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500원보다 무거운 마음

처음으로 절차를 밟았다

by 꾸벅이
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https://adrhome.reb.or.kr/)


나는 웬만한 건 그냥 넘기는 편이다.
가끔은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의 사정이 납득이 가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조금 무례하게 굴어도,
"아, 저 사람도 뭔가 여유가 없었겠지."
"나였어도 저 상황이면 그렇게 했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넘겨온 일이 많다.


어떻게 보면 참는 거고,
어떻게 보면 이해하는 거다.
그리고 나는 그걸 꽤 괜찮은 방식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한 번 짚고 넘어가 보고 싶었다.




2년 동안 살던 월셋집이었다.

회사 이직으로 정신없던 시기,

계약 만료를 앞두고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3개월만 더 살 수 있을까요?"

집주인 쪽은 "네, 뭐 그러시죠" 했다.


계약서도, 중개사도 없이

그냥 구두로 연장된 3개월이었다.

이사 자체가 너무 스트레스라서

그땐 그게 꽤 고마웠다.


고마운 마음에

그 기간은 월세도 몇만 원씩 더 드렸다.


...


이렇게 좋게 끝났으면 참 좋았을 텐데.


퇴실 당일, 전화가 왔다.

"복비는 주셔야겠네요.
그리고 퇴실 청소비도 5만 원 더 받을게요.

총 374,500원입니다."


음..?

처음엔 별생각 없었다.

5만 원 더 받는 건 계약서와 다르긴 했지만,

소액이기도 했고,

어쨌든 고마운 마음도 있었으니까.


복비도 그냥 원래 내가 내야 하는 건가 싶어서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근데 끊고 나서 문득 이상했다.

계약서도 없었고, 중개사도 없이 연장한 건데

왜 내가 복비를 내야 하지?

그 순간부터 뭔가 어긋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액수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해되지 않는 말을 당연한 듯 넘어가는 게

불편했을 뿐이다.


실제로 검색해 보니

이런 경우엔 임대인이 내야 하는 쪽으로

해석된다는 내용이 많았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다시 전화해서

내가 복비를 내는 게 맞는지를 다시 물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집주인이 벽 얘기를 꺼낸다.

"지금 보니까 벽이 좀 더럽네요.

새로 도배하려면 복비 정도 비용은 들어요.

그냥 복비 내시는 거로 정리하시죠."


그 순간 알았다.

이건 뭔가 합리적인 계산이 아니구나.

"그냥 돈 내고 나가라"는 식의 분위기였다.


물론 내가 실제로 벽을 더럽게 썼을 수도 있다.

그런데 퇴실할 때 관리사무소장과 함께 집 상태를 확인했고,

그때는 "벽 정말 깨끗하게 쓰셨어요."라고 하셨다.


하지만 일단은 보증금이 급한 상태였기 때문에

일단 알겠다고 했고,

이해되지 않는 점은 나중에 차분히 짚어보기로 했다.




실제로 보증금은

374,500원을 뺀 금액만 입금되었다.


이제 선택해야 했다.

나머지 금액은 받았으니, 집주인한테 다시 전화해 보거나

아니면 좀 더 합리적인 방법이 있는지 찾아보거나.


솔직히 다시 전화하긴 싫었다.

괜히 감정적으로 접근할 것 같았고,

대화가 논리적으로 흘러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엔 다르게 해보기로 했다.


일단 법을 잘 아는 여자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다.

"법률구조공단 무료 상담 한 번 받아봐."


상담을 찾다 보니 회사 복지에도 법률 상담이 있어서

바로 신청했고, 변호사분은 내 이야기를 듣고 정리해 주셨다.

청소비를 5만 원 더 청구하는 것은 계약과 다르기 때문에 부당하다.

연장 시 중개사가 없었고, 연장 기간을 끝까지 잘 살았으니, 복비는 임대인이 부담해야 한다.


그리고 말해주셨다.

"보증금 반환 청구 소송을 하거나,

혹은 그 전에 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

조정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소송은 좀 부담스럽기도 했고,

먼저 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를 통한 조정이 괜찮아 보였다.


집주인과 직접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여러 전문가분이 조정위원으로 절차에 참여한다고 하시니

내가 뭔가 잘못 생각한 게 있는지도 잘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감정적으로 흐를 수 있는 일도 배제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래서 귀찮음을 이겨내고

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의 조정을 신청하게 되었다.

막상 보니 절차 자체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인적 사항, 분쟁 내용, 증거 자료 등.


분쟁 내용은 예시도 많았고,

ChatGPT 4o랑 같이 쓰면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모든 걸 마치고,

마침내 최종 신청 버튼을 눌렀다.




며칠 뒤,

갑자기 입금 알림이 떴다.

금액: 374,500원.


곧장 전화도 왔다.

"미안해요.
돈은 방금 입금했고요.
조정 신청은 그냥 취하해주시면 좋겠어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모든 게 정리돼 버렸다.


편하다기보단,
조금 당황스러웠다.
대화 한번 없이 마무리되다니.
이게 더 평화로운 건지, 허탈한 건지.
기분을 정확히 말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돈은 되찾았다.


그리고 이번 일에서 얻은 건
단지 돈뿐만이 아니었다.


감정적으로 싸우는 대신
기록하고, 정리하고, 절차를 밟아보는 일.
그게 오히려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사정을 이해하고 싶다.
앞으로도 가능하면

좋게 좋게 넘어가는 사람이길 바란다.


하지만 이제는
그 무던함이 나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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