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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rekim Mar 15. 2019

브로일링 커피 컴퍼니: 소박하고 섬세한 고집


나는 카페를 좋아하지만 커피를 즐기지는 않는다. 커피가 맛이 없어서는 아니다. 다만 ‘맛’이 있는 커피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초행인 카페에서는 대체로 홍차나 허브차를 마신다. 잎사귀를 우려낸 물은 브랜드에 따라 맛의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거의 예측가능한 맛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사약을 방불케 하거나, 내가 마시고 있는 것이 커피인지 진하게 우린 보리차인지 갸웃하게 되는 일이 빈발하는 커피보다는 대체로 안전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브로일링 커피 컴퍼니에 방문한 날도, 사실은 커피를 마시러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때는 찬바람이 부는 11월의 저녁이었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주택가의 좁은 골목으로 오렌지색 불빛이 마름모꼴로 떨어지고 있었다. 푸르게 어둠이 내린 골목길의 주홍색 불빛에 이끌려서 들어섰던 것이다. 커피 볶는 냄새를 맡고 나서야 카페인줄 알았다. 

아주 잔잔하게 스탠다드 재즈가 흐르고 있었다. 천장에서부터 크림색으로 내려온 벽의 빛깔은 바닥에서 일 미터 높이까지 칠해진 코코아색과 완벽한 수평선을 그렸다. 코코아색은 원목의자들의 다양한 생김새를 정갈하게 정리해줬다. 바닥에서 차오른 코코아색에 어깨를 걸친 테이블과 의자 한쪽으로 녹색의 커다란 잎사귀를 늘어뜨린 관엽식물이 얌전하게 서 있었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조도였다. 그곳은 불편한 구석이 없는 공간이었다. 메뉴에서 맑은 차를 찾아볼 수 없는 것만 제외한다면.

바테이블 너머의 바리스타가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원을 그리면서 조용히 떨어지는 물줄기에 따라 제법 복잡한 향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왠지 여기서라면 커피의 ‘맛’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나는 동티모르를 뜨겁게 마셨다. 커피와 함께 나오는 테이스팅 노트 카드에 다크 초콜릿, 견과류, 카카오 같은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었던 생각이 난다. 그 단어들이 아직까지 기억이 나는 이유는, 실제로 커피에서 그 맛들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내 둔감한 미각으로도 느낄 수가 있었다. 그것은 꽤 이상한 경험이었다. 


나는 브로일링을 생각보다 자주 방문하게 되었다. 맞아주는 인사말이 “어서 오세요”에서 “또 오셨네요”로, 다시 “오랜만에 오셨네요”로 변할 때까지. 겨울에는 브라질과 동티모르를 주로 마셨다. 날이 풀리면서는 에티오피아를 차게 마셨다. 커피를 차게 마셔도 향이 그다지 죽지 않는 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에티오피아의 테이스팅 노트에는 ‘무지개’가 적혀 있었다. 무지개는 잘 모르겠지만, ‘뾰로롱’이나 ‘디리링’ 같은 맛이 나기는 했다. 


내가 에티오피아에서 무지개 맛을 찾다가 동티모르나 브라질로 외도하는 사이에, 브로일링에는 얇게 글레이즈를 입힌 레몬 마들렌이나, 전혀 달지 않은 펌킨파이 같은 디저트가 하나씩 자리를 잡았다. 소박하게 생긴 디저트들이었지만 커피를 갈고 내리는 섬세함이 묻어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홍차나 허브차는 들여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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