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상과는 무관하게 일을 열심히 하는 편이다. 물론 때때로 내가 받게될 보상의 크기를 가늠해보기도 하고 그 보상의 크기에 따라서 내 태도나 의지를 일부 수정하기도 하지만 그런 상태가 내 기본적 상태는 아니다. 나는 열심히 하는 것 그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내 대학 친구 하나는 받는 것 이상으로 일하는 태도를 노예적인 근성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딱히 해본 적이 없다. 나는 대상이 무엇이든, 그 행위가 무엇이든 간에 정성을 다하거나 열심히 하는 데서 오는 정신적 만족감이 있다고 생각할 뿐이고 그 만족감을 다른 형태로 보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믿을 뿐이다.
여기서 오는 만족감이야 말로 삶의 의미의 본질이라 생각한다.
삶의 의미라는 것은 물질적/비물질적 보상으로 치환되지 않는 그 자체로의 가치를 뜻한다.
그 자체로의 가치를 굳게 믿고 그 안에서 정신적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 행위의 기반이 되는 영역, 혹은 세계에 대해 깊게 물들어야 한다.
예컨대 내가 좋은 문장을 쓰는 행위 자체를 삶의 의미로 믿기 위해서는 글쓰는 사람들의 윤리,원칙,지향,노력과 행위들에 익숙해져야한다. 즉 글쓰기의 세계에 오랫동안 삶을 바쳐온 사람들의 코드를 내 코드로 내재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며, 그들이 합의하는 좋은 문장의 기준들을 납득하고 이해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할 것이다. 그 과정에 뇌가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상태가 됐을 때 우리는 의미적 동기화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뇌이고 허상이라고? 그렇다. 모든 의미가 본질적으로 허상이다. 인간의 의미는 애초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뇌를 잘 훈련시킨 결과로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이다. 이 의미가 절대적 가치를 가져서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의미' 없이 삶의 번민과 부조리를 견디기가 너무 퍽퍽하기 때문에 필요에 의해 구성하는 것 뿐이다.
학문이든 , 일이든, 가족에 대한 헌신이든, 친구와의 우정이든 간에 그 가치를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상태가 된다면 삶의 의미의 문제가 일부 해소될 수 있는 셈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그 가치를 구성하는 제반조건들이 내 뇌의 지향 내지는 토대가 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 토대는 바로 반복된 노출과 학습과정으로 구축된다.
실뜨기,미식,건강관리,픽업아트,댓글달기,커피맛구별 등 모든 행위의 영역에서 삶의 의미는 만들어질수 있다. 삶의 의미는 찾는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대체로 그 과정은 뇌를 훈련시키는 과정으로 이뤄진다.
의미가 이끄는 삶. 이런거 대단한 것 아니다. 신체적 노화를 관리하듯 정신적 안녕을 관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기준과 의미 없이는 불안해하도록 태어난 인간의 숙명을 극복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