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아침을
유럽을 다녀온 지 벌써 2년이 넘었다. 사실 그보다 훨씬 오래된 것 같이 까마득하다. 그래도 일기장 펼쳐놓고 기억을 더듬어 가며,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다 보니 다시 여행을 가는 것처럼 설렌다. 유럽 여행을 꿈꾸는 누군가에게도 내 글이 공감과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Vous êtes prête? c'est parti!
(준비됐나요? 시작하겠습니다!)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해서 볼트(volt)로 차를 불렀다. 공항게이트를 혼동하는 바람에 기사님과 우리는 한참 엇갈렸다. 위아래층을 오르락내리락 한 끝에 겨우 만나게 된 기사님께 한소리 듣고 출발했다.
파리드골 공항에서 파리 시내로 가기 전까지의 길은 그냥 인천공항 가는 길이나 비슷했다. 프랑스에 온 것이 전혀 실감 나지 않았다. 한참을 달린 끝에 12개의 도로 중심에 있는 개선문(Arc de Triomphe)을 스쳐 지나쳐가는데 그제야 찌르르 전율이 왔다.
숙소(Relais Du Louvre Hotel)는 루브르 박물관 바로 옆에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아늑하고 멋졌다. 블루투스 스피커까지 구비되어 있어서 샹송을 들으며 짐정리를 했다. 방은 깨끗하고 따뜻했고, 온수도 잘 나왔다. 건식 화장실이 특히 마음에 들었는데, 욕조에 소금 입욕제까지 있어서 피로를 풀기 좋았다. 예술의 국가인 것을 인증하듯이 작은 방에는 벽마다 그림이 걸려있었다. 내가 바라던 프랑스의 모습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짐 정리와 방 구경을 마치고, 빵을 사러 주변 가게(Boulangerie BO&MIE Louvre-Rivoli)에 갔다. 보미 빵집!! 아는 언니 이름이라서 더 정겹다. 매장 안은 사람들이 꽤 북적거렸고, 치즈바스크와 샌드위치가 참 맛있었다. 특히, 커다랗고 촉촉한 치즈바스크는 아직까지도 그만한 걸 먹어보지 못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파리 시내 구경에 나섰다. 다행히 주변 명소와 가까워서 뚜벅이에게는 최적이었다. 가장 먼저, 루브르 박물관(Musée du Louvre)에 갔다.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가기 전 관문인 Cour Carrée를 지나쳐야 했는데 오래되고 웅장한 건물들에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루브르 박물관 피라미드 앞에서는 역시나 관광객이 많았고, 피라미드 아래에도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여있었다. 구름처럼 몰려든 인파를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혔다. 내심 박물관 표를 안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리에서 고작 2일을 머무는 데, 루브르 박물관을 구경하려면 턱없이 부족한 시간일 것 같아서 이번 여행에서는 과감하게 패스했다.
건축물들이 얼마나 정교한지 볼 때마다 '저걸 어떻게 조각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백 년이 지나도 끄떡없이 위풍당당한 모습을 뽐내는 건물들의 기세에 눌리는 느낌이었다. 요즘 한국에도 유럽 스타일의 주택가가 많지만, 파리 시내 건물들을 보고 나니 한국의 아파트와 신축 주택들이 대충 만든 장난감같이 보였다. 물론 경복궁 같은 한옥들은 고유의 독창성을 가지면서도 파리의 건축물만큼이나 섬세하고 정교하며 아름다웠다. 나에게는 새롭고 멋진 건물양식인 것처럼 외국인들도 우리나라 한옥을 좋아하는 것 같다. 유럽을 다녀오고 나서 별 감흥이 없었던 한옥이 더 색다르고 멋지게 보였다. '느림의 미학' 장인정신보다 효율성을 추구하는 현세대에 씁쓸함을 느끼며 건축물을 구경했다.
루브르 박물관을 스쳐 지나가고, 자연스럽게 뛸르히 정원(Jardin des Tuileries)으로 갔다. 아담한 크기지만 자세히 보면 조경에 신경을 많이 썼다. 물론 겨울에 갔으니 황량한 나뭇가지들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래도 시베리아 강추위가 고스란히 내려오는 한국에 비하면 아주 온화한 날씨였다. 낮에는 외투를 벗고 다닐 만큼 날씨가 괜찮았다. 분수대 근처에는 분수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모습이 조금 낯설면서 재미있었다. 꽤 오랫동안 앉아서 물멍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여유를 읽을 수 있었다.
박물관 외관 구경을 마치고, 공원 나들이도 했으니 쇼핑을 하러 생제르만데프네(Saint-Germain-des-Prés)로 갔다. 이 주변은 꽤 부촌이어서 거리도 깨끗하고, 세련된 가게들도 많다. 무엇보다 사람이 별로 없어서 좋았다. 유명 프랑스 브랜드 아페세(A.P.C)도 보여서 구경했고, 친구는 가방을 득템 했다. 나는 딱히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장바구니만 샀는데 지금 돌아와서 보니 좀 아쉽다. 그리고 다른 옷가게들도 구경했고, 유니크하고 생각보다 질 좋은 옷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엔 없는 일본 브랜드에서 카디건과 외투를 구매했다. 지금도 아주 잘 입고 있다. 파리에 있는 어느 매장의 옷들이 내 치수를 잰 것처럼 사이즈가 너무 잘 맞아서 모처럼 무엇을 사야 하나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었다.
조금 돌아다니다가 출출해질 때쯤, 유명한 피에르 에르메(Pierre Hermé Paris) 마카롱을 구매해서 먹었다. 마카롱에 큰 관심이 없었기에 하나만 사서 먹었는데 장미향이 은은하고 끝맛에 살짝 레몬향이 감도는 것이 취향 제대로 저격당했다. 미식가는 아니지만 '맛이 예술이군'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한 가지 맛이 아니라 다양한 맛이 어우러져서도 본인의 색을 잃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 데 날이 어두워졌다. 힘들어서 세계 최초의 백화점 르 봉 마르셰(Le Bon Marché)를 못 간 것도 아쉽다. 근처에 현지인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가게는 아담하고 편안해서 마치 프랑스 친구 집 식사에 초대를 받은 기분이었다. 오늘의 메뉴인 닭고기 카레(?)를 먹었는데 닭이 너무 뻑뻑해서 맛이 없었다. 친구의 비건 메뉴도 별로였던 거 같다. 내 속상한 마음을 읽었는지 이탈리아인으로 추정되는 주인은 연신 서비스로 주는 빵을 더 먹을 거냐고 상냥하게 물어보았다. 그래도 친절해서 봐준다. 파리의 레스토랑은 처음이었는데 이렇게 날리다니... 좀 속상했지만 파리는 언젠가 또 올 거고 다음에 갈 거 남겨둔다는 생각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파리의 모습은 깜깜한 밤에 은은하게 녹아든 가게들의 네온사인이었다. 나중에 프랑스에 오래 살았던 지인에게 한국의 네온사인들은 요란하고 눈 아파서 싫었는데 프랑스 네온사인은 그렇지 않아서 좋았다고 했더니 프랑스 지인이 본인은 한국의 화려한 네온사인 분위기를 좋아한다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렇군.. 이렇게 사람의 취향은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