이 있었고, 남반구에 온 친구가 앉아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찻잎이 담긴 하얀 종자기들이 테이블에 놓였다. 나는 멍하니 웰컴 티만 천천히 마셨다. 친구는 총 여덟개의 찻잎을 천천히 시향하고 사려 깊게 두 가지를 골랐다. 그 사이에 나는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메뉴를 훑어봤다. 글자는 어쩐지 읽히지 않아서 사진을 보고 에프터눈티 세트를 골랐다.     

두가지 차에서는 모두 꽃향기가 났다. 사진과 똑 같은 삼단 트레이에 전통 다과와 프랑스식 디저트를 적절히 섞어 만든 것 같은 자그마한 주전부리들이 내어져 왔다. 탁자 위에 차려진 것들은 조금 놀라운 부분이 있을 정도로 예뻤다. 친구와 나는 트레이의 가장 아래층부터 차근히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시드니에서의 일년과 서울에서의 일년이 달콤하고 향기롭게 지나갔다. 나 아까 삼분 정도 울었어, 프리지아 모양의 파인애플 정과를 먹으면서 내가 말했다. 난 비행기 타고 오면서 열 시간 정도 울었어, 쌀강정을 먹으면서 친구가 말했다.     

쇼파에 깊게 기댔다. 새로 우려낸 찻물이 따스했다. 비가 잔잔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조명은 높은 천장에서 떨어지다 정지한 커다란 흰 꽃 같았다. 트레이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자몽 젤리를 스푼으로 떴다. 새콤하고 달콤하고 씁쓸한 맛이 입에서 뒤섞였다. 혀에 남아있던 단맛이 자몽 향기로 씻겼다. 좋은 마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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