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이어보기

by alittlepicasso


상담일을 오래 하신 나의 심리 주치의 이모가 숙제를 두 개 내줬는데 하나는 문맥을 맞출 필요도 없다. 너를 힘들게 하는 대상에 대해 생각나는 것은 뭐든 쓰라는 것, 다른 하나는 내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감사한 일을 모두 찾아 쓰라는 것이다. 물론 두 개를 동시에 할 수는 없을 테니 일단 후자를 먼저 해보기로 했다. 일단 노트를 펴고 필기감이 좋은 펜을 꺼냈다. 번호는 붙이는 것이 좋을까 안 붙이는 것이 좋을까 생각한다. 그냥 붙이는 걸로 결정했다.





1.

제일 처음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베란다에 없어진 선인장 자리이다. 어느 날 갑자기 많은 화분들 중 선인장, 정확히는 작은 선인장들을 종류별로 모아놓은 화분이 눈에 거슬리고 불편했다. 여기저기 가지가 나온 모양새며 뾰족한 가시들이 너무 소름 돋고 보기 싫었다. 다시 예쁘게 보려고 해 봤지만 이미 한 번 꽂힌 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그에게 말했는 데 "그냥 안 보면 안 돼? 난 계속 키우고 싶은데......" 머리가 많이 자랐다고 매일같이 들여다보며 좋아하던 그였다. 지금 보니 선인장이 어디론가 치워지고 없다.


2.

엊그제 오랜만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혹시 이모에게서 무슨 이야기를 듣고 걱정돼서 연락했나 싶어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딸램 유튜브에 광고 달린 거 너가 영업하고 그러는 거야?"

"자동으로 해주는 거야. 왜?"

"아니 그런 거면 힘든 거 아닌가 싶어서...... 어떻게 하면 좋은 거야?"

"엄마가 뭐 도와주게?"

"그럼 엄마가 해줄라고 하지. 아참 그 말하려고 연락했는 데 잊어버릴 뻔했네. 너 거기서 밤에 혼자 다니는 거 아니지? 인스타그램에 어쩌고저쩌고 하길래......"

"아니야 사람들이랑 같이 있었어요. 걱정하지 마요. 딸램 인스타그램 열심히 보네 울 엄마"

"위험하게 늦게까지 돌아다니고 하지 말고요."

"알았어. 걱정하지 마 엄마는 잘 있지?"


첫째, 엄마는 다행히 혼자서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다는 것

두 번째는, 엄마가 내가 잘 지내고 있다고 믿도록 나도 잘하고 있다는 것


3.

정리되어 있지 않은 어지럽혀져 있던 집을 청소하고 싶었는 데 땅에 붙은 것처럼 무거운 몸과 무기력에 내버려 둔지 한참이다. 하우스키퍼에게 딥클리닝과 내친김에 에어컨 클리닝 서비스도 받았다. 욕실 수도꼭지가 반짝반짝, 구석구석 새 집 같다. 깨끗해진 거울을 통해 내 모습을 보고 엉망진창이구나 정신을 좀 차리자 다짐한다. 얼룩 하나 없이 투명해진 유리창으로 보이는 야경은 예뻤다.


4.

오늘 날씨가 참 좋다. 햇살이 잘 들어오는 구석에서 일단 아무거나 적는다. 그리고 좋은 시들을 필사한다. 조금 앉아 있으니 태국의 햇살은 너무나 강렬하다. 덥다. 땀이 주르르 흐른다. 샤워를 하고 미니 선풍기를 옆에 두고 목 넘김이 찢어질 듯한 탄산수를 마신다. 스피커를 켜고 며칠 째 계속 듣던 앨범을 또 재생한다. 어제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들었던 곡이 유난히 좋다. 그렇게 하릴없이 종일 음악을 듣는다. 그러다 문득 오늘의 석양은 어떻게 생겼을지 보고 싶어 바다로 나간다. 그게 뭐든 내가 보고 싶을 때 언제든 볼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하다. 빠알간 석양 아래 파도가 철썩 인다. 철썩




그린이_작은 피카소 이두열. 두 살 때 자폐 판정을 받고 그림을 통해 세상과 소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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